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에이나르(Einar :하나의 군대와 같은 자, One man army)'는 말에 타지 않고, 고삐를 쥔 채 길을 따라 걸었다. 그는 종종 걸음을 멈추고 긴 한숨을 내쉬었다. 계절은 봄이었지만, 추위가 망토를 파고 드는 것만 같은 기분이 들었다. 그것은 계절이 아닌 그의 마음에서 부는 바람 때문이었다. 지난해 젊은 콜베인(이하 콜베인)은 병으로 죽었다. 아스비르닝 가문은 새로운 지도자를 맞이했다. 그는 콜베인의 사촌인, '브란두르 콜베인(Brandur Kolbeinsson)'이었다. 숱한 노력과 염문에도 불구하고 콜베인은 자식이 없었다. 콜베인은 자신이 삼촌에게 물려받은 것처럼, 브란두르에게 '고다르(goðar : 족장)'의 자리를 물려주고 사망했다.
운명은 아무래도 얄궂은 짓을 좋아하는 것 같다. 밖에서는 굳건해 보이던 아스비르닝 가문의 권력은 그 내부에서 부터 흔들렸다.예전 스노리의 스트를룽 가문이 그랬듯이. 섬의 다른 가문이 그렇듯, 아스비르닝 가문 내에도 몇 개의 파벌이 존재했다.이들은 가문의 주도권을 잡고자 늘 혈안이 되어있었다. 지금은 콜베인의 심복이었던 자들 중 일부가 새로운 지도자를 앞세워 주도권을 잡았다. 그들은 사람의 벽을 만들어 새로운 지도자를 추켜세우고, 보다 많은 이권을 자신들의 수중에 감싸쥐었다. 당연히 다른 파벌의 반발은 불보듯 뻔한 것이다. 당장은 드러내지 않고 있지만, 그들은 언제든 뒤에서 칼을 꼽을 준비가 되어 있는 자들이다. 전에도 갈등은 있었지만, 이 정도는 아니었다. 거칠고 불같은 성격의 콜베인은 힘으로 가문내의 갈등마저 수면 아래로 눌러버렸다. 그러나 새로운 고다르에게는 그조차기대하기 힘들었다. 브란두르는 콜베인에 비하면 많이 부드러운 편인데다, 지금은 자신을 둘러싼 이들에게 푹 빠져 정신을 차리지 못했다.
어느 덧 마을 어귀에 들어서던 에이나르는 발걸음을 멈추었다. 그는 마을로 들어서는 대신 옆에 보이는 바위에 걸터 앉았다. 그는 다시 긴 한 숨을 내쉬었다. 오늘도 에이나르는 새로운 지도자를 찬양하는 회합에 불려나갔다 돌아오는 길이었다. 오늘도 그는 더 많은 세금과 병사를 강요받았다. 새로운 지도자와 그의 충신들은 새로운 전쟁을 계획하는 것 같았다. 지도자는 바뀌었지만, 아스비르닝 가문은 여전히 강하다는 걸 보여줄 필요가 있던 그들로서는 당연한 일인지도 모를일이다. 하지만 세금과 병사가 말만 하면 뚝딱 하늘에서 떨어지는 것이 아니다. 윗대가리들이야 여러가지 이권을 얻었는지는 모른다. 그러나 에이나르 같은 중간 위치에 있는 전사들은 그렇지 못했다. 그동안 수많은 싸움으로 인해 창고는 비어가고, 마을의 장정들의 수도 줄었다. 그런데도 다시 세금과 병사를 내놓으라니.
사진 출처 : https://www.history.com/shows/vikings/pictures
에이나르는 한 숨을 내쉬며 주변을 둘러보았다. 그때 저 멀리 누군가가 걸어오는 것이 보였다. 에이나르가 가만히 응그려보니 차림으로 보아 떠돌이 스칼드인 것 같았다. 이 시절 스칼드는 새로운 소식과 유희를 제공하는 이들이었고, 많은 이들에게 사랑받는 존재였다. 에이나르는 세상 이야기라도 들으면서 기분이라도 바꿔보자 싶었다. 스칼드가 자신의 근처까지 오자, 에이나르는 말안장에서 물통을 꺼내 들고는 그를 불렀다.
에이나르 : 어이, 스칼드 양반! 여기와서 목이나 축이고 가시게. 옆에서 재미난 이야기를 해주면 더 좋고.
스칼드 : 아이고, 감사합니다~ 그렇지 않아도 목이 말랐는데. 옛 신들과 하나님의 축복이 당신에게 깃들기를.
스칼드는 밝게 웃으며 달려왔다. 그는 감사하다는 듯 인사를 건네고 에이나르의 곁에 앉아 물을 마셨다. 물을 다 마시기를 기다려 에이나르가 물었다.
에이나르 : 그래, 당신은 어디서 오는 길이오?
스칼드 : 저같은 떠돌이들이야, 바람따라 오가는 거죠. 스트란드(Strand)와 서쪽 피오르드(West fjord)를 지나왔습니다. 그곳 고다르의 연회에서 노래를 불렀습니다. 이곳에 오기 전에는 '켈두르(Keldur)'에도 들려 그곳의 안주인을 위해 노래를 불렀답니다. 지금은 중부 산지로 가는 길이죠.
스칼드의 말을 들은 에이나르는 흠칫 놀랐다. 자신도 모르게 손이 허리에 찬 검을 향해 움찔거렸으나, 곧 그것을 깨닫고 손을 멈추었다. 그도 그럴것이 스트란드와 서쪽 피오르드는 '토르두르'의 본거지가 있는 곳이기 때문이다. 켈두르는 '할프단 새문드손(Halfdan Sæmundsson)'의 영지였는데, 그는 어떤 유력한 가문과도 불화를 일으키지 않아 '평화로운 자'라는 소리를 들었다. 그의 아내는 '스테인보르 시그바도티르(Steinvor Sighvatsdottir)'로 여성 스칼드이자, 토르두르의 여동생이었다. 에이나르의 추측이 맞다면 이 자는 스칼드가 아닌 토르두르의 밀정일 것이다. 에이나르는 애써 놀란 마음을 진정시키려고 했지만, 그것이 쉽지 않았다. 멈춘 손이 떨렸던 것이다. 에이나르의 마음을 아는지 모르는지, 스칼드는 태연하게 물을 들이켰다. 그가 에이나르에게 물통을 건네며 말했다.
스칼드 : 서쪽의 고다르는 놀라운 사람이더군요. 그가 연회 내내 강조하길, '난 내 혈육을 향해 칼을 들지 않는다. 이는 나의 부하들도 마찬가지여야 한다!'고 말이죠. 요즘 같은 세상에 드문 이야기였습니다.
아, 오늘 길에 만난 켈두르의 안주인께서도 이 말을 들으시고는, '혈육 간에 칼을 맞대는 일은 없는 세상이 왔으면'이라고 말씀하시기도 하셨답니다. 저도 어서 그런 날이 오면 좋겠군요.
스칼드는 에이나르를 향해 빙긋 웃어보였다. 그는 자리에서 일어나 엉덩이를 털고는 다시 길을 따라 걸어갔다. 에이나르는 그저 멍하게 멀어져가는 그의 뒷모습을 한참이나 바라보았다. 그는 갈림길까지 가더니 자연스럽게 왼쪽 길로 향했다. 그쪽은 중부로 가는 길이었다. 그곳에는 자신과 같은 중간에 위치한 전사들이 많은 지역이다. 에이나르는 물통을 안장에 걸기 위해 몸을 일으켰다. 에이나르는 손이 떨려 몇 번이나 헛손질을 한 뒤에야 안장 고리에 물통을 걸수 있었다. 에이나르는 가만히 아랫입술을 깨물며 천천히 마음을 진정시켰다.
에이나르 : 나의 혈육을..
에이나르는 스칼드의 말을 가만히 곱씹었다. 그의 아내, '잉게뵤르그(Ingebjorg : 신 잉그-ing-의 보살핌)'는 토르두르와는 사촌지간이었다. 섬은 큰 섬이었지만, 동시에 작은 섬이기도 했다. 몇 집만 건너면 혈연으로 엮여있기 때문이다. 서부와 가까운 이곳(남서부)과 중부산악지역에는 그런 자들이 더욱 많았다. 한동안 안장을 잡고 서있던 에이나르는 잠시 뒤, 말에 올랐다. 그는 천천히 마을로 향했다. 여전히 그는 스칼드의 말을 곱씹고 있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