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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조새월 Jan 06. 2024

남의 뷰파인더(4)

네 번째 이야기



    응? 이해가 안 된다. 좋은 대학교, 적성 맞는 과에 친구들이랑 잘 지내는 것 같았는데 왜 갑자기 자퇴를 해? 나는 앞으로 조금 앞당겨 대충 넘긴 사진들을 다시 훑었다. 검은색 종이를 찍은 사진이었다. 자세히 보니 그건 단순 반복 과정으로 검게 칠해진 신문지 같았다. 혹시 미술 수업인가? 미술 비전공생을 대상으로 하는 미술 기초 수업에 경우, 선 긋는 훈련을 한다고 이런 무식한 과제가 있다던데, 아마 맞을 것이다. 한껏 구겨진 종이를 보니 수진 씨의 짜증이 강하게 느껴졌다. 다음 사진은 유색 테이프로 무슨 구멍을 막아 놓은 사진이었다. 보니까 어느 카페의 콘센트였다. 카페 사장이, 카페에 오랫동안 앉아서 공부하는 학생들을 쫓아내기 위해 고안한 고육지책으로 해석됐다. 분명 수진 씨는 이 사실을 모르고 카페 음료를 구매하지 않았을까. 그녀는 배신감과 함께 사소한 억울함을 느낀 것 같았다. 


    그다음엔 수진 씨의 정서가 꾹꾹 눌러 담긴 것 같은 배경사진들이 눈에 띄었다. 공사 현장 사진 속 포크레인은 작은 전원주택을 철거하는 중이었다. 그런데 공사 현장이니 접근을 금지하는 테이프가 포크레인까지 감싸고 있었다. 그 모습은 쉬고 싶은 포크레인이 울타리를 이불처럼 자기 몸에 올린 것처럼 보였고, 철거를 맡은 작은 건축 회사가 부도나 포크레인과 덜 부서진 주택 채로 버려진 것 같다는 상상도 들었다. 분명 그녀는 이 우스꽝스러운 광경을 한 점의 전시물 같다고 느꼈을 거고, 그 내용물에 본인을 투영했을 것이다. 농구 골대를 아래에서 찍은 사진은 아름다웠다. 멀리서 반점처럼 보이는 보름달을 골대 안 쪽에 오도록 해 하늘이 덩크슛을 하는 것처럼 보였다. 그러나 수진 씨의 심리를 상상하며 살펴보니, 달을 옮기진 못해 카메라 각도라도 바꾼 것처럼 우악스러움이 느껴졌다. 어쩌면 하늘 전체를 옮기려다 골대라도 사진 속에서 옮긴 것일지도 모른다. 


    다음은 어느 역인 지는 잘 모르겠지만 지하철역 안이었다. 캠페인인지 어떤 프로그램인지는 잘 모르겠지만, 역 광장 모서리 벽에 모형 창문이 있었고 안쪽에는 인공조명이 설치됐다. 창문 옆은 인공 수풀로 자연의 느낌을 냈고, 조명은 오늘 질리도록 본 푸른 하늘과 색깔만 비슷했다. 그 빛을 완벽하게 느낄 수 있는 자리에는 밝은 하늘의 햇살을 느껴보라는 말과 함께 발바닥 두 개가 인쇄돼 있었다. 문제는 그 자리 바로 앞에 벤치가 있다는 것이다. 이러면 맑은 하늘을 바라볼 때 벤치에 누가 앉아 있는지 확인을 해야 하며, 애초에 뻔뻔한 벤치 때문에 눈치를 봐야 했다. 이게 무슨 맑음과 밝음인가! 그 발바닥에 어떻게 발을 올리고 모형 하늘을 바라보냐! 수진 씨는 이 기획이 기가 찼을 것이다. 나는 이런 기획을 증오한다. 따뜻함을 위하는 척하며 여러 가지를 고려할 줄 모르는, 손난로 한 번 만져본 적 없는 주제에 모닥불 그림을 그리는 아둔한 화가의 작업실 안쪽을 억지로 살펴본 느낌이 들었다. 


    자퇴 원서 바로 전 사진은 이상한 셀카였다. 어느 공원에서든 볼 수 있는 사각형 수풀 위에 검은색 형상이 떠있었다. 사람인데, 왼팔은 없고, 오른팔은 쭉 뻗었으며 무언가 들려있었다. 아마 수진 씨가 자신의 그림자를 찍으려다 왼팔을 제어하지 못했고, 오른팔을 뻗어야 각도가 나왔나 보다. 나는 이 사진이 지금까지 본 것들 중에 가장 슬픈 것 같다. 사진작가의 자부심으로 웬만해선 자기가 셔터를 눌렀고, 자기 모습을 찍고 싶으면 안간힘을 썼었는데, 이거는 안간힘을 쓰고서 자신의 그림자를 담았으니까. 예술적인 시도야 물론 훌륭하지만, 그녀의 정서를 내 맘대로 확립하고 보니 검은 형체는 결국 슬픔의 상이었다. 지금까지의 삶과는 대조적인 우울을 겪고 있는 사람. 검은 형상은 표정도, 입고 있는 옷도 확인할 수 없지만 분명 꾀죄죄한 몰골에 눈은 팅팅 불었을 것이다. 


    자퇴원서 다음 사진은 더 충격적이었다. 처음으로 아저씨와 아줌마가 담겼다. 그녀의 부모님이 분명하다. 그런데 아버지는 고함을 지르며 쌍욕을 내뱉는지 목에 핏대가 벌겋게 섰고, 어머니는 렌즈를 가리키며 삿대질하고 있었다. 그녀는 자퇴 관련 문제로 부모님과 싸웠고, 감정이 격해졌으며, 이 상황까지 기어코 찍으려 하니 그들 짜증에 더 불을 지핀 것 같았다. 이 어찌 아름다운가! 결단으로 인한 후폭풍의 민낯을 마주 봤고, 그걸 가로지르는 와중에 일어난 사달을 다시 카메라에 담았다니. 이 무슨 저돌적인 리얼리즘인가! 

    아마 수진 씨는 원래부터 부모님과 사이가 좋지 않았을 것이다. 그녀 성격과 기질에 부모님과 사이가 좋았다면 부모님들 사진도 많았겠지. 부모님은 분명 예술이 뭔지 모르는 사람들일 것이다. 예술가가 가장 원하는 부모는 부자도, 조건 없는 응원자도 아닌 대화 가능한 이해자다. 예술을 실현하기 위해서는 돈과 조건 없는 응원이 진심으로 요구되기는 하지만, 결국 말이 통하는 부모가 예술가들에게 가장 큰 축복이다. 수진 씨 부모들의 다른 조건은 모르겠지만, 분명 말은 잘 안 통하는 부류였을 것이다. 내가 만약 수진 씨를 과 동기로 만났다면 어땠을까? 지금의 허허벌판보다는 나은 인간관계를 만들어줬을까? 타협을 하지 않은 게 아니라 타협이 뭔지도 몰랐던 내가 외로움에 사무쳐 능력마저 잃고 있을 때 나를 도와줬을까? 아니면 어떤 동기나 선배도 하지 못한 꾸짖음으로 나를 인도해 줬을까? 내가 수진 씨였다면 어땠을까? 대학 공부를 이겨냈을까? 부모님과 대화로 잘 풀 수 있었을까? 


    다음 사진은 웬 장난감이었다. 어느 공원에서 인도와 나무 사이를 구분 짓는 벽돌 위에 장난감들이 살아 움직인다는 설정의 영화에 나온 캐릭터가 멀뚱히 서 있었다. 그 초록색 빛깔은 소임을 다한 낙엽들의 다갈색 평면에 큰 이질감을 선사했다. 장난감의 머리에 달린 체인은 자력은 아니었지만 결국 끊어낸 족쇄 같았고, 그 상황이 그리 달가워 보이지는 않았다. 이 장난감은 수진 씨다. 황량한 채색의 길거리에 홀로 서있는 원색 장난감은 자의든 타의든 그런 삶을 살아야 했다. 나도 비슷한 거 아닌가? 지금은 많이 힘들지만, 내 능력만 도로 찾는다면 나는 외롭기만 한 사람일 수 있지 않을까? 능력 없는 외로움은 한심함이 돼 버린다. 그러면 미워하지만 부정할 수 없는 내 일부분이 버려지는 꼴이다. 수진 씨는 나의 극복이다. 그녀는 내가 꿈꿔야 하는 미래상이다. 나와 다르지만 결국은 같은 아픔을 갖고 있는 사람이다! 슬슬 오른쪽 엄지가 아파오기 시작했다. 너무 버튼을 많이 눌렀다. 그건 희소식도 비소식도 아니다. 무소식이 아닐 뿐. 나는 가방에서 원고지와 필기구를 꺼냈다. 그녀의 이야기를 쓰고 싶다. 내가 발견한 이야기, 해석한 이야기, 앞으로 상상할 그녀의 이야기를 쓰고 싶다. 이게 얼마만인가! 30일? 50일? 날짜는 중요하지 않아. 최근에 글을 써보려고 시도한 횟수는 백 번은 족히 넘었을 테니까. 그녀의 남은 사진으로 자전적인 이야기를 쓰고 싶다. 남의 인생에 몰입해 그 편린을 전부 흡수하고 빈 부분에 나를 채워 넣고 싶다! 무례는 이미 범한 지 오래다. 일단 나부터 살고 보자.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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