혹시 여기서 일하세요?

이사벨라 섬 입도, 홍학, 그리고 작은 해프닝

by 노마드

22. 12. 26: Day 11,


운 좋게도 이사벨라 섬으로 입도하게 된 다음 날 아침, 일어나니 하늘은 구름 한 점 없이 맑았고, 강렬한 햇살이 내리쬐고 있었다.


오후 배편을 예약했기에 선착장에 가 바다 구경도 하고 아이스크림 가게에서 브런치도 먹었다. 짭조름한 빵과 적당히 물기 있는 계란이 잘 어울리는 샌드위치였다.


< 바다이구아나, 바다거북, 젤라또 가게에서 먹은 브런치 >


하릴없이 호스텔 내부의 의자에 앉아 책을 읽으며 시간을 보냈다.


잠시 쉬고자 하면 처리하지 못한 일들이 떠오르는 일상들로부터 벗어나 맞이하는 소소하지만 반가운 시간들.


오후 2시 30분, 페리를 잡아타고 갈라파고스 여정의 마지막 목적지인 이사벨라 섬으로 향했다.


< 푸른 바다. 특별할 것 없는 선착장. >


바닷가를 따라 식당이 즐비하고, 사람들로 북적였던 앞선 두 섬의 선착장과 달리 이사벨라 섬의 선착장은 시골 부두 같았다. 바다 위로 배들이 둥둥 떠있고, 드문드문 배 위에 올라타 쉬고 있는 바다사자들이 눈에 들어오는, 평화로운 곳.


다만, 문제가 있다면, 시내(마을이 더 적절한 표현이려나)와의 거리가 걷기에는 애매하다는 점이었다. 아스팔트로 도로가 깔려 있다면 좋았으련만... 차도는 돌바닥이었으나 드문드문 스쳐 지나가는 차들로 인해 검은 모래가 깔린 길을 캐리어를 끈 채 터벅터벅 걸어가야 했다. 캐리어 바퀴가 계속 헛도는 게 거의 캐리어를 들고 가는 느낌이었다.


반 시간을 걸어 숙소에 체크인을 마쳤다.


얕디 얕은 스페인어 실력을 가진 나와 오로지 스페인어만 사용하시는 할머니와의 대화는 손짓과 팔짓이 거의 절반이었으나 엄지 척과 오케이 사인으로 웬만한 건 다 해결할 수 있었으니 문제 될 건 사실 없었다.


그렇게 방에 짐을 던져놓은 채, 마찬가지로 어설픈 스페인어로 길을 확인한 후 서둘러 홍학을 보러 길을 나섰다.


< 작은 물가 느낌의 Los Flamingos >


머리털 나고 처음 보는 홍학이었으나 너무 멀어서 그런지 별다른 감흥은 없었다. 수도 4마리뿐.


< 다음 날 다시 찾아가서 촬영한 홍학 >


원래는 홍학이 많았으나 수질 문제가 생겨, 아예 다 떠나갔다 다시 돌아온 거라는 이야기를 듣기는 했다.


실제로 홍학으로 유명한 것은 섬 안쪽으로 접근해야 찾아갈 수 있는 Laguna de Flamencos. (여기도 별 것 없었다.)


< 10달러치 저녁 >


바질 향이 짙게 묻어 나오는 닭구이와 모라 주스 한 잔으로 저녁을 해결하고 숙소로 돌아왔다.


< 한국 시골 느낌이다. >


그렇게 우여곡절 끝에 도착한 이사벨라 섬에서의 하루가 지나갔다.




당시에는 별생각 없다가도 되짚어 보면 기묘한 일들이 있다.


자기 전, 샤워를 마친 후 에어컨을 빵빵하게 틀어놓은 채로 침대에서 이리저리 뒹굴던 난 물이라도 한 잔 마셔야겠다는 생각으로 호스텔 1층 카운터 옆 정수기로 향했다.


물을 뜨고 나오는 길에, 뒤쪽에서 소리가 들려 돌아보니, 투숙객처럼 보이는 여자 한 명이 내게 손짓을 하며 나를 불러대고 있었다.


나를? 도대체 왜? 물을 잘못 뜨기라도 한 건가? 어떠한 이유인지 도무지 짐작 가는 바가 없었다. 어쩌겠는가. 가야지.


부르는 대로 가니 대뜸, You know where the towel is?라고 말을 던지며, 타월이 어디 있는지를 물어보았다. 알 리가 있을까. 오늘 도착했는데.


호스텔 주인한테 가서 물어보면 될 것이다라고 답변해 주니, 뚱한 표정을 짓고 스페인어로 밑도 끝도 없이 구시렁대었다.


다 물어봤겠다 싶어 다시 올라가려 하니 영어로 또 다른 질문을 던져오는 여자.


이번엔 샤워기에 따뜻한 물을 나오게 하는 방법을 아냐고 물었다. 이건 그래도 답을 아는 문제라, 나름의 노하우를 알려줬다.


그렇게 다시 방으로 올라가려던 찰나 때마침 호스텔 주인이 타월을 들고 내려왔고, 그 여자에게 호스텔 주인을 소개한 후, 내일 조식을 몇 시에 먹었으면 좋겠다는 의사를 전했다.


그리 하니, 들려오는 말. "No estas trabajando aqui?" (여기서 일하시는 거 아니었나요?)


겸연쩍어하는 말이라기엔 표정이 너무 리얼했다.


그런데 도대체 내가 어딜 봐서 호스텔에서 일하게 생겼단 말인가…


적당히 그을린 혹은 까무잡잡한 피부를 어둠 아래서 보면 그리 생각할 수도 있겠지만, 서로의 얼굴마저 확인한 마당에 내 인종이 갈라파고스에서는 눈을 씻고 찾아봐도 보기 힘든 아시아인이라는 사실이 자명한데, 그리 생각한 연유를 도무지 짐작할 수 없었다.


가끔 호스텔 업무를 보며 숙박을 해결하는 여행객들이 있기야 하다만, 여타 섬에 비하면 벽촌과 다를 바 없는 이사벨라 섬에서, 군 시절 받은 태극기가 박힌 로카 티를 입고, 물통을 든 채 서 있는 모습을 보고 어떻게 직원과 연관 지을 생각을 했을지. 도통 알 수가 없었다.


‘정말 편견이 없구나.’ 정도가 최대한의 감상.


일전 듀오링고에서 학습한 바에 따라, ” No trabajo aqui.”라고 답한 후, 층계를 올라갔다.


생각하면 생각할수록 기묘한 일이었다. 스페인어가 더 익숙하면서도 굳이 영어로 질문을 던진 것도. 마지막에는 스페인어로 내게 되물은 것도. 외딴섬의 여행자에서 돌연 직원으로 오해받은 것도.


방에 들어가 거울을 몇 번이고 보다 이내 고개를 젓고 잠을 청했다. 기묘한 밤이 흘러갔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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