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어바웃 운명론과 허무주의

어바웃 시리즈 2

by 싱가

운명이라는 단어는 때로 낭만적으로 들리기도 무책임하게 들리기도 한다. 사랑하는 사람과의 만남 앞에 운명이라는 단어를 붙이면 ‘운명적인 만남‘ 이라고 하는 로맨틱한 장면이 되기도 하지만, 모든 것은 다 운명대로 된다는 말을 들으면 어쩐지 무기력해지거나 허무해지기도 할 수 있다. 개인이 원하는 삶의 방향이 있고 그걸 위해 치열하게 노력하는 사람들이 있는데 결국 사람은 운명을 따라 가는 건가? 그냥 팔자대로 사는 건가?

어차피 인생의 항로는 이미 정해져 있다면 여기서 내가 아등바등하는 게 무슨 의미가 있나


라고 생각할 수도 있지만 사실 나는 이 운명론을 좋아하는 편이다.

가장 좋아하는 말 중 하나는 ‘일어날 일은 일어난다‘

나는 왜 이런 운명론을 좋아하게 되었나?


지금보다 더 어렸을 때, 나는 능력주의가 당연한 것이라고 생각했다. 물론 지금 능력주의를 완전히 반대하는 사람이 되었다는 뜻은 당연히 아니다. 사람들이 사회에서 희소한 자원을 얻기 위해 경쟁하고 노력을 쏟는 것은 사회의 관점에서 필수적인 요소라고 생각한다.

그러나 능력주의로 모든 것을 환원하기에는 한계가 존재한다. 나는 내가 거둔 나름의 성공에 대해, 오로지 내 노력의 결과라고 할 수 있을까? 라는 질문을 스스로에게 던져 보면, 당연히 아니다. 사람이 어디서 태어나고 자라는지, 어떤 환경 속에서 생활하는지는 개인에게 정말로 큰 영향을 미치는데, 사실 이건 온전한 개인의 의지라고 보기에는 어렵다.


비슷한 느낌으로, 심리학에서도 한 아이가 자라는 데 유전과 환경 중 어떤 것이 더 큰 영향을 미치는지 알아내고자 수많은 실험이 진행되었다. 어떤 이는 사람의 유전이란 선천적으로 많은 것을 결정한다고 하고, 어떤 이는 주변의 환경에 따라 그 사람은 다르게 만들어진다 (shape) 고도 했다. 치열한 접전 끝에 지금까지의 결론은 ’반반‘ 이라고 합니다..

그러나 유전과 환경 두 가지 요소를 모두 고려해 보더라도 이는 개인의 의지가 뚜렷한 요소는 아니다. 유전은 당연하고, 환경도 내가 바꾸고 싶다고 해서 쉽게 바꿀 수 있는 요소가 아니다.

그러니까 우리가 삶을 꾸리는 데 있어서 중요하게 생각하는 개인의 능력조차도 사실 어쩌면 운명이 아닐까? 라는 생각을 먼저 했다.



또 운명론을 믿는 건 일종의 방어기제일지도 모르겠다. 어떤 노력을 하지 않으면 그 분야에서 성공하지 못한다는 사실은 당연한 이야기지만, 사실 노력을 한다고 해서 꼭 성공을 거두지는 않는다. 이 세상에는 내가 통제할 수 없는 수많은 변인이 있는데, 그 결과를 온전히 나의 의지와 행동에서만 비롯된 결과물로 환원시킬 수 있을까?


다른 사람들이 흔히 그렇듯이 나는 중요한 시험이나 일정을 앞두면 큰 스트레스를 받는다. 내가 하나라도 실수하면 / 무언가를 잘못 생각하면 내가 원하는 결과가 나오지 않을까 봐 안달복달했다. 그렇게 많은 스트레스 상황에 놓였고, 그 스트레스에 나를 온전히 노출시키지 않기 위해 나름의 방법을 모색했다.


우선 최선을 다하는 건 당연하지만 그 결과에 대해서까지 y=nx 형식의 우상향 직선으로 생각하지 않는 방법이었다. x축에 내 노력을 많이 쏟아붓는다면 높은 결괏값이 나올 가능성은 높아지겠지만, 꼭 항상 그렇지는 않더라~ 라는 것

그리고 지금 당장은 내 결괏값이 마음에 들지 않아도 나중에 가서 돌아보면 오히려 좋아? 일 수도 있다는 것

그래서 ‘일어날 일은 일어난다’는 문장을 좋아하게 되었다. 지금 당장 내가 원하는 결과가 나오면 그대로 좋은 거고, 다른 방향으로 흘러가더라도 원래 목표한 방향이 내 길이 아니었구나~ 그럼 또 다른 길이 보일 것이라는 마음을 가지려고 애를 썼다.

“지금은 몰라도 나중에 보면 다 의미가 있는 일이 아닐까요?”


라고 글 내용을 생각하고 있었는데 모레 시험보는 범위에서 비슷한 내용이 나왔다

ㄷㄷ

한마디로 인간은 모든 일에 의미를 부여하고자 하기 때문에, 이 세계의 혼란을 나름의 질서로 재구성함으로써 불확실성에 대한 공포를 낮춘다는 것

이게 내가 하고 있었던 일일지도 모르겠다.



이 글을 쓰다 보니까 생각이 난 낙관적 허무주의와 카뮈

나는 낙관적 허무주의라는 말을 좋아한다. 낙관적 허무주의란:: 세상에 대한 의미나 목적이 없다는 허무주의적 관점에서, 그럼에도 희망과 긍정적인 태도를 유지하는 철학적 입장을 이야기한다. 허무주의의 한 갈래로, 삶의 본질적인 무의미함에도 불구하고 스스로 의미를 창조하고 긍정적인 삶을 살아가는 것을 강조한다.


위에서 말한 의미 부여와는 조금 상충되는 것 같지만!!

“내입맛대로철학해석” 타임을 가지면서 허무주의에 대해서 좀 찾아 봤다. 이름에서 알 수 있듯이 ‘세상은 허무‘ 라는 게 큰 테마인데, 이 허무한 세상을 어떻게 인식하느냐에 따라 그럼에도 인간이 스스로 자신의 삶과 가치를 개척해 나가야 한다는 ’능동적 허무주의’와 염세주의와 유사한 ‘수동적 허무주의’로 나뉜다. 사실 외부에 있는 신의 존재를 부정한다는 점에서 운명론을 주장하는 사람들과는 또 반대의 이야기를 하고 있는 것 같다.


아마 이러한 삶의 형국을 깨닫는 건 ’부조리’를 인지하는 인간의 모습이겠죠?

사람들은 이런 부조리를 마주하면 큰 고통을 느낀다. 그러나 결국 부조리에서 내가 느끼는 고통도 결국 내가 살고자 하는 강한 마음에서 나온 것이라고 본다. 살고 싶어서 세상을 이해하려고 하고, 의미를 찾으려 한다는 것이다.

그래서 또 나아가면, 니체는 이에 대해 초인이라는 개념을 통해 설명한다. 내가 느끼는 것들은 동물적인 것의 변형에 불과하다는 것을 깨닫지만, 이는 무의미한 일은 아니다. 니체가 생각하는 인간의 가장 중요한 특징은 상상력이다. 시작점은 생존본능이었으나, 인간은 결국 자신의 생존을 뛰어넘는 것을 추구하는 존재 즉 ‘초인‘이 되고자 한다.

반대로 카뮈는 상상력을 견지할 수 있는 지식인 계층보다는 노동자 계급의 입장을 생각했다. 매 순간을 ‘소진’시키는 것은 카뮈에게 중요하다. 인간의 삶은 매우 무의미한 노동이 반복된다. 하지만 카뮈는 시지프 신화의 시지프가 그럼에도 이 노동을 멈추지 않는다는 점을 주목한다. ‘반항’을 하며 주체성을 유지한다. 이렇게 삶의 무의미함을 인식하면서도 이를 꿋꿋이 견디고 받아들이는 것이 인간다운 삶이라고 주장한다.


딱 여기까지 쓰고 나니까 머리가터질것같다

그럼 결국 허무주의도 어떤 의미에서는 의미를 찾으려고 하는 것 아닌가? 이들의 허무는 아마 신의 존재가 아니었나 싶다.

나는 운명론이든 (능동적) 허무주의든 결국 개인은 세상 전체의 관점에서 스스로가 얼마나 하잘것없는 존재인지를 알고 고통에 빠지지만 —> 나름의 의미를 찾아나간다는 점에서 유사점이 있는 것 같은데 이건 철학에 대해서 조금 더 공부를 해 봐야 결론을 내릴 수 있을 것 같습니다..

이번 여름 계절학기에 철학 강의를 신청해 놨는데 열심히 들어야 할 것 같소………


내 지금 지능을 아득히 뛰어넘은 철학 사조의 등장에 글이 너무 길어졌지만

결국 내가 운명론이나 낙관적 허무주의의 태도? 를 좋아하는 이유는 별 거 없다

그냥 자기방어다: 이 세상에서 내가 마주한 부조리를 온전히 내 능력과 역량 부족으로 돌리기에는 찜찜한 부분들이 너무 많고 그렇게 생각한다면 나는 이 스트레스를 감당하지 못한다

그렇기에 내 길은 나도 모르지만 어떻게든 나 있다는 운명론의 이야기를 좋아하게 되었고, 세상은 허무로 가득하지만 그 허무에서 다시 시작해 삶의 의미를 견지하는 허무주의의 이야기를 좋아하게 되었다.


삶이란 진짜 유명한 미스터리다

그걸 하나의 수식으로 풀어내기란 절대 불가능이고, 그 방향은 나도 모르는 사이 바뀌어 있기 마련이지만

모든 것을 통제하려다 어느 한 발도 내딛지 못하는 것보다는, 어딘가는 길이 나 있겠지/못 본 고랑에 걸려 넘어져도 다시 일어나면 나름의 의미가 있겠지 라는 생각으로 발걸음을 옮기는 게 사실 우리 삶에서 가장 필요한 태도가 아닐까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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