brunch

You can make anything
by writing

C.S.Lewis

by 희무 Mar 19. 2023

사랑에도 모양이 있다면

이기심을 이기는 사람

이번 연애는 몇 점이에요?

이별을 하면 연애에 대해서, 옛 연인에 대해서 꼭 한 줄 이상의 소감 또는 평가를 하기 마련이다. 주변 사람들은 꼭 이별의 이유를 물어보고, 그들은 대답을 얼버무리면서 '그냥 뭐, 안 맞아서' '성격 차이지 뭐' 같은 뻔하지만 수학 공식 같은 답변을 늘여놓는다.

최근 주변에 이별한 사람들이 여럿 생기면서 문득 궁금해졌다. 나의 옛 연인들은 나를 어떻게 평가할까? 나는 경험이 쌓이면서 변화했고, 상대방에 따라 매번 달랐다고 생각하지만, 실상 그들의 반응은 아닐 수도 있겠다. 다 다를까 아님 다 비슷할까. 만약 나의 옛 연인들이 모두 한자리에 모여 술을 마시며 진솔한 대화를 나눈다면 어떨까? 나에 대한 욕을 하며 공감대를 형성할까. 깔깔대며 웃을까. 누군가는 눈물을 보이거나 하품을 하기도 하려나. 아, 애초에 이런 자리가 만들어질 수가 없겠구나.

이런 파워 N 같은 상상은 제쳐두고, 머리를 최대한 차갑게 식히며 옛 기억들을 주섬주섬 떠올려 보았다. 내 사랑은 어떤 모양이었는지, 연애의 시작과 끝에 내 모습은 얼마나 많이 달랐을지.

Gaspar Noe의 영화 'Love' 中


수십 개의 꼭짓점을 가진 뾰족한 별


(1달, 10일 만난 것도 연애라고 친다면 더더욱) 대부분의 연애에서 내 사랑의 모양은 '수십 개의 꼭짓점을 가진 별'이었던 것 같다. 남들은 우리를 행복하게 빛나는 관계처럼 봤을 수도 있겠다. 하지만 난 별을 둘러싼 수많은 꼭짓점처럼 날카로운 말로 상대방을 쏘아붙였다. 나의 부족함을 되돌아볼 시간에 그들의 부족함만을 끄집어냈다. 약점을 무기 삼아 이별을 쟁취해내려고 했다. 애초에 시작해서는 안될 관계들이었다.

그 당시 난 오랫동안 일에 미쳐 살았다. 핑계일 수도 있겠지만 난 힘들게 입학한 명문대를 뒤로 하고 생전 처음 접하는 분야에 뛰어들었다. 그만큼 다른 사람들에게 뒤처지지 않기 위해 열정적으로 살았고 또 그 일을 너무나 사랑했다. 그 과정 속에서 연인은 내게 늘 뒷전이었다. 그때도 희미하게 느끼긴 했지만 지금 와서는 확실히 안다. 난 연애를 해서는 안 되는 상태였다는 것을. 사랑하는 이의 존재가 '방해'가 될 수도 있다고 느끼는 것은 쓰라릴 정도로 괴로웠다. 난 일과 사랑 모두에 내 에너지를 조화롭게 나눌 만큼 충분히 현명하지 못했고, 일에 쏟는 정도도 내 기준에 한참 미치지 못했다. 시작해서는 안될 연애 전쟁의 대가, 그 상흔은 무척이나 강하게 또 오랫동안 남았다.

Gaspar Noe의 영화 'Love' 中

그런 나의 행동에 대한 대가인 것일까. 돌이켜보면, 연애를 했던 것은 아니지만 짜릿하게 괴로운 일이 끊임없이 반복해서 일어났다. 스무 살부터 10년 동안 꾸준하게, 많은 여성분들이 술에 깊게 취한 채 나에게 선을 넘은 애정 표현을 했다. 그들은 내 앞에서 울고, 웃고, 뛰고, 넘어졌다. 때론 철없는 어린아이처럼, 때론 미저리처럼, 때론 둘 다의 모습으로. 몇몇은 자신의 집 주소를 알려주며 가자고 하거나, 모텔로 가서 밤을 보내자며 생떼를 부리기도 했다. (당연하지만, 연애를 하던 중에는 이런 일이 없었다.)

당연하게도, 또는 의아하게도 난 10년 동안 한 번도 선을 넘지 않았다. 처음에는 일종의 '사기'라고 생각했던 것 같다. 영화 '트루먼쇼'처럼 누군가 나를 촬영하고 있고, 이를 통해 나의 도덕성을 판단하는 거라고 생각했다. 내가 유혹에 강했다기 보단, 의심이 많은 성격 덕분에 넘어갈 수 있었다. 혹시 모를 상황에 대비해 녹음을 하기도 했다.

어쨌든 이런 일이 꾸준하게 간헐적으로 일어나면서 문득 궁금해졌다. 서로 그 어떠한 감정적, 섹슈얼적 교류가 없던 사람이 왜 이렇게 행동하는 것일까? 도대체 난 그들에게 어떤 모양으로 비쳤던 것일까. 난 그 답을 ‘우연’에 맡기기로 했다. 그들은 누군가로부터의 위로가 필요했고, 술을 많이 마셨고, 그 옆에 내가 있었던 것뿐이다. 이상의 의미 부여는 독이다.

지금 생각해 보면 추행에 가까웠던 경우도 있었다. 내가 싫다고 거절하는데도 힘으로 뽀뽀를 하려고 하거나, 자신의 가방을 내던지며 바닥에 앉아 지금 사귀어주지 않으면 나 오늘 죽을 것이다라고 한 사람도 있었다. 어떻게 이렇게 모욕적일 수가 있을까.

Gaspar Noe의 영화 'Love' 中

무엇보다 힘들 때는 그 상대방이 '내가 호감을 느낀 사람'일 때다. 상대방이 내게 마음이 있고 없고는 중요하지 않다. 내가 상대방에게 마음이 있음에도 아무런 말도 행동도 할 수 없는 이 무기력함이 미칠 듯이 괴롭다. 시작하기도 전에 관계가 끝이 나버린다니, 이렇게 허무할 수가 없다. 내게 너무나도 소중할 수 있는 사람을 한 순간에 잃는 아픔, 그 과정의 참담함은 여전히 잊지 못한다.

Gaspar Noe의 영화 'Love'  中


커다란 원 안에 숨겨진 삼각형



내가 가장 깊게 사랑했던 사람들, 나와 오랫동안 좋은 관계를 유지했던 극 소수의 옛 연인들은 나를 이렇게 그릴 것 같다. 원 안에 세모가 있는 형태.

그들이 내게 비슷하게 남긴 말이 있다. 평소에는 다정하고 부드럽지만 가끔은 너무 냉정하고 뾰족하다고. 그래서 무섭고 불안하다고.

맞다. 사랑할 때뿐만 아니라 난 모든 관계에서 그런 것 같다. 나의 가장 큰 단점이다. 나는 사람을 너무나 사랑하지만, 동시에 사람이 너무나 밉다. 서로에게 '조금만' 더 신경 쓰고, '조금만' 더 다정하고, '조금만' 더 마음을 연다면 너무나 안온할 수 있는데, 무지갯빛의 환상적인 미래가 펼쳐질 수도 있는데 왜 사람들의 그 '조금'은 이기심을 이기지 못할까.

물론 이기적인 건 나도 마찬가지다. 상대방이 똑같은 실수를 반복하든, 배려 없는 말과 행동을 보여도 그걸 수용하느냐 마느냐는 나에게 달려있다. 하지만 반복되는 실수나 먼저 꺼낸 나와의 약속을 하루 만에 깨뜨리는 상대방을, 나는 사랑한다는 이유로 받아들이기에는 나는 관대하고 사랑스럽지 않다. 결국 나는 내가 중요하다.

끝내 선을 넘었기에, 서로가 서로를 온전히 받아들이지 못했기 때문에 이별을 하는 거겠지. 난 이미 금 간 관계는 빨리 끊어내고 마음을 추스르는 것이 맞다고 생각했다.

Gaspar Noe의 영화 'Love' 中

하지만 요즘따라 그 선의 적정선이, ‘금’의 크기의 적정선이 어느 정도인지 헷갈린다.

사람을 알아가는 게 지독하게 어려운 이 세상에서 누군가와 깊어진다는 것이 얼마나 기적인지 안다. 그렇기에 내가 이렇게 쉽게(?), 단호하게 관계를 끊어낸다는 것이 좋은 일인지 모르겠다. 그렇다고 관계에 금이 나는 것을 방구석에 가만히 앉아 기도하듯 지켜보는 것도 말도 안 되는 일이겠지만. 언젠간 인연을 만난다는 진부한 말을 아직은 믿고 싶다. 좋은 사람을 만나기 위해 내가 더 좋은 사람이 되어야 한다는 것도 이젠 너무나도 확실하게 안다.


큰 원 안에 작은 원


나는 LP판 같이 생긴 모양의 사랑을 하고 싶다. 가끔은 잔잔한 클래식이나 재즈를, 가끔은 베이스가 울리는 힙합 또는 락을, 가끔은 K-POP이나 발라드를 틀고 싶다.


나는 도넛같이 생긴 모양의 사랑을 하고 싶다. 기분을 달달하게 만들어주는, 쓴 커피와 함께 먹으면 참 맛있는. 그래서 이 쓴 세상을 함께 헤쳐나가고 싶은 그런 형태를.


커다란 원 안에 자그마한 원의 모양을 담아내고 싶다. 내가 뿜어내는 사랑의 모양이 사랑하는 사람에게 어떻게 비칠지는 모르겠지만, 난 큰 원으로 상대방의 모든 것을 포용하면서도 그 안에 아주 작지만 단단하고 두터운 벽을 가진 원을 가지고 있어 나의 핵심은 잃지 않고 무너지지 않는 그런 상태를 유지하고 싶다.

어딘가에 치우쳐지지 않는. 단단하면서 부드러운. 예민하지만 다정한.

나의 뾰족함을 섬세함으로 만들어 상대방의 뾰족함을 깎아 온몸으로 품어내고 싶다.

이기심을 이기는 사람이 되어 총천연색으로 사랑하고 싶다.

봄, 여름, 가을, 겨울처럼 사랑하고 싶다.


매거진의 이전글 낯선 존재에 위로받는 여행
작품 선택
키워드 선택 0 / 3 0
댓글여부
afliean
브런치는 최신 브라우저에 최적화 되어있습니다. IE chrome safari