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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생글 Jan 07. 2023

소리길, 시작도 끝도 없는

천불천탑 운주사

창밖 가로수가 여간 당당한 것이 아니다. 하나같이 오른쪽으로 기울어져 이색적인 풍경을 펼친. 오랜 세월 그 자리에서 뿌리를 내려서인지 크고 작은 가지마다 서로 닮은꼴을 보인다. 이들이 가리키는 방향은 오직 한 길이다. 그럼에도 나는 운주사로 가는 언저리를 맴돌다가 갈림길에 놓인다.


저만치 마을 표지석이 보인다. 정자나무도 보이고, 그 너머로 뭉게구름도 보인다. 석곡을 지나 능주를 지나지만, 운주사로 가는 길은 나에게는 여전히 멀다. 이정표만 찾다가 정작 그것이 가리키는 방향을 놓쳐버린 것이다.


가다 서다를 반복하다가 길모퉁이를 돌아서간다. 때마침 돌담집 굴뚝에서 연기가 피어올라 가까이 다가선다. 담장너머로 한 노인이 보인다. 그는 아궁이 앞에 앉아 타닥타닥 불씨를 지핀다. 그러다가 나에게로 고개를 돌린다. 순간 뒷걸음질하던 나는 머쓱한 표정으로 운주사로 가는 길을 묻는다.


엉거주춤 문밖으로 나온 그는 혼잣말을 하면서도 길을 훤히 꿰뚫는다. 지팡이처럼 들고 있던 부지깽이로 단박에 운주사로 가는 길을 가리키는 것이 아닌가. 그제야 길눈이 번쩍 뜨인 나는 이 골짝에서 골짝으로 단숨에 길을 잇는다. 해가 서쪽으로 기울듯이 운주사로 가는 길도 서쪽으로 기운. 그래야만 중심을 잡을 수가 있는 모양이다.


덕분에 나는 곧장 길을 달린다. 운주사도 바로 눈앞이다. 드문드문 보이는 차량 속에 일행의 차가 보여 반가움이 앞선다. 나란히 차를 대고 밖으로 나오자 바람결에 넘실대는 햇살이 먼저 반긴다. 다랭이 논이 보이고, 그 너머로 잔설이 보인다. 산그늘에 가렸던 눈이 새하얗게 빛난다. 이산 저산 황량한 자태로 남아돌던 겨울빛이 슬금슬금 떠날 준비를 한다. 논두렁밭두렁 사이로 연둣빛 봄이 밀려와 더는 머물  없었는지도 모른다.


일주문으로 들어서자 물방울이 툭툭 떨어진. 불경소리에 뒤늦게야 잔설이 깨어난 모양이. 슬그머니 고개를  다시 툭툭 내 뒤통수를 냅다 후려친다. 방울방울 물방울이  목덜미로 주르륵 번져난다. 재빨리 카메라를 끄집어내 처마 끝을 향하지만, 잔설의 움직임은 어디에도 없다. 파아란 하늘가로 두둥실 뭉게구름만 다닌다.


발아래 초점을 잃은 그림자가 보인다. 한 발 한 발 움직이 그도 따라 움직인다. 나는 그림자놀이를 하듯이 조심조 내딛는다. 잔설이 있는 언 , 바닥보고 걷는. 저만치 천불천탑의 길이 보인다.내가 곁눈질을 하자 그도 따라 다. 햇살 아래 놓인 그림자가 흔들흔들하다가도 잘도 걷는다. 그러다가 나보다 앞서간 발자국과 그림자가 하나로 겹칠 때면 나도 모르게 물컹거린다. 이 모두 사람이 남긴 흔적인 것 같아서다.


절집 마당을 빙빙 돌다가 일행을 따라 법당으로 들어선다. 비움의 출발점인 양 나를 바닥까지 바짝 낮추고 내려놓기를 반복한다. 묘한 기분이다. 절에서 절하는 것은 당연하지만 이전까지 나는 그런 적이 없었. 간간이 절을 찾았지만 절 주변 풍경에만 관심을 가지고 겉돌았다. 어떤 예를 갖추기는커녕 법당안에서 절하는 사람들의 사진만 찍고 돌아섰기 때문이다.


고즈넉한 절집을 둘러싼 산비탈길로 향한다. 골짝마다 돌탑, 돌부처가 줄을 잇는다. 오래전 아주 오래전부터 빚은 형상이 문드러질대로 문드러져 이것이 저것 같고 저것이 이것 같은 모양새다. 천불천탑의 꿈을 안고 남긴 발자국과 함께 도란도란 길을 잇는다. 한 발 한 발 오르다가 들리는 소리가 있어 가만가만 귀를 기울인다. 삶을 좇아 탑을 만들고 부처상을 만든 사람들기도소리가 들리는 것 같아서다.


어제오늘의 일은 아닐 것이다. 눈을 떠도 보이고 눈을 감아도 보인. 눈이 있어도 보이고, 눈이 없어도 보인다. 숱한 세월 크고 작은 돌덩이로 굳어져 세상의 이치를 꿰뚫은 지 오래다. 서쪽 산기슭에 자리한 부부 와불 아래로 불쑥불쑥 솟은 탑도, 크고 작은 부처상도 하나같이 사람의 온기와 더불어 산다.

                                  

천불천탑의 길을 잇고도 못다 한 꿈이 있는가. 운주사 산골짝길로 살짝 돌아서 가자. 사람의 흔적을 따라 한 발 한 발 오르다가 보면, 순박한 사람들의 꿈이 서려있다. 그 꿈의 연장선에서 돌로 빚은 탑도 있고, 돌로 빚은 사람도 있다. 이들은 과거와 현재를 잇는 갈림길에서 만난 사람들과 천년만년 살고 있다. 보이는 것만 있는 것이 아니라 “있는 것이 없는 것이고, 없는 것이 있는 것”이라는 소리도 함께 들린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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