대지의 아랫쪽, 검고 차가운 바위 동굴. 그 깊숙한 곳에서는 로키가 바위에 묶인채 형벌을 받고 있다. 그의 머리는 산발이었고, 그의 수염은 아무렇게나 자라있었다. 옷은 찢어져 넝마나 다름 없었으며, 그의 몸은 수척함 그 자체였다. 오랜시간 로키는 괴로움과 슬픔, 고통으로 신음했다. 매일 매일이 처절한 분노와 복수의 눈물로 보내는 날들의 연속이었다. 드디어 복수의 그날이 찾아왔다. 라그나로크가 왔음을 알리는 수탉의 울음소리가 온 동굴을 울렸다. 로키의 몸이 떨렸다. 그것은 고통의 떨림이 아닌 흥분과 기쁨의 떨림이었다. 그와달리 그의 표정은 차분했다. 그저 충혈된 눈이 차갑게 빛났을 뿐.
[.. 큭큭..]
잠시후 로키는 터져나오는 웃음을 간신히 참았다. 그럴수록 그의 몸은 더욱 크게 흔들렸다. 급기야 그는 더는 참지 못하겠다는 듯 고개를 젖히며 크게 웃었다.
[크하하하!!]
그동안 겪은 모든 고통과 괴로움과 끓어오르는 분노가 한꺼번에 몰려왔다. 또한 해방감과 기쁨도 동시에 밀려왔다. 마지막 니블헤임의 검은 수탉의 울음소리가 들렸다. 그러자 로키를 묶고 있던 포박이 헐겁게 흘러내렸다. 천천히 몸을 일으킨 로키는 자신을 묶고있던 아들의 창자를 들고 한참을 웃었다. 그가 광기서린 웃음을 웃는 동안 그의 눈에서는 피눈물이 흘러내렸다. 그의 웃음은 점차 울부짖음으로 변했다. 수많은 상념과 희노애락이 로키를 감싸며 폭풍처럼 그의 모든 것을 강타했다. 로키는 자신의 머리 위로 손을 뻗었다. 그곳에 매달려 있던 뱀을 붙잡아 끌어내린 뒤, 뱀의 몸뚱이에서 머리를 비틀어 뜯어버렸다. 로키는 바위에서 일어섰다. 오랫동안 묶여있던 탓인지 몸이 비틀거렸다. 로키는 바위를 붙잡으며 두 다리에 억지로 힘을 집어넣었다. 그렇게 넘어지려는 것을 버텨낸 그는 천천히 동굴의 입구를 향해 흔들거리는 발걸음을 옮겼다.
- 창자에 묶인 로키, 루이스 허드 그림(1891. 출처:https://en.wikipedia.org/wiki/Loki)
동굴 깊은 곳, 난데없는 수탉의 울음소리를 들은 시긴은 깜짝 놀라 들고 있던 그릇을 놓쳤다. 그릇에 담겨있던 독액이 동굴바닥에 뿌려졌다. 동굴바닥은 이내 오염되어 그 빛이 사라지며 생명력을 잃어버렸다. 이 주변의 동굴바닥은 이미 대부분이 그 빛을 잃어버렸다. 그동안 시긴이 이곳에 독액을 버린 탓이었다. 처음에는 로키가 묶여있는 근처에 버렸지만, 그 주변이 오염되는 것을 본 시긴은 점차 로키에게서 먼 곳으로 가서 그릇에 가득찬 독액을 버렸다. 그동안 남편이 괴로움을 겪을 것을 알지만, 자칫 주변에 버렸다가는 둘 다 위험하다고 생각했기 때문이었다.
[갑자기 왜 수탉이 우는걸까?]
시긴은 힘겹게 몸을 굽혀 떨어진 그릇을 집어들었다. 그릇을 드는 그녀의 손은 독액으로 오염되었고 거칠었다. 그녀의 머리카락은 하얗게 센지 오래였고, 그녀의 얼굴에도 주름이 깊이 내려앉았다. 그녀가 몸에 걸친 옷도 색이 바래지고, 낡아 넝마나 다름없었다. 깊은 아픔과 긴 옥바라지는 그녀에게서 모든 것을 앗아갔고, 그녀는 이제 곧 바스라질 것 같은 모습이었다. 그릇을 집어든 시긴은 천천히 발걸음을 돌렸다. 그렇게 힘겹게 동굴 벽을 잡고 올라가는데, 남편 로키의 웃음소리가 들렸다. 시긴은 깜짝 놀랐다. 남편이 웃을 일이 없는데, 이게 대체 무슨 일인 것인지 그녀로서는 도무지 알수 없었다. 시긴은 걸음을 재촉해 남편에게로 향했다.
그러나 그곳에 로키는 없었다. 로키가 누워있던 바위 위에는 독액을 내뿜던 뱀이 두동강이 난채 널부러져 있었다. 로키를 묶고 있던 아들의 창자는 아무렇게나 흩어져 있었는데, 로키의 모습만 보이지 않았다. 시긴은 그릇을 내던진 채, 황급히 동굴의 입구를 향해 걸어갔다. 몇번이나 넘어졌지만, 그녀는 동굴 벽을 잡고 몸을 일으켜 다시 걸었다. 그녀가 마주한 동굴 밖은 동굴 밖은 온통 하얀 눈세상이었다. 이미 세상은 빛을 잃었지만, 그래도 눈은 아직 그 빛을 기억하고 있었던 지라, 갑자기 동굴밖으로 나온 시긴은 잠시 눈이 부셔 앞을 볼수 없었다. 시간이 지나 앞이 보이기 시작하자, 그녀는 눈을 응그리며 주변을 살폈다. 저 멀리 무언가 움직이는 것이 있었다. 로키였다. 그는 헐벗은 몸으로 이 눈세상 위를 걷고 있었다. 시긴이 없는 기운을 짜내어 로키를 향해 소리쳤다.
[여보! 어디가요!]
그러나 로키는 걸음을 멈추지 않았다. 시긴은 다시 소리쳤다.
[여보! 나..!]
이번에도 시긴의 목소리는 로키에게 닿지 않는 것 같았다. 분명 자신이 곁에 있음을 모르지 않을텐데. 시긴은 또 다시 로키를 부르려다 그만 주저앉아버렸다.
[여보! 나...]
동굴 바닥을 부여잡은 시긴의 손이 떨렸다.
[나.. 여기 있다구. 당신 곁에.. 지금까지..]
그녀는 알았다. 로키는 돌아오지 않는다. 그에게 자신은 더이상 아무 의미도 없다는 것을 깨달았다. 한참 뒤에야 그녀는 천천히 몸을 일으켰다. 그녀는 로키가 묶여있던 바위로 되돌아왔다. 그녀는 바위와 바닥에 흩어져있는 아들의 창자를 수습하기 시작했다. 시긴은 그것을 주워들어 손으로 창자에 묻은 흙과 이물질을 털어내었다. 수습을 마친 시긴은 바위에 기대어 앉아, 아들의 몸을 자신의 품에 끌어안았다. 시긴의 시간은 그렇게 저물었다.
한편, 로키는 눈으로 가득한 들판을 걸었다. 그가 이 눈세상을 걸어가는 동안 그의 귀에는 아무것도 들리지 않았다. 로키는 걸음마다 이를 갈았다.
[이 수모는.. 백배, 천배.. 아니 만배로 갚아주마. 거인들이여, 나 로키를 영접하라! 불꽃이여, 나 로키를 영접하라! 미련한 신들이여, 나 로키를 영접하라! 내 너희에게 멸망을 내려줄테니!!]
로키의 발걸음은 마치 목적지가 정해진 듯 일정했다. 바위에 묶여있는 동안 로키는 오랜시간 극한의 고통을 겪었다. 그것은 그의 몸과 마음을 갉아먹었다. 동시에 로키는 그런 가운데에서 무언가를 깨닫는 것 같은 느낌을 얻었다. 그것은 고통이 심해지고, 길어질수록 선명해졌는데, 바로 운명이 그에게 부여한 것이었다. 이제 로키는 멈추지 않을 것이다. 그 어느 것도 로키를 멈추지 못한다. 이것이 운명이 그에게 부여한 역할이므로.