죽음 후에 밝혀진 이름
응급실에서 근무하면서 수많은 신원미상의 환자를 마주했다.
대부분이 DOA(도착 시 사망) 환자 여서 대부분 경찰 인도하에 영안실로 옮겨졌다.
하지만 한 달에도 여러 차례 119를 통해 실려 오던 신원미상의 노숙자 할아버지가 한분 있었다.
늘 술에 절어 있던 할아버지는 응급실 제일 구석진 곳에서 수액 하나 달랑 맞고 누워 있다가 우리가 바쁜 틈에 사라지곤 했었다.
언제나 같은 옷차림, 여기저기 구멍이 나 있는 회색 바지에, 계절과 관계없이 걸치고 있던 작업복 같은 남색 잠바, 그리고 목을 덮을 정도로 긴 머리, 덥수룩한 수염... 지금도 할아버지의 모습이 내 머릿속에 남아 있다.
할아버지가 119에 실려 오는 날이면 응급실은 늘 바빴다.
생각해 보면 그 당시 할아버지를 정확히 어디가 불편한지 검사를 해 본 적도 없었던 것 같다.
119 대원들도 우리도 자동으로 할아버지 침상을 늘 응급실 구석진 곳으로 밀어 넣고 커튼을 치고 들여다보질 않았다. 그러다 어느 정도 술에서 깨서 "두만강 푸른 물에 노 젓는 뱃사공..." 할아버지의 노랫소리가 들리기 시작하면 조용히 수액을 제거하는 일 까지가 우리의 루틴이었다.
그러다, 응급실 안이 정리될 때면 난 빼꼼 커튼 안을 들여다보며 " 배 안 고프세요? 뭐 좀 드려요?" 하곤 간호사실에 있던 빵이나 음료 등을 건네곤 했었다.
그랬던 어느 날, 평일 나이트 근무하던 날이었다.
어쩐 일로 응급실안에 한산하던 그때 멀리서 119 소리가 들리기 시작했다.
모두들 그럼 그렇지 하며 환자 받을 준비를 했다. 그러다 노숙자 할아버지인걸 확인하곤 모두 안도의 한숨을 내뱉었다. 다들 익숙하게 수액을 준비해서 달려고 했는데 할아버지가 식은땀을 너무나 많이 흘린 상태였다.
술 냄새가 나긴 했는데 평소와는 다른 시큼하면서도 과일향 같은 냄새가 났다.
혹시나 싶어 BST(혈당검사)를 시행했다. 여러 번 반복 체크 해도 에러가 나왔다. 우리 모두 갑자기 분주해지기 시작했다 인턴샘은 혈액 검사 오더를 하고 원무과에서는 경찰에 신고하고 (보통 수액정도는 그냥 노숙자분들에게 미수를 달아두기도 했으나 검사를 시작하면 금액이 커지니 경찰 협조로 보호자를 찾아야 했다. )
우리는 기본 검사들을 시작했다.
할아버지는 알코올로 인한 케톤산증 상태였다. (보통은 당뇨 합병증으로 발생하나, 이렇게 할아버지처럼 알코올로 인하여 영양실조 상태에서도 발생하기도 한다. )
우리가 검사를 하는 내내 횡설 수설 하긴 해도 분명 할아버지는 의식은 다행히 남아 있었다.
그러다 갑자기 복통을 호소하며 구토를 하기 시작했다. 아마 췌장이나, 간 쪽도 문제가 있을게 뻔했지만...
우린 검사를 더 이상 진행 할 수 없었다. 경찰이 도착할 때까지 원무과에서 더 이상의 CT 같은 검사는 보류해 달라고 했기 때문이다.
그렇게 1시간 정도의 시간이 지난 후 어르신의 복통호소와 구토증상은 주사 때문인지 가라앉았다. 다행히
다시 시행한 혈당 검사도 200 정도로 떨어졌다. 하지만, 피검사에서 심각한 전해질 불균형이 보였고, 동맥혈 검사에서도 pH수치가 딱 커트라인에 걸려 있어서 치료제를 쓰기에도 애매한 수치였다. 고민하고 있던 찰나에 경찰이 도착했다. 환자 상태를 경찰에게 설명하고 할아버지 자리로 안내했는데... 이런... 할아버지가 그사이 사라지고 없었다. 혹시나 싶어 화장실 및 병원 내를 확인했으나 할아버지는 사라진 후였다.
그 몸을 이끌고 어디를 갔을까? 경찰은 자신들이 알아서 하겠다고 했다.
영양실조가 심한 상태로, 케톤산증 상태가 치료되지 않았고, 그대로 두면 의식 손실이 올 수 있음을 경찰에게 설명하고, 우리 모두는 다른 환자들 보느라 다시 잊고 일을 했다.
그렇게 한 달여 지났으려나, 어느 날 오후 근무를 하고 있었다.
경찰서에서 전화가 왔다. 어느 골목에서 변사체가 발견되어 병원으로 오고 있는 중이라고 말이다.
신원 확인을 위해 지문 검사 했고, 보호자 연락이 됐다고 했다.
그렇게 도착한 시체는.... 바로 한 달 전 응급실을 빠져나갔던 노숙자 할아버지였다.
나도, 다른 멤버들도 아무런 말도 못 하고 한참을 가만히 보고 있었다.
2년 가까이 한 달에도 수차례 119를 타고 오던 할아버지가 한 달 동안 소식이 없어 다들 궁금해하던 중이었다.
더욱이 마지막 때 케톤산증까지 있어 염려하던 중이었는데, 이렇게 싸늘한 변사체로 올 줄은 아무도 예상하지 못했다.
우리가 당황하던 찰나에 30대 초반쯤으로 보이는 남자 한분이 쭈뼛 쭈뼛 우리가 있는 쪽으로 경찰과 함께 왔다.
아들이라고 했다. 결찰은 신원 확인을 위해 할아버지 위로 덮여 있던 흰 천을 들췄다.
얼굴을 확인하던 남자분은 그 자리에 주저앉았다.
노숙자였던 할아버지는 잘 나가는 중소기업 사장님였다고 했다. IMF로 부도가 나면서 매일 술을 먹었고 그 뒤 집을 나갔다고 했다. 3년 만에 마주한 아버지가 시체로 돌아온 것이었다.
우린 최소 70대 이상의 할아버지인 줄 알았는데 이제 61세로 밝혀졌다.
이름도 노숙자가 아닌 박 **....
아들은 그동안 응급실에서 자신의 아버지가 처치받았던 미수금을 정산했다.
한 달 전 그날, 우리가 조금만 더 신경 썼더라면, 사라진 것도 모를 정도로 너무 소홀했던 것 같아..
그래서 이리 돌아가신 것 같아... 난 내내 맘에 걸렸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