창밖 가로수가여간 당당한 것이 아니다.하나같이 오른쪽으로기울어져이색적인 풍경을 펼친다. 오랜 세월 그 자리에서 뿌리를 내려서인지크고 작은 가지마다 서로 닮은꼴을 보인다.이들이 가리키는 방향은 오직 한 길이다.그럼에도나는 운주사로가는 길 언저리를맴돌다가갈림길에 놓인다.
저만치 마을 표지석이 보인다. 정자나무도 보이고, 그 너머로 뭉게구름도 보인다. 석곡을 지나 능주를 지나지만, 운주사로 가는 길은나에게는여전히 멀다. 이정표만 찾다가 정작 그것이 가리키는 방향을 놓쳐버린것이다.
가다 서다를 반복하다가길모퉁이를 돌아서간다. 때마침 돌담집굴뚝에서연기가 피어올라 가까이 다가선다.담장너머로한 노인이 보인다. 그는 아궁이 앞에 앉아 타닥타닥 불씨를 지핀다. 그러다가 나에게로 고개를 돌린다. 순간 뒷걸음질하던 나는머쓱한 표정으로 운주사로 가는길을 묻는다.
엉거주춤문밖으로 나온 그는 혼잣말을 하면서도길을 훤히 꿰뚫는다.지팡이처럼들고 있던 부지깽이로 단박에 운주사로 가는 길을 가리키는 것이 아닌가. 그제야 길눈이 번쩍 뜨인 나는이 골짝에서 저 골짝으로단숨에 길을 잇는다.해가 서쪽으로 기울듯이 운주사로 가는 길도 서쪽으로 기운다.그래야만 중심을 잡을 수가 있는 모양이다.
덕분에 나는 곧장 길을 달린다.운주사도 바로 눈앞이다. 드문드문 보이는 차량 속에 일행의 차가 보여반가움이 앞선다. 나란히 차를 대고 밖으로 나오자 바람결에 넘실대는 햇살이 먼저 반긴다. 다랭이 논이 보이고, 그 너머로 잔설이 보인다. 산그늘에 가렸던 눈이 새하얗게 빛난다. 이산 저산 황량한 자태로 남아돌던 겨울빛이 슬금슬금 떠날 준비를 한다. 논두렁밭두렁 사이로 연둣빛 봄이 밀려와 더는 머물 수없었는지도 모른다.
일주문으로들어서자물방울이 툭툭 떨어진다. 불경소리에 뒤늦게야 잔설이 깨어난모양이다. 슬그머니고개를들자다시 툭툭 내 뒤통수를 냅다 후려친다. 방울방울 물방울이내목덜미로 주르륵 번져난다.재빨리카메라를 끄집어내처마 끝을 향하지만, 잔설의 움직임은 어디에도 없다. 파아란 하늘가로두둥실뭉게구름만떠 다닌다.
발아래 초점을 잃은그림자가보인다.한 발 한 발 움직이자 그도 따라 움직인다. 나는 그림자놀이를 하듯이 조심조심 내딛는다. 잔설이 있는 언 땅,땅바닥만 보고걷는다. 저만치 천불천탑의 길이 보인다.내가 곁눈질을 하자 그도 따라 한다. 햇살 아래 놓인 그림자가 흔들흔들하다가도 잘도 걷는다. 그러다가나보다 앞서간 발자국과 그림자가하나로겹칠 때면나도 모르게물컹거린다.이 모두 사람이 남긴 흔적인것 같아서다.
절집 마당을 빙빙 돌다가일행을 따라법당으로들어선다. 비움의 출발점인 양 나를 바닥까지 바짝낮추고내려놓기를 반복한다.묘한 기분이다. 절에서 절하는 것은당연하지만이전까지나는그런적이 없었다. 간간이절을 찾았지만절 주변 풍경에만 관심을 가지고 겉돌았다. 어떤 예를 갖추기는커녕법당안에서 절하는 사람들의 사진만 찍고 돌아섰기 때문이다.
고즈넉한 절집을 둘러싼산비탈길로 향한다.골짝마다 돌탑, 돌부처가 줄을 잇는다.오래전 아주 오래전부터 빚은 형상이 문드러질대로 문드러져 이것이 저것 같고 저것이 이것 같은 모양새다. 천불천탑의 꿈을 안고 남긴 발자국과 함께 도란도란길을 잇는다. 한 발 한 발 오르다가 들리는 소리가 있어 가만가만 귀를 기울인다. 삶을 좇아 탑을 만들고 부처상을 만든 사람들의 기도소리가 들리는 것 같아서다.
어제오늘의 일은 아닐 것이다. 눈을 떠도 보이고 눈을 감아도 보인다. 눈이 있어도 보이고, 눈이 없어도 보인다. 숱한 세월 크고 작은 돌덩이로굳어져 세상의 이치를꿰뚫은 지 오래다. 서쪽 산기슭에 자리한부부 와불 아래로불쑥불쑥 솟은 탑도, 크고 작은 부처상도 하나같이 사람의 온기와 더불어 산다.
천불천탑의 길을 잇고도 못다 한 꿈이 있는가. 운주사 산골짝길로 살짝 돌아서 가자. 사람의 흔적을 따라 한 발 한 발 오르다가 보면, 순박한 사람들의 꿈이 서려있다. 그 꿈의 연장선에서 돌로 빚은 탑도 있고, 돌로 빚은 사람도 있다. 이들은 과거와 현재를 잇는 갈림길에서 만난 사람들과 천년만년 살고 있다. 보이는 것만 있는 것이 아니라 “있는 것이 없는 것이고, 없는 것이 있는 것”이라는 소리도 함께 들린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