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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조새월 Jan 06. 2024

남의 뷰파인더(3)

네 번째 이야기



    최소한의 타협으로 예전 사진들부터 보기로 했다. 나도 사진첩을 정리하다 웃음 지은 적이 있는데, 시간대가 현재에 가까워질수록 점점 즐거움이 사라졌었다. 우리가 사진을 찍는 이유는 추억하기 위함이다. 과거의 내 모습을 통해 과거를 들여다보고, 현재는 과거에서 시간이 흘렀다는 점에서 이미 충분한 메리트를 갖는다. 안 죽고 살아있는 게 어디냐 같은 속 편한 낙관주의가 아니라 시간의 흐름에 따른 최소한의 변화 때문이다. 사람마다 차이는 있겠지만 우리는 나름 열심히 살아간다. 외부요인에 영향을 많이 받았든, 철학을 겸비해 자기 계발 혹은 경험 편력에 힘썼든 결국 그 다름들이 우리를 미소 짓게 하는 것이다. 그러니 제일 최근에 찍은 사진은 기분 나쁠 때 거울을 바라보는 것처럼 자신을 함부로 하는 일에 불과하다. 수진 씨는 어떤 생각을 가지고 있는지 모르겠지만, 내게 사진은 가장 아름다운 통지표에 가깝다. 수진 씨는 정말 사진을 많이 찍었다. 다 보려면 수진 씨가 식물인간 판정은 받아야 할 정도의 양이었다. 나는 빠르게 사진들을 돌리며 시선을 끄는 사진들 위주로 파악하기로 했다. 


    첫 번째 사진은 2019년 6월 15일에 찍은 사진이었다. 수진 씨가 스물세 살이라 했으니 고등학교 3학년 때다. 뚜껑을 연 치약을 마이크처럼 입에 갖다 대고 있는 남학생 사진이었다. 수진의 동창으로 보이는 남학생은 입을 크게 벌려 마치 치약을 털어 먹으려고 하는 것처럼 보였다. 눈동자는 위를 치켜보느라 반달 돌칼처럼 휘었고, 무대 관객이 아니라 자신을 비추는 조명 그 자체를 보는 것 같았다. 어디서 찍었는지 확실히 말할 수는 없지만, 분명 야자 시간에 딴짓을 하고 있는 모습일 것이다. 


    두 번째 사진은 9월 24일, 당구장에서 찍은 사진이었다. 역시 동창으로 보이는 남학생이 후드 집업을 입고 당구장 의자에 거의 누워있었다. 남학생은 양손으로 큐대를 쥐고서 졸고 있었다. 몸이 오른쪽으로 치우쳐 곱게 접은 패딩 위에 안착했고, 큐대는 3시 방향을 가리키고 있었다. 마치 지푸라기 더미를 베개 겸 매트리스 삼아 자고 있는 돈키호테 같았고, 더 용맹함을 연상 지어 바라보면 보이지 않는 말 한 필이 남학생 아래에 다소곳하게 서있는 것처럼 보였다. 시기상 9월 모의고사를 본 직후인 것 같다. 애가 저렇게 조는 걸 보니 저녁 먹고 밤에 잠깐 딴 데로 샌 것 같았다. 


    다음 사진은 10월 5일, 수진 씨는 수능을 보기 전에 마지막으로 여행을 떠났나 보다. 펜션에 딸린 수영장에서 찍은 것으로 보인다. 수영장 풀 측면에서 찍어서 사진은 검은 선으로 이분되었다. 아래는 수건 몇 개가 나뒹굴고 있었고, 위는 수진의 친구들 두 명이 얼굴만 빼꼼 물 위로 빼서 웃음 짓고 있었다. 남학생은 턱까지 빼서 활짝 미소 지었다. 젖은 머리를 어설프게 넘기니 사교계에 첫 발을 내딛는 헛똑똑이가 거울을 보며 짓는 모습 같았다. 옆에 여학생은 내심 부끄러웠는지 코 윗부분부터 공개했다. 덕분에 옆에 있는 남학생보다 훨씬 물놀이를 좋아하는 것처럼 보였다. 수영장 선에 맞추느라 타일 패턴은 수평에 어긋났는데, 그래서 더 분위기가 살았다. 폭풍전야라고 하기엔 이들의 표정은 너무 밝았고, 전야제라고 하기엔 그들의 눈은 부담감을 완전히 이겨내지 못했다.  


    다음 사진은 11월 1일, 거울에다 대고 찍은 자신의 모습이었다. 보통 이런 사진은 얼굴을 잘 담지 않는다. 의도를 하는 건지, 구도에 대한 이해가 부족한 건지 보통 폰으로 얼굴을 가린다. 수진 씨는 그런 사진을 찍고 싶지 않았나 보다. 카메라를 굳이 오른쪽으로 기울이고, 몸은 왼쪽으로 꺾어 자기 모습을 전부 담을 수 있는 각도로 찍었다. 디지털카메라라 스마트폰보다 더 어려운 작업이었을 텐데, 대단하다. 물론 그만큼 자세가 웃겼다. 집중력이 부족해 왼손은 허공에서 이상한 제스처를 취했고, 그것 때문에 입고 있던 코트도 우스운 포지션을 취했다. 자화상이 한창 유행했을 때, 가난한 화가를 비싸게 사서 마음대로 포즈를 취하는 귀족 같은 기개가 느껴졌다. 본질은 우월감이지만 그 정성 때문에 미워 보이지 않았다. 정갈한 복장을 보니 이곳은 연주회나 전시회 화장실인가 보다. 저번 달에 여행 간 지 얼마나 됐다고 또 놀러 왔냐. 수능이 2주도 안 남았는데 일종의 마인드 컨트롤 차원에서 방문한 것 같다. 


    그 바로 다음 사진은 서류였다. 중앙대학교 사진과 합격증이었다. 되게 무성의하게 찍은 사진이었다. 밝기 조절은 하나도 안 됐고, 가운데 정렬도, 수평도 일부러 안 맞춘 게 아니라 그냥 안 맞은 거였다. 그래도 수진 씨의 용솟음치는 달성감이 느껴졌다. 놀러 다닌 만큼 입시 준비도 열심히 했나 보다. 빨간색 학교총장의 도장은 단순한 사각형이 아니었다. 나라에서 주는 무슨 표창장처럼 보였고, 판타지 세계관에서 인기 있는 검사가 하사 받은 이쁜 돌처럼 신성한 기운이 뿜어져 나왔다. 


    수진 씨의 성격상 예상되는 사진들이 줄을 지었다. 작은 빌딩숲을 꾸린 소주병과 맥주병들, 마스크를 안대처럼 쓰고 술에 쩔어 누워있는 동기들, 각종 주류로 자신의 주량과 신념을 여실히 표현하는 건배장면 등 나랑 달리 대학생활을 잘 즐긴 것 같았다. 건배 사진 속 모히토 한 잔 만 빨대가 꽂혀 있었는데, 그 빨대가 나를 손가락질하는 것 같아 괜히 눈치 보였다. 


    알코올 냄새나는 사진들을 쭉 훑다가 어느 벽지 사진이 눈에 들어왔다. 하얀색 벽에 여러 영화 포스터들을 덕지덕지 붙여놨는데, 하나하나 명작들이었다. 거기에 매니악함도 꿇리지 않았는데 심한 건 1930년도 작품들도 있었다. 웬만한 문창과 애들보다 수준이 높잖아? 수진 씨는 영화도 엄청 좋아했나 보다. 와중에 또 여행을 갔는지 밤에 냇가에서 몇 쌍의 다리들이 일자로 쭉 뻗고 있었다. 누구는 슬리퍼를 신었고, 누구는 맨발이었는데, 그 광경을 보니 정육점 진열대가 떠올랐다. 진열된 원육들에서 미처 떼지 못한 등급 태그가 보이는 것 같았다. 사람 다리에다가 이런 비유를 하는 게 좀 그렇지만, 실제로 굵기 차이가 꽤 나서 그런 인상을 멈출 수가 없었다. 


    그러다 배경 사진 하나가 내 미감을 자극했다. 휜 줄기에 동그랗고 시뻘건 열매가 맺힌 나무처럼 생긴 분수대였는데, 하늘이 아래에 있었다. 뒤집어서 찍은 것이다. 카메라를 뒤집어 오른쪽 검지 대신 왼쪽 새끼손가락으로 셔터를 눌렀는지, 아니면 허리를 꺾어 달팽이껍데기처럼 엉거주춤 찍었는지는 알 길이 없었다. 내가 알기로 이 분수가 있는 아파트는 꽤 고가다. 그걸 뒤집어서 찍으니 혁명적인 목소리가 들렸고, 의도치 않게 화면에 담긴 천장을 걷는 사람들도 타개해야 할 주적처럼 느껴졌다. 와중에 분수는 아래에서 위로 올라갈 수 있는 연결다리처럼 보였다. 미술작품 같은 사진이었다. 죄송스럽게도 슬슬 집중력이 떨어져 가던 와중에 다른 문서 사진을 발견했다. 자퇴 원서였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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