지혜의 바탕을 생각함
1960년대 대한민국은 밥 먹고 살아가는 것조차 버거운 시대였다. 기름이나 가스보일러 난방은커녕 연탄 때는 아궁이가 대부분이었고 도시를 조금 벗어나면 나무를 땔감으로 아궁이에 넣고 밥을 짓고 난방을 하던 시기였다. 먹고살기도 힘든 때 책을 사서 아이가 읽도록 독서 환경을 조성해 주는 가정이 얼마나 있었을까?
당연히 집에는 학교 교과서 외 따로 책은 없었다. 어릴 적 기억으로는 서점조차 별로 없었고 조그만 가게에 두꺼운 초등용 전과나 수련장(문제집) 헌 것 정도만 팔고 있었던 듯하다. 그런데도 초등학교 어린 나이에 책에 대한 집착이 강했나 보다. 도서실에서 동화책을 이틀이 멀다 하고 빌려서 읽고 반납하기를 반복해서 그곳에 있던 책을 거의 다 읽었을 정도였다. 중학교 때도 책을 엄청 빌려다 읽었다. 위인전, 소설 등 분야에 관계없이 폭식하듯 읽어 나갔다.
책을 좋아했다기보다 딱히 다른 취미를 가질 게 없어서였을 것이다. 딱지치기 게임도 잘 못했고 남들 좋아하는 만화에도 별 흥미를 느끼지 못했었다. 그러던 중 우연히 청계천 5가에 간 일이 있었는데 눈을 크게 뜰 만한 놀라운 곳을 발견하였다. 청계천 서점가였다, 지금은 청계천 물이 흐르는 곳이지만 당시는 위로 고가도로가 있어서 차들이 다니고 고가 밑 도로 옆으로 나란히 100여 개도 넘는 헌책가게들이 줄지어 있었다. 가게마다 천정까지 서가에 책을 진열하고 각종 서적을 싸게 팔고 있었다. 책 묶음이 바닥에 많았던 것을 보면 아마 헌책을 팔러 오면 사주고 또 분류해서 다시 파는 것 같았다. 책 뒤 정가표와 비교하면 30퍼센트 이하 가격도 많았다. 그로부터 틈만 나면 헌책방 여기저기를 습관처럼 찾았다. 읽고 싶은 책이 있으면 가격을 물어보고 적당하면 냉큼 샀다. 한 권 한 권 책꽂이를 채운 것은 그렇게 구입한 것이 대부분이었다. 비싼 대학교재도 잘 찾으면 영인본으로 살 수도 있었다. 어느 날은 한 가게에서 논어 맹자 중용 대학 4권이 묶인 채 있어서 가격을 물어보고 바로 사 온 기억이 있다. 한자 원문이 있고 그것을 단락마다 풀이한 내용인데 두꺼운 표지로 되어있었다. 나중에 시경 상서 역경까지 구입해서 열심히 한자 공부도 하며 사서삼경을 읽어 내려갔던 기억이 있다.
청춘시절, 잘 가는 서점이 종로 서적으로 바뀌었다. 당시 만남의 약속장소로도 애용되었던 전철역 바로 옆 종로 서적은 4층으로 되어 있었고 많은 책이 분야 별로 전시되어 있었다. 청계천 헌책방과 달리 아무리 오래 머물러 책을 꺼내 읽어도 눈치를 주지 않아서 정말 좋았었다. 보통 두세 시간 책을 읽고 가끔 한 권씩 책을 사 왔다. 그것도 문고판으로 나온 값이 저렴한 책들이었다. 문고판 책이란 세계명작, 국내소설 등을 저렴한 가격으로 쉽게 넣고 다닐 수 있게 포켓크키로 간행된 책이었다. 종로 서적 한편에는 별도로 둥글게 회전하는 판매대에 문고판만 따로 진열되어 있었고 고객들은 회전하는 판매대를 돌려가며 책을 고를 수 있었다. 삼중당 문고 범우사 문고 을유문고 등 출판사에서 많이 간행되었는 더 당시 한 권 가격이 200원 300원 정도였으니 부담 없는 가격이었다. 그때 눈이 번쩍 뜨이는 문고판 책이 발간되었다. 놀라게 만든 건 책 내용이 아니라 가격이었다. 처음 본 가격이 당시 기억으로 70원이었다. 다른 문고본도 싼 편인데 그것의 반도 안 되는 가격에 나오기 시작했다. 더구나 책 내용도 지적갈증을 충분히 채울 전문 분야들이었다. 발간 순서대로 번호가 붙여 나왔는데 노란색표지의 책을 발간되는 대로 모두 샀다. 나중에는 100호를 넘겼다. 제1호 독일 국민에게 고함을 시작으로 성호잡저, 인간회복서장, 조선상식문답, 사기열전, 톨스토이평전, 토인비, 향가의 이해, 조선불교 유신론, 퀴리가 의 사람들, 현대예술의 상황, 로마클럽 미래보고서 등등 각 분야의 정말 연구논문 수준의 저서들이 연이어 출간되었고 또 열심히 읽었다. 당시 책들은 모두 한자가 혼용되어 있어서 한자 독해에도 도움이 되었다. 이 귀한 문고는 그저 싼 가격과 엄청난 분야별 전문내용에 당시 열심히 구입해서 읽었지만 이에 대한 숨은 이야기를 나중에야 알게 되었다. 이 노란 표지의 문고를 출판한 곳은 삼성문화재단이었다. 고 호암 이병철 회장이 살아계실 때였는데 독서에 엄청 열정이셨다는 고인은 아마 낮은 가격에 좋은 책을 발간하여 국민독서 생활에 큰 보탬이 되게 하려 문화재단을 통해 책 발간 사업을 하게 하신 것 같다. 고 이병철 회장은 일본 도쿄서적을 자주 들러 책을 많이 구입했다고 하며 직원들에게도 책 읽기를 독려했다고 한다. 책이 간행되기 시작한 1973년은 대한민국 산업발전의 전환을 가져올 반도체사업을 시작한 시기였다. 그 중요한 시기에 전문지식을 널리 알릴 보물 같은 책들을 저렴한 가격에 출간하도록 한 것이었다. 당시에 다른 출판사들의 반발이 매우 심했다고 한다. 재벌이 출판까지 잠식하려 한다는 반발이었고 나중에 전문 분야 위주로 간행하는 걸로 중재되었다고 한다. 그 결과 난 적은 돈으로 정말 좋은 책들을 만날 수 있었다.
그 당시 28번째로 간행된 책이 "후회 없는 생애"란 제목으로 간행된 B. 플랭클린의 자서전이었다.
여러 위인전 중에서도 감명 깊은 책이었다. 플랭클린은 1706년생이다. 대장장이이며 농부였던 아버지가 미국으로 이주하여 플랭클린을 낳았으니 그는 미국 이주 2세였다. 당시 미국은 국가체계도 제대로 갖추어지지 않은 건국초기였다. 이민 온 사람들은 뿌리도 없는 낯선 곳에서 먹고사는 것이 최우선이었다. 비누와 양초를 만드는 집안에서 태어난 플랭클린은 10살 때 학교를 그만두고 형의 인쇄소에서 일을 하기 시작한다. 어린 그는 인쇄일을 하면 출판사 사람들로부터 책을 빌리고 돌려주고 또 빌리는 방식으로 많은 책을 읽었고, 출판되는 글들을 요약하고 요약된 글을 다시 원문글로 풀어써보기를 반복하였는데 이때의 독서와 글 쓰는 힘이 그를 창의적 활동가로 만든듯하다. 17세에 가출하여 필라델피아에 온 그는 인쇄소를 차려 사업을 성공하였고 25살에 펜실베이니아 대학에 도서관을 설립하였다. 과학에도 관심이 많았던 그는 난로 피뢰침 복초점 렌즈 민간형 비행기 등을 발명하기도 했다. 플랭클린 자서전이 감동을 준 것은 이런 업적 때문이 아니다. 그는 자신을 관리하는데 철저했던 내용을 쓰고 있다. 절제 침묵 질서 검소 성실 중용 등 13 개 자기 관리 항목을 정하고 각체크리스트를 만들어 실천여부를 스스로 확인해 갔다. 미국 독립선언문 작성에도 참여한 그는 미국독립의 아버지로 불리며 지금도 통용되는 100달러 지폐의 인물이다.
자신에게 주어진 척박한 환경에서, 그리고 뿌리 없는 곳에서 삶의 터전을 일구는 힘은 어디서 왔을까?
10살까지 밖에 정규교육을 받지 못한 그가 교육 외교 과학 등 여러 분야에서 두각을 나타내며 300년 이 지난 지금도 추앙받는 인물이 된 힘의 원천은 무엇이었을까?
그것은 끊임없이 책을 가까이하고 글을 쓰고 자신의 삶을 차갑게 관리했던 결과가 아닐까?
디지털 시대 영상물이 눈과 귀를 어지럽히는 현대에 잠시 IT기기를 멀리하고 벤저민 플랭클린 자서전을 읽어 보기를 권한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