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 도전 편 >
대망의 복학일이 기다리고 있던 어느 날 저녁, 운명을 가를 선택지가 예고 없이 찾아왔다. 과거 홍보단 동기였던 한 친구의 전화가 그 발단이었다. 오랜만의 연락에 고개를 갸웃거리며 통화 버튼을 눌렀는데 예상하지 못한 제안을 들었다. 그는 이번 학기 총학생회 임원으로서 큰 규모의 행사를 기획하고 있는데 그 행사 개최를 위한 TFT(Task Force Team)를 조직 중 나를 '기획운영팀장'으로 영입하고 싶다는 것이다! 전혀 생각하지 못했던 제안이라 바로 답변하지 못했다. 그 행사는 예상 참여 인원만 수백 명 규모의 '사랑의 마라톤'으로, 지역 사회의 장애인과 교내 학생 자원봉사자들이 함께 마라톤을 달리는 연례행사였다. 이런 행사의 중책을 맡아달라다니! 그의 제안에 어안이 벙벙했다. “나를 선택한 연유가 무엇일까?”, “내가 잘 해낼 수 있을까?” 여러 의문이 생기는 동시에 곧바로 가슴이 두근거리기 시작했다.
일단 대답을 보류한 채 전화를 끊었다. 방 안을 빙빙 돌면서 스스로 질문했다. 사람 눈을 마주치는 것조차 어려워했던 내가 복학하자마자 사람들을 통솔할 수 있을까? 괜히 한다고 했다가 망신만 당하고 피해를 주는 건 아닐까? 걱정과 근심이 한가득이었다. 마치 Level.1 게임 캐릭터를 갓 생성하자마자 바로 최종 보스에게 향하는 것처럼 무모해 보였다. 심지어 군대에서 분대장조차 못했기에 리더 역할이 자신 없었다. 그러나 쉽사리 포기할 순 없었다. 이번에도 희미하지만 명료한 내면의 목소리가 들렸다. 도망치지 말고 부딪혀 보라는 본능적인 도전의식이었다. 한번 도망치면 그 꼬리표가 영영 따라다닐 것 같았다. 자신을 겁쟁이로 여기는 것만큼 비참한 건 없었다. 그래서 입술을 꽉 깨물고 현실과 마주했다. "그래, 이건 내 운명이다. 도전해 보는 거야!" 심호흡을 크게 내쉰 뒤 휴대전화기를 집어 들었다.
"친구야, 내가 그 역할 맡을게..!!"
여태껏 여섯 번 진행된 ‘사랑의 마라톤’ 행사는 이미 정형화된 운영 방식을 가지고 있었다. 그러나 총괄 책임자였던 친구와 나는 3가지의 새로운 방식을 시도했다. 원래는 대학 캠퍼스 내에서 행사를 진행했었지만, 이번에는 장소를 외부로 바꿨다. 그리고 장소가 외부인만큼 부스를 새롭게 설치해서 다양한 먹거리, 볼거리를 유치하고 주민의 참여를 이끌어내고자 했다. 마지막으로 포항 MBC 방송사를 통해 대학생들과 장애인들의 우애를 방송으로 송출해서 행사의 취지를 널리 알리고 싶었다. 나와 친구의 욕심이 컸던 만큼 고생도 뒤따랐다.
내가 맡은 기획운영팀은 이 거대한 행사의 중추적 역할을 담당했다. 행사 기획 및 운영의 처음부터 끝까지 모든 것을 준비해야만 했기 때문에 신경 써야 할 것들이 정말 많았다. 나는 업무를 ‘마라톤팀’, ‘부스팀’, ‘공연팀’ 3개의 팀으로 나눴다. 전체 회의 때 거시적인 그림을 구상하고, 세부 팀 회의에서 업무를 분담했다. 마라톤팀은 적절한 마라톤 코스를 선정해야 했고, 부스팀은 외부 업체, 장애인 단체, 교내 학생들 상대로 부스 신청에 대한 홍보 및 선정 절차를 밟아나갔다. 공연팀은 공연 동아리를 섭외하고 관리하는 업무를 맡았다. 나를 포함한 9명이란 적은 인력에도 우여곡절을 겪으며 하나씩 만들어갔다. 서류 검토 과정에서 놓친 부분이 훗날 큰 파문을 몰고 와 수습하는데 큰 어려움을 겪는 등의 돌발 상황이 여럿 펼쳐지기도 했다. 거의 두 달 동안 하루 4~5시간씩 잤던 것 같다. 아침에 눈을 뜨면 카톡 방에 쌓여 있는 긴급 메시지에 가슴을 졸이는 일상이 지속했다. 육체와 심리 모두 지쳐서 포기하고 싶었다. 준비 기간 말미엔 스트레스가 폭발하여 총괄팀장이었던 친구에게 욕을 하기도 했다. 나중에 사과했지만 여전히 미안하다. 그렇게 폭풍 같은 3개월이 지나갔다.
그 와중에 팀원들이 잘 따라줘서 버틸 수 있었다. 부족함이 많은 팀장이었지만 팀원들은 군말 없이 믿어줬다. 나도 팀원들 전부 신경 쓰려고 노력했고, 그들은 나의 노고를 알아줬다. 따뜻하고 세심한 내 리더십이 인정받는 순간이었다. 이는 지금껏 확인하지 못했던 리더의 역량이 처음 세상에 드러나고, 나에 대한 가능성을 증명한 중요한 분기점이 됐다. 그동안 나의 능력이 부족했던 것이 아니라, 갖춘 능력을 증명할 기회가 없었던 것뿐이었다. “나는 무언가 모자란 불량품이 아니다”라는 교훈은 사랑의 마라톤 행사의 선물이자 보상이었다.
많은 사람들의 노력으로 ‘제7회 사랑의 마라톤’ 행사는 무사히 마쳤다. 많은 인원이 모였지만 아무런 사고 없이 종료했다는 점이 감사하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