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선생님, 수영 말고 결혼이요

2005년 12월, 칼바람이 불었던 그 날 by 친절한 윤겸씨

by 유니스

취업 준비생인 나는 옷장 앞에서 한참을 고민하고 있었다. 유행 지난 빛바랜 오렌지색 잠바 외에는 걸칠 외투가 없었다. 초라한 내 모습이 마음에 들지 않아, 그나마 최대한 유행을 타지 않는 청치마를 골라 입었다. 그리고 내 주제에서 가장 고가의 신발인 나이키 운동화에 발을 넣고 거울을 보았다.


'음, 뭐 이 정도면 나쁘지 않아'


흡족한 미소를 띠며 수영 가방을 챙겨 현관을 나서는데, 가방을 든 손이 시리다. 얼른 방으로 뛰어들어가 장갑을 찾았지만, 잠바와 운동화에 어울리는 캐주얼한 털장갑은 서랍에 살고 있지 않다. 음. 곤란한데. 며칠 전 아르바이트비를 받아 큰맘 먹고 백화점에서 산 금장 장식의 세무 장갑만이 어서 날 끼라며 손짓한다. 나의 귀여운 대학생 콘셉트와는 전혀 어울리지 않았지만 현관 앞 칼바람이 떠오르자 얼른 손을 장갑 안에 꿰어 넣었다. 누가 보겠어. 자. 이제 이 지긋지긋한 취준생 생활을 끝내 줄 수영장으로 출발해 볼까.

(난 체력테스트를 앞두고 있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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땡.

엘리베이터 문이 열리자 익숙한 락스 냄새가 코를 훅 찌른다. 자연스럽게 회원카드를 꺼내며 안내데스크로 향했다. 그곳에는 늘 친절한 직원 언니가 나를 반겨 준다. 한데 오늘은 익숙한 그 장면이 아니다. 언니 옆에 왠 낯선 남자가 함께 있다. 하하 호호, 둘의 공기가 사뭇 친근해 보였다.


"안녕하세요. 여기 카드.."


그 남자가 나를 멀끔 멀끔 보더니 씩 웃는다. 뭐지. 왜 웃는 거야. 예쁜 건 알아가지고. 그런데 어디서 본 것 같은데. 누구지?


마음의 소리와는 달리 수줍게 카드를 내밀었다. 그런데. 헉. 세무 장갑! 오늘의 콘셉트와는 너무나 동떨어진 세무 장갑! 또래로 보이는 그 남자에게 내미는 손이 장갑 안에서 화끈거렸다. 그 남자는 카드를 받아 들더니 무심한 듯 한마디 툭 던졌다.


"장갑이 안 어울리네"


"네?(!!!!!!!!)"


그 말이 무어라고 얼굴을 붉히며 샤워실로 종종걸음 했더랬다. 수업 내내 수영은 뒷 전이고 그의 무례함에 에 왜 대꾸하지 못했는지, 나가는 길에 마주치면 뭐라고 한마디 쏘아주지만 골몰하다 물만 실컷 마셨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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수업이 끝난 뒤, 돌아가는 엘리베이터. 우연인지 필연인지. 그와 또 마주쳤다. 물론 나와 그 둘만은 아니었다. 그는 엘리베이터 안의 다른 회원에게 하회탈 미소로 대화를 건넸다. 뭐야. 나한테는 까칠하기만 하더니... 뭐 그래도 웃는 모습은 좀 귀엽네. 그러나 그는 내 존재는 먼지인양 알은 체도 않고 휑하니 내려버렸다.


그날부터였다. 수영장에 가는 일이 꽤나 신경이 쓰였던 것이. 지각 대장이었던 나는 언제부턴가 얼리 출석생이 되었다. 그리고 그날로부터 며칠이 지나지 않은 어느 날, 평소보다 조금 더 일찍 출석한 나는 유리창 너머로 한 마리 돌고래가 날아오르는 모습을 보았다. 탄탄한 몸, 까맣게 잘 그을린 피부. 그 몸에 부딪혀 부서지는 하얀 물방울. 한 편의 광고처럼 그가 내 눈 안에 가득 들어왔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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돌고래 한 마리가 내 맘에 들어왔다. 알고 보니 그는 새로 온 나의 옆 반 수영 선생님이었다. 수영 수업을 함께 듣는 친구에게 그의 정체를 들었다. 그가 자기 학교 선배이며, 아르바이트로 이곳에서 수업을 한단다. 슬며시 올라가는 입꼬리를 얼른 내렸다. 친구는 선배에게 밥 한 번 안 사주냐며 애교를 던졌고, 선생님은 인심 좋게 연락하라는 말을 남겼다. 그렇게 몇 번의 우연과 약속이 반복되었고, 그 옆에는 늘 내가 있었다.


그리고 12월의 끝을 달려가던 어느 날, 우리 둘은 송년회를 가지자며 만난 자리에서 선생님에게 연락했다.


"선배, 우리 한 잔 하고 있는데 나와요"


"나 지금 집이라서 나가기 힘든데"


"야, 네가 이야기해 봐. 선생님 안 나온데"


"선생님, 친구 바꿔줄게요"


"안녕하세요. 선생님. 혹시 다른 일 없으시면 나오시면 안 될까요?(비싼 척 하기는)"


"... 조금만 기다려요. 준비해서 나갈 테니"


비싸게 나왔지만 그는 언제 튕겼냐는 듯 내가 처음 보았던 그날의 그 엘리베이터 웃음을 보여주며 서글서글하게 우리의 대화를 맞춰주었다. 유머도 꽤나 장착한 것이 우리를 빵빵 터트려주기까지. 그 덕분에 즐거운 송년회의 밤이었다. 그리고 귀가의 시간. 친구집보다 내 집이 더 가까웠음에도, 굳이 친구를 먼저 데려다주고 나를 데려다주겠단다.


응? 이거... 혹시 그린라이트인가?


기대 반, 설렘 반으로 집으로 향했지만 그는 정말 깔끔하게 "잘 들어가"만 남기고 돌아섰다. 뭐야. 관심 있는 척했으면서 그냥 데려다만 주고 가는 거야?


송년회 이후로 안면을 튼 우리는 가끔씩 수영장에서 마주쳤고 "선생님 안녕하세요"라는 안부 인사만 나누었다. 그때도 그는 "빨리 다녀라", "따뜻하게 입고 다녀라" 등의 츤데레 말만 툭툭 던지며 지나갈 뿐이었다.


그렇게 시간은 흘러 2월의 밸런타인데이. 거리는 빨간 장미꽃과 초콜릿으로 넘쳐났고 나를 유혹했다.


'오늘이야. 어서 고백해. 뭐 하는 거야.'


몇 개월간의 짝사랑에 이제 그만 종지부를 찍고 싶었다. 이런 질질거림은 내 스타일이 아니었다. 기면 기고 아니면 아닌 거지. 나는 눈에 들어오는 빵집에 들어가 너무 크지 않은 초콜릿 하나를 집어 들었다.


'오늘 끝내자'


당당하게 초콜릿을 들고 수영장으로 향했다. 그리고 두리번두리번 그를 찾았다. 그는 보이지 않았고 안내 언니와 눈이 마주칠 뿐이었다. 그녀의 눈은 나 한 번 , 내 손에 초콜릿 한 번. 또 나 한 번. 그녀의 눈이 묻고 있었다. 민망해진 나는 세상 친절한 미소로


"언니, 이거 지나가다 받은 건데 언니 드세요."


뜨악!


그렇게 초콜릿은 주인을 잃었고 나는 도망치듯 수업에 들어갔다. 그리고 수업이 끝나고 나오는 길. 그가 언니와 함께 초콜릿을 먹고 있었다.


"이거 은선 씨가 나 준거야. 많이 먹지 마"


오 마이갓.

망한 발걸음으로 미쳤지 미쳤어를 외치며 집으로 돌아가던 그때. 띠링. 한 통의 문자메시지가 도착했다.


"나는 왜 안 줘?"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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발신인: 수영선생님.

꺄아악~~~~~~~~~~


그렇게 나의 짝사랑은 끝이 나고, 쌍방의 연애가 시작되었다.


"선생님, 있잖아요."


"언제까지 선생님이라고 부를 거야? 나 너 선생님 아닌데. 오빠라고 불러"


우리의 연애는 6년간 이어졌고 뭐 대부분의 결혼스토리가 그렇듯 우리 커플 또한 우여곡절 끝에 결혼에 골인했다.


에필로그를 이야기하자면 그 튼튼한 몸매에 잘 그을린 피부의 선생님은 지금. 퉁퉁한 몸매에 허연 몸뚱이를 가진 배 툭 튀 아저씨가 되어 소파와 재혼을 했다나 어쨌다나. ㅋㅋㅋ


<그 선생님의 에피소드>


사실 내가 알기 전부터 날 지켜보고 있었단다.


주황색 잠바에 금장 세무 장갑은 진짜 안 어울렸다고 한다.


그럼에도 그걸 빌미로 말 걸고 싶었다고.


송년회도 정말 나가기 싫었는데 내가 있다고 해서 나간 것이라고 한다.


집에 데려다준 건... 진짜 흑심이 있어서.


흑심을 이어가지 못했던 것은 전연인과 이별한 지 얼마 되지 않아 환승연애로 오해 살까 봐서였단다.


하지만 초콜릿 자기한테 주지 않고 언니에게 준 것에 진심 화나서 연락했다고 한다.(그게 왜 화나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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