가벼운 시작
1. 언니 편
아빠 생신모임. 밥을 먹고 예쁜 곳을 찾아 자리를 옮겼다. 티맵인기에서 고르면 실패는 없다. 나무들이 가득 보이는 통창에 피아노 연주까지 들을 수 있는 3층 건물의 감각적인 카페였다. 앉아계시는 엄마아빠 옆에서 나는 이리 섰다 저리 섰다 하며 화보샷을 찍어드리는데 문득 지금이 제일 젊을 때인 엄마 아빠가 아깝다는 생각이 들었다. 글 쓰는 걸 좋아하셨던 아빠께 ”아빠 신춘문예 도전해 보는 건 어때요? 50대 이상 시니어 부문도 있던데 “라고 말했다. 단순히 던진 한마디에 동생이 덧붙였다.
”나 예전부터 해보고 싶은 거 있었는데! 아빠와 딸이 같은 주제로 글 써보는 거“
이 주제는 커지고 커져 우리는 아주 재미난 작당프로젝트를 시작하게 되었다.
"우리 그럼.. 첫 번째 주제는 뭐로 할까? 동생아, 너가 가장 기억하는 어린 시점은 언제야? 동아아파트 어때?"
동아아파트는 내가 초등학교 입학할 무렵 처음 살게 된 아파트였다.
"동아아파트? 기억 안 나는데.. "
동생이 대답했다. 기억이 안 난다고?? 그렇게 감동이었던 동아아파트가?
이 부분부터 놀라움의 시작이다. "기억이 안 날 수 있지 막내는." 아빠가 덧붙이는 말.
그렇게 언제는 이랬고 이때는 그랬고 한참 동안의 수다가 이어졌고, 우리의 첫 주제가 결정되었다.
중간중간 '그건 아니지, 그때는 다 그랬어' 쿵짝을 넣어주는 엄마의 말들까지. 이렇게 신나서 네 명이 이야기해 본 게 상당히 오랜만이구나.. 난 이날을 귀여운 하루로 기억하고 싶다.
2. 동생 편
작은 집으로 이사를 가야 할 때가 있었다. 그때 버려야 할 짐들 중 큰 부분을 차지했던 것 중 하나가 아빠 서재에 있던 두꺼운 책들과 아빠의 일기장이었다. 책은 뭐 다시 사도 되지만 아빠의 인생과 감정이 빼곡히 적혀있는 네이비색 노트들은 너무나 아까웠다. 비밀 같고 보물 같아서 몰래 아껴 보느라 많이 읽어보지도 못했었다. 다른 건 버려도 이건 안 된다고 떼쓰던 기억도 난다. 어려서 일기장에 적힌 아빠 마음이 잘 이해되진 않았지만 '치열했다', '세상 일이 쉽지 않다'와 같은 워딩들이 아직도 내 마음속에 사진처럼 남아있다. 단골손님처럼 등장하던 나와 언니의 이름을 찾는 일도 재미있었다.
그 수많은 네이비색 노트들이 떠나가는 걸 보며 난 아빠가 다시 글을 써야 한다고, 아빠의 글은 꼭 책으로 나와야 한다고 내가 꼭 그렇게 해드릴 거라 막연한 다짐을 했었다. 어린애의 다짐이 그렇듯, 굳은 다짐은 세월에 묻혔고 성인이 되고도 한참이 지나 몇 년 전 다시 눈을 떴다. 난 아빠와 만날 때마다 같이 글을 쓰고 싶다고, 같이 유튜브 하고 싶다고, 같은 주제로 아빠랑 딸이 나누는 대화 어떠냐고 제안을 했다. 바보처럼 추진하지는 못한 채.
그러다 얼마 전 아빠 생신 날 정말 오랜만에 가족들이 모여 추억 얘기를 했고, 내 얘기를 들은 언니는 재밌겠다며 거침없는 추진력을 보였다. 바로 주제부터 정하고는 "다음 주까지 쓰는 거다" 스타트를 끊어버렸다. 대단한 사람이다.
아무튼 그래서 이 글을 쓰고 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