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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poppy Aug 18. 2024

조선보다 멀고 일본보다 가까운 [파친코]

근간이 흔들린다는 표현은 우리가 종종 차용하는 표현이다. 혹은 송두리째 흔들린다고 이야기하기도 한다

사람에게 있어서 근간이 흔들린다는 건 정말 고통스러운 일이다. 그 예시는 다양한 곳에서 찾을 수 있다.

사람들은 아주 오래 전부터 본인의 뿌리, 근간을 찾으려고 했다. 문자가 생겨난 후로부터 사람들은 족보를 만들어 우리의 조상에는 얼마나 대단한 아무개가 있었고, 우리 집은 양반이었고... 등등을 따지기 시작했다. 근간에 편입되지 못한 사람들은 돈을 얻어 그 족보에 본인의 자리를 억지로 만들어 우겨넣기도 했다. 사람은 사회적 동물이라지만 그 중에서도 본인의 근간에 매우 집착하는 생물인가보다.

이건 개인적인 경험담이지만, 이를 빼는 것도 이의 근간을 흔드는 일이다... 어제는 위아래 사랑니를 발치했는데 이미 존재하던 뿌리를 억지로 흔들어 살을 째고 이를 뽑아내는 과정은 그닥 유쾌한 경험이라고 말하기는 힘들 것이다.

어쨌든 근간이 흔들릴 때 우리는 필연적으로 혼란, 고통, 슬픔 등을 겪게 된다. 이게 일반적인 일이다.

그렇다면 말 그대로 자신의 인생 전체를 관통해 근간이 흔들린 사람들의 기분은 어떠할까?

조선보다 멀고 일본보다 가까웠던 4대의 이야기는 이 문장에서 비롯된 많은 감정들과 인물들을 담아내고 있는 듯하다

책 '파친코' 입니다



(줄거리) 그대로 가져옴

이 작품은 일제강점기 부산에서 살던 훈이와 양진 부부와 그들의 딸 선자에서부터 시작해,

선자가 일본으로 이주해 간 후 낳은 아들과 그의 아들에 이르기까지 4대에 걸친 일가족과 주변 인물들에 대한 이야기이다.

재일교포들이 겪는 멸시와 차별과 그 속의 처절한 삶을 그리고 있다.

소설의 제목인 파친코는 일본의 대표적인 사행 사업으로, '자이니치'의 삶에서 그나마 가능했던 직업인 파친코 사업과 이를 통해 일본 사회를 살아가는 자이니치들의 삶을 적나라하게 보여주는 중심 소재다.

(1대의 이야기)

가난한 집의 막내딸 '양진'은 돈을 받고 언청이에 절름발이인 '훈이'와 결혼한다.

"여자의 인생은 고생길"이라는 말을 반복하면서도 그러한 인생을 숙명처럼 받아들이는 양진은 남편 훈이와 함께 하숙집을 운영해 나가며 불평 한 마디 하지 않는다.

그녀는 온갖 궂은일을 다 하면서 유일한 자식이자 비장애인으로 태어난 딸 선자를 묵묵히 키워 나간다.

(2대의 이야기)

부모의 살뜰한 보살핌과 사랑을 받고 자란 선자는 안타깝게도 엄마 나이 또래의 생선 중매상 '한수'에게 빠져 

결국 한수가 유부남이라는 사실도 모른 채 그의 아이를 임신하고 만다.

불행의 나락에 빠진 선자는 목사 '이삭'이 그녀를 아내로 맞이하면서 구원받게 되고, 둘은 새로운 인생을 위해 이삭의 형 '요셉' 부부가 사는 일본의 오사카로 향한다.

일본에서 한수의 핏줄인 첫째 '노아'와 이삭의 핏줄인 둘째 '모자수'를 낳은 선자는 친정엄마인 양진처럼 여자로서의 인생은 잊어버린 채 아내와 어머니로서의 삶을 고생스럽게 살아간다.

선자의 형님인 '경희'는 어쩌면 기구한 삶을 살아가는 양진과 선자보다도 더 힘든 인생을 사는 여자인지도 모른다.

경희는 불임으로 자신의 아이를 갖지 못하지만 남편에게 충실하며 가족들을 살뜰히 보살핀다.

불의의 사고로 찾아 온 불행 앞에서도 그 운명을 탓하지 않고 받아들인다.

'파친코'에 등장하는 강인한 어머니이자 아내의 모습을 보여주며, 한편으로는 남편과 자식에게 헌신하는 전통적인 여성상이라는 굴레가 얼마나 한 여성의 삶을 안쓰럽게 만드는지도 보여준다.

인생이라는 이름의 굴레에서 버성나지 못하는 것은 비단 이 세 여성들만이 아니다.

선자의 남편인 이삭은 다른 사람을 위해 자신을 희생해야 한다는 굴레에 묶여 있었고, 경희의 남편 요셉은 가정을 책임져야 하는 것은 남자라는 자신만의 굴레에서 벗어나지 못한다.

(3대의 이야기)

선자의 소중한 두 아들인 노아와 모자수는 일본에서 태어나 일본 이름을 가졌음에도 일본인으로 인정받지 못하고 경시당하고 차별받는 삶의 굴레를 짊어지고 살아간다.

다만, 이 두 아이는 그러한 현실을 각자의 가치관에 근거해 다르게 받아들이고 다른 방식으로 풀어 나간다.

노아는 자신의 힘으로는 어찌할 수 없는 환경을 극복하고자 공부에 파고들고, 모자수는 조선계 일본인에 대한 경멸과 괄시에 폭력적으로 대응한다.

그러나 일본 아이들보다 훨씬 뛰어난 성적을 보이고 착실하게 일하여 많은 돈을 벌어도 그들을 바라보는 일본인들의 시선은 조금도 달라지지 않았다.

'자이니치'라는 편견은 두 사람이 아무리 애쓰고 발버둥쳐도 헤어나올 수 없는, 평생 짊어지고 하는 굴레였다.

1대의 이야기 : 훈이와 양진

1800년대에 태어난 남편 '훈이'와 그보다는 어렸던 아내 '양진'은 대부분이 굶주리고 궁핍하게 살아갔던 시절의 사람들이다.

개인적으로는 이 세대에 가장 감정 이입을 하기 어려웠는데, 내게는 너무나도 먼 세대 같았기 때문이다... 대표적으로 여기서 이야기하는 먹고사는 방식을 경험해 본 적도 없어서 어떻게 반응해야 할지, 이해해야 할지 책을 읽을 때 머릿속에 그림이 잘 그려지지 않아 쉽지는 않았다.

하지만 그럼에도 불구하고 이 세대에서 찾아낼 수 있었던 점은 한 가지이다.

나는 훈이라는 인물이 참 멋있는 사람이라고 생각했다. 아내 양진은 혼인을 한 후 몇 번의 출산을 거치며 몇 번 아들을 낳기도 했지만 시대가 시대인 만큼, 모두 어린 나이에 죽는다. 시간이 흐른 후 간신히 살아남은 자식은 '선자'라는 딸 하나로, 대를 이을 아들이 너무나 중요했던 이 당시의 관점에서 보면 충분히 아쉬워하고 아내를 구박할 수도 있는 상황이었다.

그러나 훈이는 선자에게 아낌없는 사랑을 줄 수 있는 사람이었다. 훈이는 당시의 투박했던 부모들과는 달리 선자가 잘한 행동에 대해 한없이 칭찬해 주고 웃어줄 줄 아는 아버지였기 때문이다.

소설 상에서는 훈이가 선자를 얼마나 아끼는지 알아볼 수 있는 대목이 등장한다.

'훈이는 선자의 완벽함이 경이로웠다. 세상에서 훈이만큼 딸을 소중히 여기는 아버지도 드물었다. 훈이는 자식을 웃게 하는 것이 삶의 목표인 사람 같았다'

살면서 나도 누군가를 이리도 사랑할 수 있을까? 훈이는 몸이 불편한 사람이었지만, 온전히 누군가를 위해 살아가고 자식을 아끼며 바르게 키울 수 있는 훈이의 강인함은 몸의 불편함이 꺾을 수 있는 대상이 아니었다.

2대의 이야기 : 선자와 이삭과 한수와 요셉과 경희


훈이와 양진의 딸 선자는 강인한 인물이다. 생활력도 강하고 꿋꿋한 여성이다.

그랬던 선자는 일본에서 온 판매상 '한수'와의 만남을 갖게 된다. 둘은 서로에게 강한 호감을 느끼게 되고 결국 몇 번의 밀회 끝에 선자는 한수의 아이를 가지게 되지만, 알고 보니 한수는 유부남이었다...

결국 선자는 한수를 떠나게 되고, 이 당시 선자의 하숙집에 묵게 되며 선자와 그 어머니 양진 덕분에 목숨을 건졌던 목사 '이삭'은 선자의 곤란한 처지를 알게 되고 본인과 혼인한 후 함께 일본으로 떠나자는 제안을 한다.

우여곡절 끝에 혼인을 올리고 완전히 새로운 타지로 간 선자는 그곳에서 이삭의 형 '요셉'과 그 아내 '경희'를 만난다. 조선인들에게는 깨끗한 땅을 내어 주지 않았던 일본의 차별 속에서 이들은 끝없는 차별 속에서 나름대로의 생존 방식을 타진한다. 그곳에서 선자는 한수의 아이인 '노아'를 낳고, 이후에는 이삭의 아이인 '모자수'를 낳는다. 한수는 평생 동안 선자의 먼 주위를 맴돌며 이 가족들에게 살아남을 수 있도록 도움을 준다.

선자는 주인공이니 소설 전반에서 끊임없이 다루었고, 개인적으로 가장 이해가 되지 않는 사람은 선자의 남편 이삭이었다.

그는 어렸을 때부터 몸이 병약했지만 살아남았고, 기독교라는 종교에 한평생을 바치며 이타적인 삶을 산 사람이다. 제대로 알지도 못하는 여성을 자신의 아내로 삼고, 자신의 핏줄이 아닌 아이마저도 본인의 가정으로 따뜻하게 감싸 안는다. 나중에는 일본 내 조선인들의 독립 운동을 비밀리에 돕다가 들켜 감옥 생활을 하고, 이 때의 후유증으로 목숨을 잃는다.

왜 이렇게까지 이타적으로 행동하는 것일까? 책을 보면서 잘 이해가 되지 않았다. 어쩔 때는 바보 같았던 것이, 왜 저렇게까지 해서 다른 사람들을 도와야 한다는 사명감에 불타는지 모르겠다는 생각이었다. 자신 뿐 아니라 가족들의 안위까지 위협할 수 있는, 이타적인 행동을 왜 계속해서 하는 것이고 그에 대한 후회는 없어 보이는 걸까? 내가 정상이라는 생각보다는 비정상적인 이타성이라는 생각에 이삭을 끝내 이해하지 못하고 책을 마쳤다.

그러다 어쩌다 이 글을 쓰면서 이삭과 '독립'이라는 키워드에 초점을 맞추어 보기 시작했다. 이 당시에 독립운동을 했던 사람들은 어떤 마음으로 했을까? 나는 진심으로 독립운동을 하신 분들을 존경하지만, 내가 그 시대에 살고 있었다면 과연 독립운동을 할 수 있었을까? 못 했을 것 같다. 그럼 내 가족이 독립운동을 한다면? 솔직히 뜯어말렸을 것 같다. 자신의 모든 안온함을 버리는 독립운동을 한다는 건 결코 쉬운 일이 아니다. 그건 보통의 이타심이나 뜻으로는 이룰 수 없는 일들이다.

독립운동이 없는 이삭은 어떤 사람이었는가 그는 낯선 여성을 선뜻 본인의 아내로 맞는 사람이었고, 성직자가 된다는 것은 본인의 똑똑한 두뇌와는 상관없이 어쩌면 꽤나 빈곤한 삶을 살아가야 하는 처지를 기꺼이 받아들이는 일이다. 물론 이삭에게는 어렸을 때부터 죽을 고비를 몇 번이나 넘겼다는 병약한 몸이라는 배경이 추가되었지만 우리가 그토록 존경하는 독립운동가들은 안온함을 추구하는 나의 시선에서는 이해하기 어려운 아웃라이어의 이타심을 지닌 사람들이라는 생각이 들었다. 나는 그들을 이해하지 못하고 때로는 왜 저렇게까지 이타심을 가져야 하는지 부정적인 감정을 가질 때도 있지만 결국 나라를 바꾼 것은 그 아웃라이어들이었다.. 는 사실이다.

내가 가장 현실적이라고 생각했던 인물은 한수였다. 한수가 독립운동을 방해하는 악역은 당연히 아니지만 그는 일제에 절대친화적인 인물이다.

제주도 가난한 집 아들로 태어나 자랑할 것은 총명한 두뇌밖에 없던 그는 그 두뇌를 백분 활용해 외국으로 나가고 거기서 기회를 잡게 된다. 일본인들이 증오에 휩싸여 조선인들을 대량 학살한 관동 대지진을 겪으며 본인의 힘을 길러야 한다는 것을 느낀다. 그는 명분보다는 실리에 방점을 두고 살아간다. 그렇기에 자신을 떠나는 선자를 이해하지 못한다. 비록 정실 부인이 아니더라도 등 따시고 배부르게 남은 인생을 보내게 해 주겠다는데, 무엇이 문제라는 건지 모르겠다는 입장이다.

하지만 한수는 계속해서 선자를 지켜준다. 많은 여성을 만났고 선자 이후에도 많은 여성을 만나지만, 자신의 아들을 낳은 선자와 그녀의 가족을 끝까지 지킨다. 전쟁 중 위험한 상황에서 가족을 대피시키고, 일자리를 찾아 주고, 이후 선자의 집안이 꽤 윤택한 삶을 누릴 수 있는 초석을 다져 준다.

이삭과는 완전히 다른 한수는 한수 나름의 삶을 보여 준다. 나라를 바꾸었던 아웃라이어 이삭같은 사람들이 존재한다면, 아웃라이어가 되기 위한 반대급부의 사람들이 있는 것과 같은 맥락이다. 둘의 삶을 굳이굳이 비교해 보자면, 한수는 살아 있을 때 사람들의 유행에 맞추어 그림을 그려 큰 부를 쌓았던 화가라면, 이삭은 사람들이 알아 주지 않아도 자신의 그림을 그리고 사후에 비로소 인정받은 화가 같았다. 물론 한수의 삶을 열등하다고 표현할 수는 없다. 사람들이 원하는 것을 정확히 알아내고 꾸준히 감을 잃지 않는 것도 많은 노력과 능력이 필요하다. 하지만 사람들의 기억에 남고, 더 깊은 울림을 주는 작품은 대개 이삭과 같은 화가의 작품일 것이다. 

게다가 한수는 그 부를 얻기 위해, 본인 역시 뛰어난 능력을 지니고 있었던 것은 맞지만 야쿠자로서의 삶을 살았고 그 과정 역시 결코 합법적이지는 않았다는 측면에서 더더욱 그의 인생을 높이 평가하기란 쉽지 않다. 아무리 현실적인 인물이라고 해도..

요셉과 경희의 이야기도 다루고 싶지만 글이 너무 길어질 것 같으므로 패스하자..

3대의 이야기 : 노아와 모자수

노아는 한수와 선자의 아이였고, 모자수는 이삭과 선자의 아이였다

노아는 어렸을 때부터 총명했고 공부를 잘 했고, 모자수는 공부에는 전혀 관심 없이 살아가고 학교에서 조선인에 대한 차별을 목도할 때면 주저없이 주먹을 날리는 아이였다.

이 3대째에서 가장 앞부분에 말한 근간의 주제가 가장 잘 드러난다고 생각한다.

노아와 모자수는 모두 근간이 흔들린 배경을 공유하고 있는 인물들이다. 이들의 가족은 모두 조선인이지만 단 한 번도 조선에 가 본 적 없고, 대부분의 시간 동안 일본어를 사용한다. 실제로 이들의 이름도 모두 일본식으로 등록되어 있다. 조선의 핏줄을 가지고 있지만 조선인이라고 하기에는 애매하고, 일본에서 살고 있지만 일본인으로서 동화되지 않는 삶의 형태 속 둘은 성장기에 나름의 방식으로 고초를 겪는다.

노아는 이것을 공부로 돌파하고자 했다. 영특한 머리를 가지고 있던 노아는 어려웠던 집안 형편에도 불구하고 결국 일본의 최고 명문대학인 와세다 대학교에 입학하게 된다. 그때까지 선자의 가족 주위를 맴돌던 한수는 노아 앞에 나타나며, '너의 뛰어난 재능을 알아 보았다'는 핑계로 노아를 물심양면 후원한다. 덕분에 노아는 물질적인 측면에서의 큰 걱정 없이 대학 생활을 유지할 수 있게 된다.

모자수는 공부로 돌파하려는 인물은 아니었다. 애초에 공부에는 뜻도 없었고 재능도 없었다. 하고 다니는 건 쌈질밖에 없었지만, 어쨌든 모자수는 본인의 길을 찾는다. 바로 이 책의 제목인 '파친코' 사업에서다. 우리나라에서와 마찬가지로 일본에서도 일종의 도박장인 유흥시설은 일본인들이 그닥 선호하는 업종이 아니었다. 그랬기에 일본으로 건너간 조선인들이 특히 많이 하는 사업 중 하나였다. 어쨌든 돈이 되는 사업임은 분명했기 때문이다.

모자수는 견습생을 거쳐 사장의 신임을 얻으며 차차 진급하게 되고, 결국 나중에는 본인이 직접 사업체를 꾸리며 부유층으로 등극할 수 있게 된다. 본인의 바로 윗세대가 열악한 일본의 판잣집에서 간신히 생활을 꾸렸던 것과는 반대이다. 이후 모자수는 아내와 사고로 사별하는 아픔을 겪지만, 그 아들 솔로몬을 무사히 키워 낸다.

그런데 노아는 조금 다르다. 둘 다 조선과 일본 사이에서의 근간이 흔들렸다는 점은 공통적이나, 노아는 여기서 한 번 더 흔들리는 사건이 발생하기 때문이다.

앞서 말했듯이 노아는 한수의 아들이다. 하지만 아무도 노아에게 이를 알려 주지 않았으며, 이삭 역시 노아를 당연히 본인의 아들로 받아들였기 때문이다. 성인이 되고 난 후 한수를 몇 차례 만났을 때에도 노아는 별다른 낌새를 알아차리지 못한다. 하지만 대학 졸업이 가까워지던 시기, 본인의 출생의 비밀을 알게 되면서 노아는 큰 충격에 빠진다.

결국 노아는 그토록 열망했던 와세다대학교를 중퇴하게 된다. 아무리 공부를 잘해도 그저 그런 일본인을 상회할 수 없었기에 최고의 대학에 가서 근간을 의심받는 일에서 해방되고 싶었지만 또 하나의 근간이 흔들리는 것을 목도하고 놓아 버린 것이다.

아이러니하게도 노아가 중퇴 이후 일하게 된 곳은 동생 모자수가 일하는 업종과 같은 파친코이다. 어렸을 때부터 동생과는 그리도 달랐건만 형제는 같은 선상에서 생계를 꾸려 나가게 된다. 이 과정에서 노아는 모든 사람들과의 연락을 차단하고 일본인 행세를 하며 살아간다.

(스포)

그러다 한수의 도움으로 선자는 노아의 거처를 알게 된다. 오랜만에 만난 본인의 아들은 한 가정의 가장이 되어 있었고, 본인을 바라보며 눈물을 흘리는 엄마에게 노아는 웃으며 급한 일이 끝나고 찾아뵙겠다고 이야기한다. 집에 돌아오던 선자는 이사한 집 주소를 노아에게 알려준 적 없다는 것을 깨닫고, 곧이어 노아가 권총자살했다는 소식을 듣게 된다.

선자가 잘못한 걸까? 남편이 아닌 다른 남자의 아이를 가지고 결혼을 해서, 남편의 아이인 양 행세했기 때문에 이 지경이 된 걸까?

노아가 나약한 걸까? 어쨌든 지금 와서 바뀌는 건 없는데 생각이 과도해 결국 현실을 받아들이지 못하고 죽음으로 도피하는 사람이었던 걸까?

아니면 다른 이유가 있는 것인가? 적어도 위의 두 개는 온전한 이유가 될 수는 없을 것이다. 이건 근간이 뿌리째 흔들리는 과정에서 희생된 사람들의 이야기라는 생각이 들었다.

조선인보다는 멀고 일본인보다는 가까운 그 애매한 선상 속에서 본인의 근간을 찾으려 명문대에 진학했지만, 한수보다는 멀고 이삭보다는 가까운 근간의 흔들림을 또다시 마주한 노아의 운명이 너무 기구하다는 생각이 들었다.

4대의 이야기 : 솔로몬

모자수의 아들 솔로몬은 아버지의 사업이 번창한 덕분에 남부러울 것 없이 부유한 삶을 살아간다. 이제 솔로몬은 일본을 벗어나 더 넓은 세계로 일컬어지는 미국으로 향한다. 미국에서 유학을 마치고 유명한 회사에 취업한 솔로몬은 성공적인 커리어를 쌓는다.

그리고 솔로몬은 일본으로 돌아와 할머니가 선자와 아버지 솔로몬을 만난다. 이후 회사의 일본 지부에서 골머리를 앓고 있는 재개발 관련 건을 해결하기 위해 솔로몬은 움직인다. 재개발을 하기 위해 사들인 땅들, 유일하게 땅을 팔고 있지 않는 조선인 할머니를 설득하기 위함이었다. 조선인의 핏줄을 가진 솔로몬이 그 땅을 판다고 하자 그 할머니는 결국 움직인다. 그러나 그 과정에서 할머니가 집을 넘기자마자 숨을 거두며 (사실은 전혀 그렇지 않지만) 불미스러운 오해가 생길까, 그리고 그 공을 가로채려고 상사는 솔로몬을 해고한다. 결국 솔로몬은 이용만 당한 꼴이 된 것이다.

사실 장면은 애플 tv에 나온 동명의 드라마 <파친코>를 통해 처음 접했다. 드라마에서는 원작과는 조금 다른 방식으로 소설이 전개되는데

솔로몬은 누구나 인정하는 엘리트지만 일본 지사의 우두머리는 조선계 일본인인 솔로몬을 어쩐지 배척한다. 그리고 집을 넘기기로 하는 마지막 장면에서 집주인 할머니는 솔로몬에게 조선의 핏줄이 일본에서 살아남으려 겪어야 했던 한을 이야기하며 '너희 할머니라면 이 땅을 팔라고 할 것이냐' 묻고, 솔로몬은 이에 의미심장한 표정으로 '팔지 말라고 할 것이다'고 하며 계약은 결렬된다. 

분노한 상사들과 허탈한 표정을 짓는 직원들 사이로 솔로몬은 왠지 모를 마음 속 격렬함을 느끼며 초고층 빌딩에서 내려와 비를 맞으며 노래에 맞추어 미친 듯이 춤을 춘다.

적어도 나에게는 드라마에서의 묘사가 더 직관적으로 다가온다. 3세대에서의 노아가 떠오른다. 그는 능력이 출중했지만 일본인으로서 융화될 수 없었다. 그 때는 그의 집안이 별볼일 없었기 때문이라고 애써 가정해 보자.. 그렇다면 솔로몬의 경우는 어떠한가

비록 아버지가 파친코 사업을 통해 부를 축적한 인물인 것은 맞지만 그는 엄연한 부잣집 아들이다. 거기다가 머리도 똑똑하고 능력도 출중하다. 그를 고깝게 볼 이유를 전혀 제공하지 않는 인물이다. 

그러나 여기서도 솔로몬은 이유 없는 은근한 배척을 당한다. 왜?

3대와 마찬가지로 솔로몬은 완전한 일본인이 될 수 없었기 때문이다. 그는 알 수 없는 이 애매한 시선을 느끼고 본인 역시 이 시선을 알아차리고 있지만 정작 그 근간의 출처는 알지 못한다. 마음 속 깊숙이 어딘가 해소되지 않는 것들

그러다 그 계약에서 마침내 솔로몬은 그 문제의 근간을 찾는다. 동시에 자신이 지닌 핏줄의 근간을 확인한다. 길거리에서 음악을 연주하는 밴드의 노랫소리에 맞추어 빗속에서 엘리트를 상징하는 넥타이와 양복 재킷을 벗어던지고 흠뻑 춤에 취하는 장면은 시청자들에게 해방감을 선사한다. 3세대만큼 잔인하게 체감하지도, 그럴 필요도 없었지만 솔로몬은 본인의 근간을 찾은 후에 비로소 무언가 자유를 찾은 기분이다. 물론 이 한 순간이 그의 삶을 완전히 바꿀 것이라고 말하기는 어렵지만, 적어도 꽤 많은 부분을 바꿀 것이다.


소설 <파친코>는 이렇게 4대의 이야기를 담고 있다. 

나는 이 소설에서 '근간'이라는 키워드에 가장 집중해 보았지만 사실 그것 말고도 충분히 다른 포커스를 잡을 수 있을 만큼 좋은 책이었고 그만큼 흡입력 있는 책이라는 생각이 든다. 

이 책은 4대의 이야기를 담고 있다는 점에서 펄 벅의 <대지>라는 소설을 연상케 한다. 

아이러니하게도 <파친코>는 한국계이기는 하지만 미국인인 작가가 한국에 대해서 썼다는 것, 그리고 <대지>는 중국에서 어린 시절을 보낸 미국 작가 펄 벅이 중국에 대해서 쓴 책이라는 점에서 묘한 공통점을 가지고 있는 것 같다. 이 작가들도 완전한 한국, 그리고 미국이라고 할 수 없는 그 경계선을 가지고 있다. 그렇기에 오히려 이런 작품을 쓸 수 있었던 것일까?

아무튼 이 두 책의 작가 뿐 아니라 내용에서도 여러 가지를 곱씹게 한다. 비록 <대지>는 고생한 1세대와 서서히 융성한 2세대 그리고 몰락의 길을 걷게 되는 3,4세대를 다루고 있다는 점에서 <파친코>에서의 방향성과는 조금 다르기는 하지만 하나의 핏줄을 공유하고 있는 사람들이 시간이 흐르고 세대가 달라짐에 따라 어떻게 변화하는지, 삶의 전체적인 양식을 들여다 볼 수 있는 작품이라는 점에서 유사점을 가지고 있는 것 같다.

개인적으로 나도 조부모님의 세대, 부모님의 세대 그리고 나의 세대에서 보았을 때 분명히 우리는 한 핏줄을 공유하고 있지만 삶에 대한 생각이나 양상이 급격하게 달라진다는 걸 느낀다.. 하물며 일제강점기에서 해방을 거친 세대는 어땠을까 싶다. 2세대인 선자는 집에서 직접 요리를 해 먹지 않는다는 4세대의 생각에 큰 변화를 체감하는 것처럼, 지금 우리 세대는 그 윗 세대와는 완연히 다른 길을 걷고 있고 우리의 나중 세대도 또 다른 길을 걷는다는 데서 공통점을 가지고 있을 것이다. 그래도 우리가 하나의 카테고리로 묶일 수 있는 건 공유하고 있는 핏줄, 그리고 그 핏줄 내에서 얽힌 나름대로의 정신일 것이다. 이건 긍정적으로도 부정적으로도 작용할 수 있겠지만 

그 다음은 민족이다

사람들은 우리 민족을 '한의 정서'를 가진 민족이라고 칭한다. 고등학교 시절 시를 배울 때면 그 속에는 늘 '한'의 정서가 담겨 있다고 선생님이 말씀하셨다. 단순한 분노나 슬픔만으로는 치환되지 않는 한의 정서는 무언가 겪어 보아야 비로소 이해할 수 있는 존재였다. 

지금도 이 한의 정서는 나에게 완전히 이해되지는 않는 개념 중 하나이다. 아주 가끔 어렴풋이 느끼기는 하지만 우리나라가 많은 '한'에 휩싸여 있던 과거와는 직접적인 접촉이 없는 세대로서 성장해서인지, 아니면 그냥 내가 애써 그 시도를 해 보지 않은 것인지는 잘 모르겠지만 아직도 잘 모르겠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이 책에서는 한의 정서가 어렴풋이 드러나 있다.

일제강점기 시절, 힘없는 조선인으로서 배의 지하에 몸을 욱여넣고 살 길을 찾아 떠나야 했던 만삭의 선자의 모습에서도 찾을 수 있다. 관동 대지진을 겪고 학살당하는 조선인들을 보며 조용히 숨을 죽이며 이를 갈았던 한수의 모습에서도 찾을 수 있다. 일본에서 누구의 도움도 없이 첫 출산을 해야만 했을 때 한달음에 달려와 아이 받는 것을 도와주던 마냥 고까운 이웃의 모습에서도 찾을 수 있다. 누구보다 유능한 직원이지만 민족이 다르다는 이유로 숨 쉴 틈 없었던 요셉의 모습에서도 찾을 수 있다. 그리고 어떻게든 살 길을 마련하기 위해 김치를 담가 처음으로 장에 나가 김치를 팔던 선자의 모습에서도 또다시 찾을 수 있다. 

소설의 제일 앞머리에는 한 문장이 쓰여 있다. "역사가 우리를 망쳐놨지만 그래도 상관없다 History has a failed us, but no matter."

역사를 이어 오며 한민족을 수식하는 단어 중 하나는 '끈질김'이다. 수많은 외세의 침략을 받아 왔지만 그때마다 휘어질지언정 꺾이지는 않은 역사를 보면 나도 한민족이지만 대단하다는 생각이 든다. 그 중에서도 비교적 최근인 일제강점기에는 수많은 사람들이 희생당했고 열악한 환경에 놓였지만 그럼에도 광복을 이루고 다시 대한민국이라는 나라를 쟁취해 낸 사람들이 대단하다. 

이들은 역사로 인해 삶이 망가졌지만 그럼에도 살아남은 사람들이고, 근간이 송두리째 흔들렸지만 어떻게든 뿌리박아 지금까지 남아 있다. 그 과정에서 <파친코> 의 등장인물과 같은 재일교포, 자이니치와 같은 사람들도 존재한다. 이들 역시 근간이 흔들리는 과정에서 노아와 같이 자신의 뿌리에 대해 괴로워했을 것이고, 완벽히 풀리지 않는 해답에 솔로몬처럼 찝찝해도 했을 것이다. 그러나 결국 이 소설에서 작가는 등장인물 모두가 '한민족'이라는 역사를 공유함을 보여 준다고 생각한다. 이건 직접 보시길.. 역사는 때로 한민족을 망쳤고 근간을 흔들었지만 결국 상관없이 살아남은 사람들이 존재한다.

며칠 전은 광복절이었다. 사실 나도 크게 챙기지 않고 넘어가서 나도 대단한 말을 할 자격은 없다고 생각하지만 그래도 가끔씩이라도 한 번쯤은 생각해 보았으면 좋겠다. 우리의 근간에 대해서 생각해 보고, 그 근간을 일구기 위해서 얼마나 많은 시련이 있었는지 생각해 보는 것이다. 그리고 조선보다 멀고 일본보다 가까운, 혹은 이와 유사한 사람들에 대해서도 생각해 보는 것이다.

그렇게 가끔씩은 이런 것들을 떠올리며 우리의 근간을 잊지 않았으면!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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