갈라파고스 땅거북

고지대로, El Chato Tortoise Reserve.

by 노마드

22. 12. 25: Day 10,


항공우주공학도의 길을 걷고 있지만, 어린 시절 가졌던 동물학자의 꿈이 결국 나를 이공계로 이끌었기에 동물은 여전히 내게 특별한 의미를 지닌다.


오전의 찰스 다윈 연구소 방문은 분명 뜻깊었으나 요양원과 영유아실이 두루 갖춰진 종합병원을 방문한 느낌이 강했고, 동일한 맥락에서 "본다"기 보다는 "관람"한다에 가까웠다. 움직여야 동()물이지, 한 시간에 1미터는 겨우 움직일까 싶은 땅거북으로는 어린 시절의 탐구욕이 채워지지 않았다.


어느 정도 예상은 했지만, 아쉬움이 조금 남았고, 언제 다시 오겠냐는 생각이 들어 고지대로의 투어를 결정했다.


갈라파고스에, 특히 산타 크루즈 섬에 처음 도착한 여행자라면 이렇게 유명한 관광지에 택시 하나 없다는 것이 말이 되냐는 생각을 할 수 있다. 이는 갈라파고스 택시가 위화감이 전혀 없는 외관을 지니고 있기 때문인데, 길가에서 하얀색 토요타 중형 트럭을 마주한다면 그 트럭이 바로 택시다.


< 호스텔 터줏대감 >


호스텔 문 앞에 서서 우버를 잡아야 할지 고민 중이던 내게 다가온 호스트 아저씨께서는 친절하게도 1분에 두 대씩은 지나가는 저 하얀 트럭들이 택시라는 점을 알려주셨고, 이내 총 3군데 존재하는 땅거북 보호구역 중 내가 가봐야할 곳을 콕 집어주시더니, 택시마저 잡아주셨다. 왕복 1시간 30분에 40달러. 가격도 적절했다.


구불구불 산길을 달리고 또 달리는 지루한 여정이었다. 보호구역으로 진입하기 전까지 눈에 들어오는 것이라고는 광활한 목초지와 드문드문 보이는 소들 뿐이었다. 섬이 넓은 것인지 아니면 개체 수가 적은 것인지, 거북이는 코빼기도 보이지 않았다.


바깥 풍경 구경도 이내 지루해지자 어설픈 스페인어와 번역기를 동원해 택시 기사님께 말을 걸었다. 독실한 카톨릭이셨는데, 성탄절을 맞아 오전에 이미 미사를 드렸으며, 휴일에 가족들과 함께 시간을 보내는 것도 좋지만, 이렇게 나와 일을 하며 돈을 벌 수 있다는 사실에 감사하다고 말씀하셨다.


일 년에 하루뿐인 크리스마스를 온전히 가족과 함께 하지 못한다는 사실이 기분 나쁠 법도 한데 긍정적으로 받아들이시는 모습이 신기했다. 40달러가 평범한 에콰도르 어느 정도의 가치를 가지는지도 모르겠고 섣부르게 판단할 문제도 아니지만 저런 가장을 둔 가족이라면 행복하겠다 싶었고, 한국에 있는 가족 생각이 났다. 온 가족이 모여 성탄절에 미사를 드리러 간 게 언제였는지...얼마 쉬지도 못하고 학교로 돌아가 다시 연필을 잡을 동생 녀석과 늘 그래왔듯 가족의 평안과 행복을 빌며 성당으로 발걸음을 옮기실 부모님 모습이 그려졌다.




차는 산길을 달려 El Chato Tortoise Reserve에 진입했다. 화물차 한 대가 겨우 지나갈 너비의 도로 좌우에 깔린 펜스 너머로 야생 땅거북들이 시야에 들어왔고, 울퉁불퉁한 비포장 도로를 따라 내려가니 주차장과 방문자 센터가 모습을 드러냈다.


10달러를 내고 (해변을 찾아가는 게 아닌 이상 어딜 가도 가이드 비용은 필수라 봐도 무방하다) 캐나다인, 중국인 가족과 함께 보호구역에 입장했다. 초입부터 거대한 땅거북들이 눈에 띠었다. 대부분 풀을 씹으려 움직이거나 풀을 씹고 있었다. 땅거북들을 최대한 자극하지 않기 위해 노력하며 풍경을 눈에 담았다 . 땅거북들 역시 인간의 존재가 익숙한 듯 여유로이 풀을 뜯었다. 하루에 수십 kg을 먹어치운다던데 비록 속도는 느려도 꾸준히 먹어치우는 것을 보니 과장은 아닌 듯 했다.


오전에 잠시 비가 내린 관계로 길이 질퍽거렸다. 미끄러질 것을 우려하는 캐나다인 가족에게 가이드가 3년을 일하면서 넘어진 사람은 한 명 밖에 못 봤다며 말을 이어가던 찰나 뒤에서 캐나다인 가족 중 딸이 미끄러 넘어졌고, 태연하게 이제 두 명이라고 말을 정정하는 가이드의 모습에 모두가 웃음을 터뜨렸다. 넘어진 분도 다행히 잔디에 넘어져 별달리 다치거나 하지는 않은 듯 했다.


< 100년은 족히 살았다니... >


가이드의 설명을 들으며 천천히 보호구역을 둘러봤다. 인터넷으로 충분히 알 수 있는 내용들이었고, 이미 알고 있는 내용이었기에, 주의를 기울인 채 듣지는 않았으나, 우기와 건기의 식생에 맞춰 한없이 느릴 것만 같은 땅거북들이 고지대 혹은 저지대로 하루에 수 km씩 이동한다는 사실은 새로웠다. 그 외에 굳이 꼽자면, 나무에 매달린 사과가 일반 사과가 아닌 독사과이기에 섭취해서는 안된다는 점, 섭취 시 갈라파고스 내의 의료시설 부재로 인해 본토로 이송된다는 점 정도였다. (먹은 사람이 있기는 한가보다.)


< 과거 화산 활동으로 인해 굴들이 존재한다. 이름은 땅거북 투어지만 실질적으로는 땅거북 투어 + 동굴 투어에 가깝다. >


그렇게 천천히 땅거북을 돌아봤다. 땅굴 투어도 포함되어 있었으나, 세 차례의 화산활동으로 지층 역시 세 층으로 갈라져 있다는 게 유일한 특이사항이었다.


< 땅거북과 사진 한 컷 >


오래 전부터 열망해왔던 땅거북과의 조우였음에도 막상 가서 마주하니 폭풍 같은 감동이 밀려오거나 대자연의 경이에 달리 압도되거나 하지는 않았다.


그래도 마냥 즐거웠고, 한없이 자유로웠다.


‘동물의 왕국’을 보고 동물백과사전을 외우던 어린 아이가 어느새 자라나 홀로 이역만리 갈라포고스를 찾아왔다 생각하니 어디든 못 갈 것 없겠다는 자신감이 자연스레 솟아났다




어쩌면 나는 그동안 ‘원하는 일’을 해서는 안된다는 강박에 갇혀 살았을 지도 모른다는 생각이 들었다.


사실이 그랬다. 성공을 위해서라면 힘들더라도 참고 견뎌야 한다며 자신을 다그쳐 왔다.


단비 같은 보상들에 취하지 않으려, 비 온 뒤에서야 굳는 땅이 되지 않게 위해 몸부림쳤다. 비가 오지 않아도 굳을 수 있는 땅으로 거듭나겠다는 망상에 집착했다.


그렇게 용을 써서 내가 쌓아내린 기반은 풀 한 포기 피어날 수 없는, 가뭄에 쩍쩍 갈라져 굳어버린 땅이었다. 비라도 오면 한 번에 휩쓸려가버릴, 굳세지만 한편으로는 더없이 약한 토대였다.


그러니 단비가 내리면 손바닥 같은 우산으로 하늘을 가리고서는 흘러가는 토사를 멍하니, 비가 그치고 작열하는 태양이 땅을 다시 메말라죽일 때까지, 바라보고만 있었다.


이후, 태양이 솟구치면, 그 열기가 더욱 강렬해져 땅을 온통 굳게 태워버리기를 갈망하며, 태양을 바라보고 있었다.


홀로 떠나, 생애 처음으로 오롯이 선 나는 죽음의 땅에서 피어날 수 있는 것은 없음을 깨닫고, 우산을 집어던진 채 비가 나를 흠뻑 적시도록 내버려 두었다.


고개 숙여 내려다 보니 흙 사이로 작은 풀포기가 약동하고 있었다.


어디든 가도 된다는, 어디든 갈 수 있다는, 어디든 가겠다는 자유의 바람이 여름날 콧잔등을 간질이는 미풍이 되어 나를 찾아왔다.




keyword
이전 15화천상의 맛. 갈라파고스 랍스터