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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나나스크 Mar 02. 2023

길을 아십니까?

길 잃어버리는 게 취미인 여자

아무도 가르쳐 주지 않아

이 길이 옳은지 다른 길로 가야 할지

난 저길 저 끝에 다 다르면 멈추겠지

끝이라며

-<길> 김윤아 노래 중


 어디로 가야 할지 몰라 막막한 건 비단 내 미래뿐만이 아니다. 보통 길을 걸을 때, 나는 아는 길보다 모르는 길을 걷는 경우가 더 많다. 길 헤매는 사람들을 우리는 흔히 '길치'라고 부른다. 하지만 나의 경우엔 '방향치'가 맞는 것 같다. 내가 가고 싶은 곳의 주변에 어떤 다른 건물들이 있는지, 가야 하는 길도 정확히 알고 있다. 내가 있는 현재위치에서 그곳으로 가는 길을 모를 뿐.


 내가 방향치라는 걸 알게 된 건 중학교 1학년 때였다. 그때만 해도 새 학기가 되면 환경미화를 해야 해서 학교에 남아 이런저런 청소와 꾸미기를 했다. 환경미화 자체도 보람되고 재미있었지만 공식적으로 학원을 빠지고 집에 늦게 들어가도 괜찮다는 점이 더 마음에 들었다. 그때는 책상마다 니스칠을 새로 해서 교실을 더 깨끗해 보이게 하곤 했다. 책상 청소가 끝나 니스를 사러 학교 밖으로 나갈 일이 있었다. 몸도 찌뿌둥하고 친구가 간다고 해서 같이 가자며 동행하게 되었다. 학교에서 나와 왼쪽 모퉁이에서 꺾어 쭉 걸어가면 공업사가 있었다. 함께 니스를 사서 낑낑대며 들고 다시 학교로 돌아가는 중이었다.


-왜 그쪽으로 가?

=응? 왜? 여기로 가야 학교잖아.

-아니지. 우리 아까 올 때 왼쪽으로 꺾었어.

=그래. 그러니까 여기로 가야지.

-아니지. 돌아올 땐 오른쪽으로 꺾어야 왔던 길로 가는 거지.


한참을 생각해도 머릿속이 어지러웠다. 마치 유치원 시절 선생님의 왼손이 내 방향에선 오른손이라 생각하니 어지러웠던 것처럼. 이 글을 쓰며 이 깨달음도 지금 얻었구나. 나는 아직도 멀었다.


못 미더운 얼굴로 친구말을 따라 오른쪽으로 꺾었더니 정말로 학교가 나왔다. 그러면 안 되는데 거기에 학교가 있었다. 다들 왜 왼쪽으로 가려고 한 거냐며 놀리듯이 물었지만 난 정말 심각하게 이해가 가지 않았다.





 내가 방향치에 길치라는 걸 인지하고 난 후에는 괜히 더 무서워졌다. 친구들과 이야기 나누며 자연스럽게 걷던 길도 혼자서 각을 잡고 걸어가면 처음 보는 길처럼 어지러웠다. 내가 갔던 길을 다시 되돌아오면 다시 새길처럼 되는 것이었다. 마치 써도 써도 새것 같은 지우개처럼, 내가 걷는 길은 걸어도 걸어도 알 수 없는 새길 같았다. 그동안은 내가 걸은 게 아니라 친구들이나 주변 사람들의 꽁무니를 쫓아다녔던 것뿐이었다.


 동네 안을 편히 다니기 위한 마을버스도 타기 힘들어했다. 내려야 하는 정거장을 지나지 않으려고 긴장을 하며 안간힘을 쓰다가 결국 정류장 바로 전에 내려버리는 일들도 왕왕 있었다. 버스를 타면 10분인 거리를 내가 아는 길로 40분을 걸어서 도착하는 일도 수두룩했다. 괜히 버스를 잘못 타서 모르는 곳에 내리는 것보다 아주 익숙한 길들로 돌고 돌아 걷는 게 편하다고 생각했다.


 언제 어디에서 길을 잃을지 모르니 주머니에는 항상 동전을 넣어 다녔다. 언제라도 친구에게 전화해 나를 주우러 와줄 수 있게 주머니를 짤랑이며 열심히 걸어 다녔다. 그 많은 길 위에서의 시간을 다른데 들였으면 뭔가 하나는 해냈을 것 같기도 하고 한편으론 과거의 내가 참 짠하다.





 나는 여전히 길을 헤맨다. 이사 온 지 얼마 되지 않은 지금 동네가 낯설다. 유명한 관광명소도 아닌데 핸드폰을 보며 길을 찾는다. 기술이 참 좋다. 방향을 찾으러 지도를 일일이 들여다보지 않아도 된다. 현재위치 버튼을 한 번 더 누르면 내가 바라보고 있는 방향을 친절하게 알려준다. 화살표방향을 따라 열심히 걷는다. 걷다 보면 아는 길이 나온다. 그때부턴 핸드폰을 주머니에 넣고 자신 있게 앞을 보고 걷는다.


 나이를 먹어서 인지 짬이 생겼다. 예전처럼 길을 잃어도 크게 당황하지 않는다. 준비물도 달라졌다. 주머니에 동전 대신 핸드폰 배터리를 100% 풀 충전한다. 여의치 않으면 주변 사람에게 길을 물으면 된다. 부끄러워 물어보지도 못하고 혼자 거리를 배회하던 중학생소녀는 이제 가끔 철가면을 쓸 줄 아는 아줌마가 되었다. '도를 아십니까?'로 보일 수도 있는 건 내 잘못이 아니다.


 예전에 나의 걷기는 길을 잃지 않으려는 의미의 걷기였다. 하지만 지금은 가끔 길을 잃어버리면 오히려 좋다. 매일 같은 길을 걷는 내게 신선한 재미를 준다. 몰랐던 가게를 발견하고 처음 보는 꽃을 볼 수 있다. 지금 당장 길을 잃어도 걷고 또 걷자. 모든 길은 통하게 되어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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