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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캐리 May 12. 2023

다이슨 이기는 다이손

아빠! 계주 하기 직전까지 우리 반이 지고 있었단 말이야. 아슬아슬하게~
아빠? 아빠?
내 얘기 듣고 있는 거야? 지금?


분명 식탁에 마주 앉아 신나게 얘기를 나누던 부녀였다.

몇일만에 출장에서 돌아온 아빠를 앞에 두고 둘째는 운동회에서 계주 선수로 뛴 무용담을

들려주고 있던 참이다. 나로서는 벌써 몇 번째 재방인지 모르지만 극적인 역전승의 주인공인 둘째는 여전히 벅차오르는 모양이었다.  그런데 계주 순서를 짜는 그 흥미진진한 스토리가 펼쳐지고 있는 와중에 아빠가 갑자기 시야에서 사라진 거다.


잠시 후, 식탁 밑에서 남편 목소리가 새어 나온다.

"오이야~ 듣고 있지. 그래서 두 번을 뛌다고?"

얼떨결에 허연 벽에다 대고 얘기를 하던 아이가 아예 고개를 식탁밑으로 들이밀며 답을 한다.

"그랬다니까. 뛸 사람이 모자라갖고~ 애들이 자꾸 나 보고 하라 해서"




멀쩡하게 얼굴 보고 대화를 하다 남편이 어느 순간 시야에서 사라지는 일.

아이들에게도, 나에게도, 너무 익숙하다. 우리 집에선 자주 있는 일이기 때문이다.


시야에서 사라진 남편은 주로 식탁 밑, 거실 귀퉁이 아니면 피아노 아래 이런 데서 발견되는데

그렇게 순간이동을 해서는 열심히 손을 움직여 작업을 하고 계신다.

입으로는 여전히 대화를 이어나가면서 그가 하는 일은

두툼한 손을 모로 세워 빗자루질하듯이 머리카락들을 쓸어 모으는 작업이다.


장발의 여자 세 명이 사는 집이다 보니 청소기를 열심히 돌린다고 돌려도

뒤돌아서면 새 건지 헌 건지 모를 터럭들이 생겨나 있는 신기한 일이 펼쳐지곤 했다.

그때마다 그의 손은 본능적으로 움직이기 시작했고

요란한 청소기 소음과는 결이 전혀 다른 '스윽 스윽' 지극히 아날로그적인 소리를 만들어냈다. 182cm 장신에 심지어 거구인 그가 식탁 밑에 몸을 접어 들어가는 모습을 보면 내가 말한다.


"아까 청소기 돌렸어. 나중에 청소기로 한 번에 하자"


불과 몇 시간 전에 청소기를 돌린 내 입장에선 그 '스윽스윽'이 자꾸

'제대로 안 했네'하는 소리로 들려 괜히 한마디 하지만


"보일 때 그때 그때 하면 되는데 뭐"

늘 그렇듯 '나중에'는 '그때 그때'를 이길 수 없다. 다이슨보다 훨씬 정교하고 빗자루보다 섬세하다는 우리 집 다이'손'이 계속 움직인다.

리드미컬하기까지 한 그 동작을 지켜보고 있다 보면 새삼 깨닫게 된다.

인간이 직립하게 되면서 발에서 벗어난 두 손이 해 왔다는 수많은 일 중에

저 독특한 일도 하나 들어가겠구나. 비질.


그러고 보면 뼛속까지 아날로그인인 그의 손은 예전부터 유난히 특이한 쪽으로 바빴다.

같은 과 선배였던 그는 넘들이 컴퓨터로 자료를 붙여 넣기 해 가며 레포트를 쓸 때 손으로 몇 십장씩 일일이 쓰고 그래프마저도 수작업으로 하는 선배였다. 공돌이였지만 컴퓨터와 너무 안 친했기 때문에 대신 손이 바빴던 것이다. 그뿐 아니다. 끄적이는 걸 특히 좋아하는 그는 스마트폰이나 태블릿이 아닌 노트에 여전히 뭔가를 열심히 끄적인다.


그렇게 꿋꿋하게 아날로그를 고수하며 바쁘게 살아온 손이 이제는 여차하면 출동하는 청소기 역할까지 하고 있는 것이다.


그런데 다리를 한쪽으로 모으다 보니 본의 아니게 다소곳해지는 저 폼이 어쩐지 낯설지가 않다.

멀리 떨어져 사셔서 몇 년에 한 번 우리 집에 오시곤 했던 외할머니가 딱 그렇게 계셨다. 일주일쯤 딸네 집에 와 계시면서 늘 맨 손으로 방을 훔치셨다.


갑자기 남편의 곰 같은 뒷모습에 쪽진 머리의 할머니가 오버랩되면서 웃음이 났다.

그때 엄마도 지금의 나처럼 이런 소용없는 말을 외할머니한테 했었다.

"아유. 엄마 그만하고 일루 좀 앉으셔"


그때랑 지금이랑 달라진 게 있다면

혈관이 다 보일만큼 얇았던 할머니 손에서 시커멓고 두툼해 발 같은 남편의 손으로 바뀌었다는 것이다.


결혼해서 처음엔 멀쩡한 청소기 놔두고 쭈그리고 왜 저럴까 생각했었다.

하지만 조금씩 나이 들어가고 있는 우리 집 마루 입장에서 보면

투박하지만 살가운 그의 손길을 어쩐지 더 좋아할 거 같다 싶기도 하다.  

우다다다 하는 다이슨의 거친 터치보다는 말이다.

 


거실 구석에서 빵빵하게 충전된 상태로 기다리는 다이슨은

이제나 저제나 불러줄까 오늘도 여전히 대기를 타고 있다.

충전 따위 필요 없고 갑자기 배터리 전원이 뚝 끊맥 빠질 일도 없는, 

24시간 휴대가능한 다이'손'이 좀처럼 틈을 주지 않기 때문이다.


세 명의 여자들이 잠깐씩만 퍼덕거려도 기다렸다는 듯이 남편의 일거리들이 후드득 떨어져 주는 바람에


우리 집 다이'손'은 오늘도 바쁘다.





                                       


                                 Photo by Pexels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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