더러운 손
국민학교 6학년 1학기, 담임선생님이 돌아가셨다. 철길 건널목 사고였다. 해마다 같은 자리에서 나는 사고라고 했다. 1960년 전후세대, 인구폭발로 대한민국의 정치사에서 무시할 수 없는 세력(표)이다. 아이는 많고 교실은 부족해 5학년때까지 오전반 오후반을 나누어 등교했다. 6학년이 되자 오전, 오후반이 없어지고 남녀공학에서 남자반 여자반으로 나누어졌다. 교실문 앞에 선생님들이 매를 들고 서 있었다. 지각하거나 선생님 눈에 난 아이는 맞으면서 교실로 들어갔다. 많이 때리는 선생님이 유능하다고 학부모들에게 인정받았다.
그해 전근오신 우리 반 선생님은 때리지도 않았고 젊고 잘생기셨다. 가족은 우리와 학년이 같은 남자아이와 사모님이 계셨다. 선생님 돌아가신 뒤 사모님이 "내가 여기로 이사 올 때 속바지 고무줄이 뚝 끊어져 기분이 찜찜했는데" 하며 통곡하셨다. 한동안 우리는 6학년 음악책의 '선생님과 손잡고 함께 거닐던 오솔길' 노래를 부르며 울고 다녔다.
새로 오신 담임은 음악선생님이었다. 대머리에 몸이 아주 뚱뚱했다. 목소리까지 느끼했던 선생님은 권력과 차별이 무엇인지 몸소 가르쳤다. 시험점수가 같아도 맞는 아이와 안 맞는 아이가 갈렸다. 밤마다 선생님집에서 대여섯 명이 모여 과외를 했다. 선생님의 손이 바로 앞에 앉은 아이의 치마 밑으로 들어가는 것을 나도 보고 다른 아이들도 보았다. 그 아이는 과외가 끝날 때까지 아무 소리도 내지 못했다.
성희는 6학년 때 한 반이었다. 졸업하고 처음 만난 성희는 초등학교 선생님이 되어있었다.
나 너 덕분에 살아난 적 있어. 6학년 때 선생님이 본관 교무실에 가서 시계가 몇 시인지 보러 오라고 해서 갔다 오니까 애들이 다 가고 아무도 없었어. 순간, 아 오늘 큰일 나겠구나 싶어서 '선생님 박하가 정문에서 기다린다고 했어요 빨리 가야 돼요' 했지. 안색이 변하면서 가라고 하더라. 선생님이 너는 무서워했잖아. 내가 발령 나자마자 그 샘이 어느 학교 있는지 그것부터 살폈거든 세상에, 어느 학교 교장으로 재직하더라. 세월이 흘렀는데도 심장이 떨리더라.
고작 초등아이인 내가 무서웠을 리는 없었을 것이고 무서웠다면 우리 부모가 무섭지 않았을까? 무서웠던 우리 부모님의 권위도 졸업 무렵 아버지 회사가 부도를 맞으면서 사라졌다. 졸업 전 나는 이유 없이 혹독한 매를 맞았다. 지금 생각하니 성희를 어떻게 못한 분풀이가 포함이 되었던 것 같다.
'글로리'를 보고 아직까지 이름도 잊을 수없는 그 선생님이 내내 생각났다. 인품이 훌륭하여 교장직까지 지냈을 리는 절대 없다. 더러운 손만큼 처세가 능란하여 이룬 개인의 업적일 것이다. 스승과 제자라는 관계의 역학에서 폭력을 당한, 내 어린 날의 친구들이 상처를 잊고 부디 잘 살아가길 바란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