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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조새월 Jan 06. 2024

남의 뷰파인더(2)

네 번째 이야기



    나는 졸지에 제주도 남쪽의 병원 벤치에 앉아있다. 물론 이번 제주도 여행도 기말 마감과 공모전 준비를 뒤로 하고 졸지에 떠나 온 것이지만, 생판 모르는 여자의 보호자 역할은 전혀 계획에 없던 일이었다. 간호사가 이르기를 그녀의 이름은 김 수진이고, 나이는 스물셋이라고 했다. 절벽에서 떨어질 때 머리를 부딪혔지만, 머리부터 떨어진 게 아니었고, 물도 그리 얕지 않았으니 생명에 큰 지장은 없다고 했다. 내일이나 모레쯤에는 의식을 되찾을 거라고 했다. 이번에 처음 불러본 구급차였지만, 막상 사이렌을 울리며 다가오는 구급차 자체는 그리 특색 있지 않았다. 구급차가 오기 전까지는 기대 이상의 극적인 사건 때문에 식은땀이 등 뒤로 흘렀고, 남의 카메라가 들려 있어 손아귀에 힘도 못 주고 있었다. 막상 아래쪽으로 내려가는 구급차는 송악산의 시원함 만큼 푸른 경치와 아름다운 대조를 이뤘다. 처음 연을 맺은 구급차를 도시에서 접하지 않은 게 얼마나 큰 행운인지 내심 느껴졌다. 


    수진 씨에 대한 생각은 병원에 도착하고부터 시작됐다. 병원에 도착하기 전에 죽을 수도 있었던 그녀는 절벽 위에서 홀로 고민하기엔 너무 날것의 생경함이었다. 사실 구급차에서 내린 대원들이 그녀를 옮기는 것을 확인하자마자 다른 곳으로 도망치고 싶었다. 그렇지만 나는 카메라를 받아버렸다. 그녀의 유품이 될 수도 있었던, 서슬 퍼런 독기가 서린 물건을 어떻게 그냥 가져갈 수 있겠어. 이 극도로 조용한 물건을 어떻게 남에게 주거나 버릴 수가 있겠어. 나는 어렸을 적 한 번도 만나본 적 없는 친척의 장례식에 따라가는 것처럼 구급차에 따라 오를 수밖에 없었다. 


    사실 묵을 곳도 아직 안 잡았고, 언제 올라갈 지도 정하지 못했으니 나는 그녀의 곁을 의인처럼 지킬 수 있을 것이다. 눈을 뜬 그녀에게 숭고한 마음가짐으로 이 카메라를 돌려줄 수도 있겠지. 하지만 나는 지금 여유가 없다. 선행은 여유로운 자들의 사치라고 생각한다. 돈을 말하는 것이 아니다. 돈이 있는 사람들은 돈이 드는 선행을 하겠지. 기본적으로 선행은 타인을 생각하는 마음에서 비롯되고, 타인을 생각하려면 자기 자신에 대한 정리가 마무리 돼야 한다. 지금 내 머리는 뒤죽박죽이다. 타인의 더러운 손때가 묻었든, 내가 타인을 흘겨보느라 초점을 잃었든, 결국 엉망진창이 된 내 머릿속이 문제니 귀찮음을 빙자하는 건 그만둬야겠다.


    지금 가장 강렬히 몸부림치는 욕망은 그녀의 카메라 파일을 확인하는 것이다. 인간 김 수진의 여러 모습이 담겨 있을 이미지들을 확인하고 싶다. 수진 씨는 분명 처음 보는 사람이고, 막말로 얼굴도 절벽에서 떨어지던 찰나가 아니라 침대에 누워있는 모습을 통해 외웠다. 그렇기 때문에 더 궁금하다. 예전의 나였다면 이런 내 마음을 살짝 재수 없는 작가의 건강한 호기심이라고 생각했을 것이다. 요즘은 그렇게 확실한 자부심을 가질 수가 없다. 


    내가 한창 바쁠 때 기말 마감과 공모전 준비를 내팽개친 것은 내 호기심 때문이었다. 호기심이 빈약하지도, 그걸 행동에 못 옮기는 것도 아니었지만, 내 호기심이 과연 진짜 호기심인 건지 헷갈리기 시작했다. 그러다 처음으로 글을 쓸 수가 없어졌다. 비참함을 느낄 수 있는 데까지 뽑아내며 발악하다 종국에 무릎 꿇는 것보다는 미리 손을 놓고 비참함을 음미하는 게 더 낫다고 느껴 하염없는 바다에 혼잣말을 걸러 왔다. 


    나는 초등학교 일기 숙제 때부터 글쓰기가 좋았다. 다른 친구들은 없는 이야기를 지어 내느라 곤욕을 치렀다. 걔네에게 없는 건 이야기가 아니었다. 시간은 공평하게 흐르고, 그 나이대 아이들의 일상은 드라마틱한 차이를 보이지 않는다. 그냥 자기가 겪은 일들을 기억하지 못할 뿐이다. 나는 그때부터 내 일상의 크고 작음을 막론하고 그것들은 나의 것임을 알고 있었고, 그걸 글로 담는 것은 너무나 자연스러운 일이었다. 그렇게 비슷한 12년을 보냈다. 일기는 백일장이 되었고, 백일장은 개인 소설이 되었으며, 형태만 바뀔 뿐 담기는 것은 순전히 내 이야기였다. 정확히는 내가 바라본 온누리였고, 그 중심이 나였다. 나는 별 고민 없이 문예창작과에 지원했다. 만나보지 못한 글벗과의 조우, 말이 통하는 교수자들과의 토론처럼 지금 돌이켜보면 당시의 내 가슴을 들뜨게 만들만한 미래가 여럿 담긴 선택이었지만, 그때의 나는 나 자신에 순응한 것에 불과했다. 


    문제는 첫 합평에서부터 시작됐다. 서로의 소설을 읽어보며 피드백을 받고 의견을 개진하는 날이었다. 나는 당시 대학교에 입학하고서 두세 달 동안 느낀 것들을 자전적으로 갈무리해 제출했고, 교수님은 글이 살아있다며 칭찬하셨다. 하지만 수업이 끝나고 인상이 험해진 동기들이 몇 명 다가와 내게 따지기 시작했다. 한 동기가 자기 짝사랑 이야기를 왜 넣었냐며 소리를 질렀다. 그 친구는 다른 교양수업에서 한 여성을 발견했는데, 용기를 내 조별과제를 같이 하자고 했고, 좋은 결과를 냈다고 했다. 상대는 친구에게 너무 고맙다며 밥이라도 한 번 사겠다고 했다. 친구는 너무 기뻤다. 문제는 그전부터 올곧게 기뻐했다는 것이었다. 친구는 상대에게 자신의 연심을 숨기지 못했고, 상대는 부담스러워했던 게 분명했다. 문제의 약속 날 상대가 왼손 약지에 반지를 끼고 나타났다고 했다. 친구는 용기를 내 남자친구가 있냐고 물어봤고, 자연스럽게 반지에 대해 추궁했다. 상대는 그냥 패션으로 끼는 거라고 했지만 친구는 확실히 느꼈다고 했다. 자기를 거부하기 위해 일부러 준비한 반지 같다고 말이다. 친구는 그 어떤 방파제보다 두텁고, 그 어떤 정치인의 표정보다 차가운 그녀의 손가락을 보며 망연자실했다. 술자리에서 들은 이야기였다. 


    다른 친구는 왜 자기가 알바할 때 했던 이야기를 맘대로 썼냐며 화를 냈다. 그 친구는 카페에서 알바를 하는 녀석이었다. 잠깐 쉬려고 담배를 피우러 나왔는데, 어떤 외국인이 택시를 못 잡겠다며 도와달라고 부탁했다. 친구는 영어가 정말 짧은 녀석이었고, 어떻게든 도와주려 했지만 외국인 휴대폰의 택시 어플이 계속 안 열렸다고 했다. 혼자 일하느라 오래 자리를 비우면 안 됐던 친구는 옆에 있는 고깃집을 가리켰다. 그 고깃집은 영업 준비가 한창이었다. 친구는 외국인에게 자기는 혼자 알바를 하고 있으니 당장 들어가 봐야 한다, 옆에 고깃집은 도와줄 사람이 있을 거다며 문법과는 무관하게 단어를 배열하여 열렬히 설명했다. 영단어 암기에 매진했던 어느 침팬지처럼 말이다. 그렇게 어느 외국인을 다른 업장에 이양하며 my english is suck, sorry라고 말했다. 친구는 사대주의 냄새가 났지만 결국 자기 계발에 대한 개인적인 아쉬움을 들이밀었다. 친구는 이 이야기를 술자리에서 풀며 아쿠타가와 류노스케의 라쇼몽을 빗대어 자신의 정당성을 강설했다. 친구는 이 이야기를 자기 다음 소설에서 쓸 예정이었다며, 내게 도둑질을 했다고 따졌다.


    다른 녀석들은 내가 겪은 이야기 자체에도 불만을 표했다. 문예창작과 오리엔테이션 날, 너무 술을 많이 먹은 나는 머리가 핑 돌기 시작했고, 사고를 치기 전에 황급히 자리를 떴다. 나는 주량을 넘기면 계속 토를 하는 주사가 있었다. 위 내용물이 비면 위액을 토했고, 위액이 바닥나는 일은 없었다. 내 메슥거림은 링거를 맞기 전까지 계속됐다. 그래서 스무 살 초기, 한창 술에 쩔어 살 때는 동네 의사 선생님과 친해졌다. 나중에는 길게 설명할 것도 없었다. 의사 선생님은 이미 처방전을 작성했고, 오늘은 몇 병이었냐는 질문에만 머쓱하게 대답하면 됐다. 한 번 사달이 나면 술값이 두 배로 드는 셈이었다. 그날은 지하철 화장실에서 토하고, 변기에 앉아 자다가 다시 토하기를 반복했는데, 토를 할 때마다 동기들의 이야기가 떠올랐다. 아까 언급한 두 이야기를 포함해, 동기들의 일화들이 떠올랐고, 그것들 덕분에 지옥 같았던 숙취가 조금은 낭만적으로 느껴졌다. 어머니가 타준 꿀물을 마시다가 결국 또 토했을 때, 내 위액은 평소처럼 쓴 소화제 같은 맛이 아니라 끈적한 요리용 물엿 같았다. 이 기억을 비유로 곁들여 동기들의 입과 얼굴들을 심상 삼아 새벽을 지새웠다고 썼다. 내 나름대로는 따뜻함을 문체에 담았지만, 친구들은 이를 악랄한 비유라고 생각했다. 내가 자신들을 무시했고, 일말의 따뜻함은 재수 없는 나르시시즘이라고 비난했다. 

    

    나는 어이가 없었다. 자기 작품에 쓸 소중한 이야기였거나, 밝혀지면 부끄러운 자신의 일부분이었다면, 왜 술자리에서 굳이 꺼냈냐. 그냥 고이 간직했으면 됐을 것을. 나는 변형해서 사용해도 되는 줄 알았지. 그리고 내가 겪은 게 그런 건데, 내 이야기는 내가 맘대로 쓰면 되는 거 아니냐. 이렇게 반박했지만 그때부터, 아니면 수업을 빙자한 문학계의 작은 사회에서 교수님께 무책임한 각광을 받은 그 순간부터 나는 동기들에게 멀리해야 할 사람이 돼 있었다. 그 일이 있은 후부터 나는 내가 리얼리즘에 매료된 사람이었다는 것을 깨달았고, 순전히 허구의 이야기는 쓸 줄 모르는 사람이구나 하고 체감했다. 

    그러다 올해 한계가 찾아온 것 같다. 사람들과 관계를 맺을 수 없으니 이야기가 떨어진 것도 있고, 계속 혼자 지내다 보니 고고함의 탈을 쓴 외로움의 상을 뒤늦게 발견한 것도 이유가 될 것이다. 이번 여행도 원고지랑 필기구를 가져오긴 했지만 그냥 부적 같은 게 돼 버렸다. 모름지기 부적은 아무런 실익이 없어야 그 자격을 얻는다. 그러니 아무리 실용적인, 무한한 가능성을 가진 물건이어도 철저하게 쓰지 않으면 부적 이하의 물체가 되고 만다. 지금의 내게 수진 씨의 카메라는 그 어떤 부적보다 부적답지만, 맹목적인 탐구심을 자극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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