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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금요일 Jun 09. 2023

무단거주한 세입자(2)

이제 좀 나가주실래요?

 초대하지 않은 손님이 내 집에 들어와 나가지 않는다면 이런 기분일까? 아니 이보다는 덜할 것 같다. 둘기가 실외기실을 제 집 안방으로 꿰차고 앉은자리는 정확히 창문과 에어컨 실외기 사이의 공간이었다. 방충망이 없는 창이라는 것도 그때 알게 되었다. 처음 비둘기를 발견했을 때는 늦은 밤인 데다 너무 놀라 경황이 없어 일단 실외기실 문을 닫고 나왔다. 마치 여행 셋째 날 즈음 룸청소를 위해 외출 전 듬성듬성 얹힌 옷가지를 캐리어에 구겨 넣고 대충 닫듯이. 12시 넘어까지 구우구우 드릉드릉 소리를 들으며 괴로워했다. 때는 2020년 코로나 시절이었다. 3세, 4세 아이 둘과 함께 구축 좁은 집에서 하루종일 부대끼며 지냈던 터라 아이들이 잠든 육퇴 후 시간이 너무나 꿀같았다. 고요한 밤을 혼자 조용히 보내는 게 유일한 낙이었는데 내가 앉은 소파 옆 베란다 창문 너머 비둘기가 드릉드릉하며 나의 밤을 공유하고 있다니, 꿈만 같았다(나이트메어). 남편은 일단 출근해야 하니 방법을 생각해 보자며 용감한 겁쟁이 타이틀을 잠시 내려놓았다.

  

 그다음 날부터 나는 남편의 퇴근만을 기다렸다. 우리는 실외기실을 매일 체크했다. 남편도 처음 며칠실외기실 문을 열기 마음의 준비를 하고 열었는데, 나중에는 "어, 있구나."라며 생사를 확인했다. 낮에는 옆 동 옥상에 비둘기 친구들이 찾아와 우우- 구구구- 드릉드릉 떼창을 하기도 했다. 비둘기는 걸어 다니는 줄만 알았는데 15층 옥상까지 날아오다니. 우리 회사 주변에 비둘기가 좀 많았는데 가끔 차에 밟혀 터진 비둘기 잔해를 보곤 했다. 몸이 무거워 날지 못하거나 반사신경이 없거나 아니면 뭘 주워 먹는데 너무 집중했거나 설마 저 차가 나를 치고 가겠냐는 인간에의 맹목적 믿음이 있었거나 사인은 여러 가지로 추정되는데 어쨌든 걸어 다니기만 하는 비둘기였기 때문이다. 15층까지 날 수 있는 녀석들이라면 둘 중 하나다. 보통 녀석이거나 보통녀석이 아니거나.


 코로나블루에 비둘기를 (절대로) 반려동물로 받아들일 수 없는 아내의 닦달에 용감한 겁쟁이 남편은 있는 모든 방법을 해보기로 했다. 일단 119에 전화했다.

"아 비둘기요? 비둘기사건은 접수하지 않습니다. 벌은 처리 해드려요."

'비둘기사건'이라는 단어로 간단한 거절을 듣고 보니 이런 사례가 우리 집만의 일이 아님을 알게 되었다. 남편은 검색해 보더니 우리 집처럼 베란다에 비둘기가 들어와 앉거나 알을 낳은 집이 있다고 했다. <세상에 이런 일이>에 나올법한 일은 아니라는 사실에 조금 안도했다. 그리고 곧이어 막막해졌다. 119 아저씨들이 야속해졌다. 도대체 이 비둘기를 어떻게 내쫓는담? 평화주의자 남편이 가장 먼저 한 일은 비둘기에게 나가달라고 요청한 일이다.

"얘들아 나가줄래? 제발!"

단전밑에서 울화가 치솟았지만 내가 할 수 없는 일이기에 참았다. 다음날 남편은 한참 생각하더니 아이들 물총을 가져와 물을 쐈다. 비둘기는 물을 맞으면서도 꼼짝 않고 그 무서운 눈으로 표정 없이 남편을 바라봤다고 한다.(비둘기에게 무슨 표정이 있겠냐만은.) 그렇게 몇 날며칠 물총을 쐈다. 용감한 겁쟁이 타이틀이 무색해졌는지 어느 날 부직포 청소기 봉으로 실외기실 바닥을 툭툭 치기도 하고, 실외기실 문을 열었다 닫았다 하며 바람을 일으켜 위협하기도 했다. 그런데 비둘기가 한 마리가 아니었다. 두 마리였다! 남편이 퇴근하고 늘 저녁에 봐서 자세히 못 봤는지 아니면 한 마리가 추가로 들어온 건지 모르겠다. 혼자 가는 길보다 함께 가면 더 멀리 갈 수 있다고 했던가? 비둘기 두 마리는 남편의 공격에도 꼼짝 않고 박제된 것 같은 눈으로 미동 없이 남편을 바라봤다. 나는 정말 울고 싶었다. 겁쟁이 남편만 믿다가는 비둘기랑 집에서 나갈 때까지 같이 살게 생겼다. 내 이런 마음을 눈치챘는지 남편은 손으로 잡아 날리겠다고 호기롭게 고무장갑을 끼고 왔다. 멋지게 실외기실 문을 열고 다가가려는데 토끼눈을 하고 놀란 남편은 문을 닫고 황급히 거실로 나왔다.

"사방이 비둘기 똥천지야!"








 거의 3주가 지났을 무렵이었다. 아이들도 매일의 루틴처럼 비둘기의 안부를 물었다.

"엄마 비둘기 왜 우리 집에 있어?"

"엄마 비둘기 아직 있어?"

"엄마 비둘기 왜 온 거야?"

"엄마 비둘기 무서워?"


하루는 엄마랑 전화통화하다 비둘기 이야기를 했다. 엄마는 뭘 그런 걸 못 잡고 그렇게 지내냐며 당장 가서 잡아주겠다고 했다. 서역으로 엄마를 마중 나가는 날만 손꼽아 기다렸다. 학예회 때보다 더 엄마를 기다렸던 것 같다. 마는 집에 오자마자 곧바로 고무장갑을 다. 나는 약간 멀찌감치 떨어져 양팔에 애기들을 껴안고 이 역사적인 장면을 관전하고 있었다. 엄마가 실외기실 문을 열었다. 한참을 보더니 하는 말.

"없는데?"

남편이 뒤이어 확인해 보니 비둘기는 온데간데없었다. 남은 건 비둘기똥뿐.

 







 

 엄마가 다녀가시고 어쨌든, 어느 정도 마음의 정리가 되었고 남편과 나는 여러 가지를 유추해 봤다. 똥이 이렇게 많은 걸 보면 얘네들은 그동안 뭔가를 먹고 지냈다. 뭔가 먹기 위해서 창 밖으로 들락날락했거나 친구들이 먹을 것을 가져다주었을 텐데 전자였을 것 같다. 그렇다면 처음에 남편이 본 대로 한 마리가 들어왔는데 나중에 한 마리가 더 들어와 두 마리가 지냈을 것이다. 얘네는 사람들이 사는 모습을 지켜보다가 자기들이 비둘기임을 잠시 잊고 지붕이 있는 집을 구하려던 차에 창이 활짝 열린 우리 집이 마음에 들어 들어와 앉았다. 남편의 물총공격은 물마사지 샤워였고, 청소기 봉 공격은 무료하던 저녁시간을 채워주는 라이브 코미디쇼였다. 비둘기월드에 파다하게 퍼져있는 119 무용론을 이미 알고 이 한심한 겁쟁이 부부네 집에 안심하고 지내고 있던 중, 웬 할머니가 자기들을 잡으러 오겠다는 소식을 듣는다. 겁쟁이부부가 환호하는 걸 보니 보통이 아님을 직감하고 할머니가 오는 날 홀연히 떠난 것이다.


 돌이켜보면 혹시 비둘기가 알을 낳으려고 우리 집에 자리를 잡은 건 아닐까 하는 생각이 든다. 남편 비둘기는 겁쟁이 인간의 물총공격을 맞아가며 임신한 아내비둘기를 지켜주고, 먹을 것을 가져다주고 함께 있어준 건 아니었을까. '비둘기처럼 다정한 사람들이라면'이라는 <비둘기집> 노래 가사도 있지 않은가? 잠시 우리 집에 머물렀던 다정한 비둘기 부부가 무사히 알을 낳고 잘 살기를 바란다. 을 낳지 않고 떠나 줘서 고맙다. 그리고 비록 비둘기 퇴치에 성공한 일은 없지만 기꺼이 용감한 겁쟁이를 해준 다정한 나의 남편도 고맙다. 우리 집은 비둘기 없는 다정한 비둘기집이다.






에필로그.

남편은 비둘기똥을 1박 2일 동안 치웠고, 창에 방충망을 달았다. 구축아파트에 집을 구할 때는 결로나 곰팡이만 볼게 아니라 베란다 창문까지 확인해야 한다.


Mo Willems, Don't Let the Pigeon Drive the Bus!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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