아파트 1층에 산다는 건, 뷰는 좀 미약하지만 소리만큼은 푸짐하게 들을 수 있다는 말이기도 하다.
그 소리들이 무엇인고 하면 "OO아파트 수요장터에서 열무 한 박스 만 이천 원하는데 야들야들하니 마침맞어" 같은 고급 생활 정보부터 학업에 지친 청소년들이 방언처럼 쏟아내는 찰진 욕들이 그것이다. 그런가 하면 귀를 정화시켜 주는 찐한 자연의 소리도 있다. 집 앞 나무에 앉아 있던 새가 "나 인제 갈란다" 하고 자리를 뜰 때 '풀썩'하는 소리, 비가 땅에 막 도착했을 때 나는 툭툭 소리. 모두 1층이라 더 생생하게 들을 수 있는 소리다.
그런데
며칠 전 상상도 못 한 소리 하나를 추가하게 됐다.
유난히 한적한 오후, 저녁 준비를 해 볼까 하고 냉동실에서 오징어를 꺼내던 순간이었다.
'뿌스럭 뿌스럭' 어디선가 봉지 소리가 들려왔다. '응? 내가 뭘 들은 거지? 윗집 소리가 이렇게 리얼하게 들린다고?' 이번엔 냉장실 문을 열었다.
'뿌스럭 뿌스럭' 더 크게 들려왔다. 조용히 소리를 따라가고 있는데 이번엔 한술 더 떠 팅팅 접시 위를 부산스럽게 왔다 갔다 하는 소리까지 들린다. 소리의 정체는 정수기 밑 수납장이었다. 뭔가 재빠르지만 벌레라고 하기엔 기분 나쁜 육중함이 느껴지는 그 무엇. '가만있자. 혹시? 설마'
날 때부터 쫄보였던 난 일단 현실부정부터 시작했다. '에이, 아닐 거야. 아니고 말고. 요즘 아파트에? 이따만한 바퀴벌레일 수도 있잖아'
하지만 들으면 들을수록 '쥐'일 수밖에 없는 소리. 이 손바닥만 한 무대는 나에게 너무 비좁다는 듯 열정적인 움직임이었다.
이러어언!! 수납장 문을 열어젖히는 동시에 재빠른 손놀림으로 옴짝달싹 못하게 제압해 버렸다.. 면그랬다면 얼마나 좋았을까마는. 작은 벌레 하나만 나타나도 오두방정을 떠는 나는 숨까지 죽이고 눈치만 살필 뿐이었다. 내 쪽에서 수납장 문을 열기는커녕 혹여나 내 소리에 놀란 그분이 문을 툭 치고 튀어나와 내 품에 안기기라도 하면 안 되니까.
이쯤 되면 누가 주인이고 누가 불청객인지. 그냥 내가 나가주고 싶은 심정이었다. 불청객보다 머리통이 한 50배쯤이나 더 큰 나는 독 안에 든 쥐, 아니 '장 안에 든 쥐'를 놓고 차라리 나가고 싶은 마음이었다. 퇴근하고 있을 남편에게 전화를 걸었다. 안 받는다. 남편 다음으로 생각나는 건 왜 관리사무실인지. 역시 신호음이 가기가 무섭게 바로 받는다.
"저기 혹시, 여기 아파트에 쥐.. 가 나오기도 하나요?"
지은 지 15년도 안 된 아파트라 여기선 아직까지 한 번도 쥐 얘긴 못 들어봤다 한다.(그래 아무렴 그럴 리가)
하지만 덧붙이는 말. "몇 층이시죠? 예전 근무하던 아파트 1층집에선 몇 번 봤는데"
시멘트 바닥이라 딴 데는 올라올 데가 없는데, 온다면 '배수관'을 타고 올라온다고. 혹시 배수관 쪽에 틈이 있는지 잘 보시라는 말씀.
배. 수. 관!! 우리 집 배수관을 떠올리니 다리에 힘이 더 풀려왔다.
처음 이 집에 들어올 때 리모델링을 했는데 그 과정에서 여러모로 각이 안 나와 구조변경을 했었다. 보조 주방이 있던 자리를 본 싱크대로 만들고 원래 수도가 있던 본 싱크대 쪽은 그냥 수납장으로 짜 넣은 것이다. 그러다 보니 바로 그 문제의 수납장 안에는 쓸모 없어진 배수관이 나무 밑동처럼 댕강 잘린 상태로 있었다. 그렇게 뻥 뚫어 놨으니. 배수관 타는 게 특기인 그 분들한텐 그야말로 누워서 관타기였을 것이다. 이건 뭐 죽어라 갉아먹고 말고 할 것도 없고 대놓고 "어서 옵쇼" 한 거다.
전화를 끊고 다시 그 분의 동정을 살폈다. 어쩐지 조용하다. 차라리 요즘 기력도 없고 해서 내가 환청을 들었던 거라면 그러면 좋겠다. 하지만 퇴근한 남편의 손을 빌려 열어본 그 속엔 보란 듯이 여기도 저기도 '나 왔다 간다' 하는 흔적들이 남아 있었다. 아메리카노 비닐이 군데군데 뜯겨 있고 놀란 커피 알갱이들이 흩어져 있었다.
얼떨결에 비자발적 청소가 시작됐다. 그릇 열탕 소독은 물론이고 수납장 안을 닦고 또 닦고. 무엇보다 구멍을 막는 일이 시급했다. 관리사무소에서 알려준 대로 테이프로 칭칭 감아 1차 막기,
2차로 철물점에서 공수해 온 뚜껑으로 최대한 봉쇄했다.
집 나간 정신이 돌아왔을 때쯤 배수관 쥐에 대한 정보를 찾아보기 시작했다. 놀랍게도 나 같은 사람들이 종종 있었다. 쥐는 사람의 4~5배나 될 정도로 심박수가 빠르다 보니 에너지 소모가 유난히 크단다. 때문에 하루 정도 굶게 되면 딴 데로 이사를 간다고 하니 다음 날까지 혹시 재방문 기척이 들릴까 촉각을 곤두세웠다. 다행히 소리는 들리지 않았다.
정리하다 보니 수납장 안엔 참 먹잘 것이 없었다. 달랑 커피들 뿐이었으니 "에이 시커먼 이건 뭐야 퉤!" 빈정이 상해 이사 갔을 지도.
그들 나름대로 먹고살자고 이리 뛰고 저리 뛰고 하는 걸 텐데 본의 아니게 미안하게 됐다. 하지만 씨리얼, 과자들이 잔뜩 차려져 있는 옆칸이었으면 어땠을까. 생각만 해도 뒷골이 땡겨온다.
그 잠깐의 등장으로 난 매일 아침 눈을 떠 수납장 확인부터하는 새로운 모닝 루틴이 생겼으며, 층간 소음이 아니라 뿌스럭 소음에 예민한 1층 주민이 됐다. 짹짹짹 귀엽던 새소리가 찍찍찍 소리로 들리는 신기한 일도 벌어졌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