네 번째 이야기
따사한 햇볕이 차가운 바닷바람과 함께 흔들리고 싶어 하는 모든 것들을 비웃고 있는 것 같았다. 적어도 나는 바람과 햇빛 없이도 이미 흔들리다 못해 휘청대고 있었다. 걔네가 날 위로해 주려는 마음도 전혀 보이지 않았다. 제주도 아래쪽에 위치한 송악산 둘레길은 내가 딱 원하는 만큼 한산했다. 사실 이번 여행은 오면 안 됐다. 가뜩이나 식비도 부족한데, 이래 가지고 새 카메라는 어떻게 사냐. 손 한 뼘보다 조금 더 큰 카메라 하나 때문에 이 지경까지 흘러왔다는 게 슬펐다. 어디서부터 꼬인 거지... 분명 난 밝고 열정적으로 살고 싶었고, 그렇게 살았는데.
학창 시절까지 부모님과 치명적은 마찰은 별로 없었다. 사진으로 나중에 뭐 먹고살 거냐는 핀잔을 자주 받았지만, 좋은 대학교를 가니 굳이 신경 쓰지 않았다. 부모님과는 아주 조금의 예술적인 유대도 쌓고 싶지 않았고, 그게 잘 안 이루어질 때만 불만이 싹을 텄다. 언제는 엄마가 시간이 남아서 혼자 영화를 봤는데, 그 영화가 너무 좋았다며 나도 꼭 보라고 했다. 문제는 그 영화를 보면 내가 사진을 공부하는데 유익할 거라며 첨언을 한 것이었다. 젊음의 소치였는지는 지금 판단해도 잘 모르겠지만, 난 그 말 때문에 지금도 그 영화를 보지 않았다. 보고 싶었던 영화였는데 부당하게 빼앗긴 느낌이었다. 고등학교 친구들은 뭐 재밌었다. 사진이나 영화는 하나도 몰랐지만 유쾌한 녀석들이었어. 그리고 좋은 피사체들이었다. 그거면 거의 모든 게 용서된다는 걸 대학교에 들어와서 알았다. 과 애들은 정말 실망스러웠다. 대화가 안 통했다. 걔네가 찍는 사진들은 구도 따위 신경 쓰지 않아. 때깔만 좋게 뽑아 sns에 어울리는 것들만 찍는 머저리들...
한 번은, 까막눈인 걔들도 내가 찍은 한 사진이 마음에 들었는지 따라한 적이 있었다. 비싼 중국 레스토랑에 가서 찍은 사진이었는데, 어떤 차였는지 종류는 기억 안 나고, 시퍼런 컵받침 위에 어두운 흰색 컵에 담긴 황갈색 차를 식전에 받았다. 나는 이 컵 바로 위에서 셔터를 눌렀다. 손잡이는 절반 밖에 나오지 않았고, 대리석 테이블의 불순물 섞인 밝은 흰색은 컵 색과 분명한 대조를 이뤘다. 그리고 뜨거운 차 때문에 렌즈에 김이 서렸고, 사선으로 번지는 빛들이 컵을 에워쌌다. 컵 안쪽 벽의 그림자 덕분에 황갈색 액체는 비친 천장 조명인 작은 원 하나를 왼쪽으로 품었다. 그 사진은 북적북적한 궤도를 가진 작은 태양 같았고, 내 눈은 그 광경을 카메라에 옮겨줬다. 동기 중 하나가 이 사진을 보고 멋대로 깊이 없는 감명을 받아서는, 투명 글라스크 위에서 똑같은 구도로 사진을 찍어 과제로 제출했다. 심심하기 그지없는 사진이었다. 내가 의도한 터치가 전부 사라졌으니까. 근데 눈이 침침한 주제에 사진학과에서 강의질을 하는 교수가 그놈 사진이 내 것보다 낫다고 했다. 내 건 너무 모호하다나 뭐라나. 그 이후로 과 동기들에게 절대 내 사진을 보여주지 않았고, 동기들 말에 대답도 안 했다. 원하는 대로 혼자가 됐다.
과에서 마음이 뜬 이후로 동아리 활동에 집중했다. 굉장히 매니악한 영화 동아리였다. 처음 동아리방에 들어갔을 때 본 벽은 압권이었다. 시대와 나라를 불문하고 각종 명작들의 원서 포스터들을 빼곡히 붙여 놨다. 그 불규칙적인 도배는 어떤 영화 포스터가 다른 영화 포스터에 가려지는 일이 잦았고, 자기들끼리 경합을 벌이는 것 같았다. 동아리 사람들은 그 황홀한 벽 인테리어랑 비슷한 느낌이었다. 내 고등학교 친구들이었으면 들어보지도 못했을 영화들을 즐겨봤고, 평가가 갈리면 시원하게 말로 뱉었다. 얘네가 영화를 많이 봐서 그런지 사진도 잘 찍었다. 구도 면에서는 과 애들보다 훨씬 유능한 사람들이었다. 내 사진을 보고 재밌다고 호들갑을 떨거나, 의도를 추측한 후 당당히 물어봤고, 나는 기쁨을 숨기며 짧은 프레젠테이션을 시작했다. 사람들이 술도 곧잘 먹어서 동방에서 밤을 새우는 경우가 잦았는데, 술에 쩔은 그들은 매우 창의적으로 잠에 들거나 꼬장을 부렸고, 모두 훌륭한 피사체였다.
그러나 이 관계도 사진 한 장으로 말끔히 부서졌다. 스크린 골프장에서 알바를 하다, 땅에 떨어진 지퍼를 주운 적이 있었다. 나는 그걸 바로 재활용 쓰레기통에 버리지 않고 카운터로 가져갔다. 검은색 바탕에 흰색 방울들이 톡톡 박힌 대리석 테이블 위에 지퍼를 올려놓고 빛의 대비를 극대화해서 찍었다. 그래서 몇몇 흰색 방울들은 자기들끼리 뭉쳐서 웅덩이처럼 커졌다. 그 이미지는 우주였다. 방울은 별이, 웅덩이는 은하가 되었고, 지퍼는 사진의 중심 약간 오른쪽에 가로로 누워있었다. 동아리 친구들 중 한 명은 사진을 보더니, 지퍼가 로켓 같은 거냐고 했다. 그때 나는 코웃음 치며 사진학에 대해 설명했다. 여러 가지 의미와 대상을 오브제에 부여하는 건 좋지만, 결국 그 오브제를 벗어나서는 안 된다고. 그러니 이 우주공간을 표류하는 지퍼를 로켓이라고 우기면 안 된다고 말이다. 그때 나는 흥분해서 친구들 반응도 살피지 않고 정답을 공개했다. 지퍼는 지퍼 그 자체다. 이미지 부여는 광활한 우주를 상상한 것에서 만족해도 된다. 그러면 이 지퍼는 무슨 역할을 가지냐? 바로 차원을 여는 열쇠다. 이 사진 속 지퍼는 보이지는 않지만 분명히 존재하는 새로운 시공간을 우리에게 선사하는 것이다. 여기까지 이해하면 알 수 있다. 왜 지퍼가 중심에서 오른쪽으로 치우쳐졌는지. 사진 만으로 볼 수는 없지만 이 지퍼는 열려 있다. 그 안쪽에 있는 별천지는 우리의 즐거운 상상력을 자극한다. 이렇게 설명했더니, 애들이 너무 작위적이고, 결국은 지나치다고 실망을 표했다.
사실 나는 예전부터 모종의 한계를 느꼈었다. 그 동아리는 예술을 향유하는 동아리지. 예술을 하는 동아리가 아니었다. 그 아무도 안 넘는 벽이 내 입장에서는 만지기 싫어도 만져지는, 보기 싫어도 눈앞을 가리는 무거운 안개 같았다. 영화를 볼 때도 작품성에 치중되는 경우가 많았다. 의도를 파악하려 하지를 않아... 예전에 엄청 염세적이고, 비관적인 작품들을 동아리 사람들과 본 적이 있었다. 성욕에 매몰된 여성이 자신의 음핵을 가위로 자르는 장면, 살인마 주인공이 냉동 창고에서 시체들로 이글루를 짓는 장면, 억울한 누명을 쓴 장애 여성이 아들 앞에서 교수형 당하는 장면은 확실히 만만치 않았다. 그 영화감독은 모든 영화를 그렇게 찍었고, 자기 예술의 방향성을 그쪽으로 아예 결정해 버린 사람이었다. 그렇지만 아름다웠다. 동아리 사람들도 이를 인정했지만, 감독의 가치관은 인정할 수 없다며 난색을 표했다. 인간 어두움의 극치를 통해 인간 자체를 사유하는 감독의 신념을 음침하고 위험한 것으로 치부했다.
아름다움을 느낀 주제에 뭘 거부하고 앉아있냐. 야한 동영상 같은 거 본 적 없다고 괜스레 숨기는 초등학교 남학생처럼 말이야. 그럼 내 사진은 무슨 이유로 거부한 거냐? 결국 문제의 사진이 공개된 날, 애들을 무시하며 일장연설을 늘어놓고 나가버렸다. 그 이후로 동아리방에 편하게 들어갈 수 없었다. 내가 들어가면 대화는 사각으로 빠지는 바퀴벌레처럼 자취를 빠르게 감췄고, 눈알들은 왔다 갔다 하며 서로를 살피기 바빴다. 마침 전공과제가 바빠졌고, 다시 혼자가 됐다.
혼자 있음은 돌고 돌아 자연스럽게 느끼게 되는 것이지만 횟수가 쌓일수록 노련해지긴커녕 더 괴로운 일 같다. 지금 내 곁에 머무는 바닷바람이 동물원 방문객마냥 날 쳐다보고 있는 것처럼 말이다. 과 애들과 섞이지 못하게 됐을 때부터 어느 정도 예상은 했지만, 결국 과공부마저 내 심기를 건드리기 시작했다. 사진학과 전공 필수 중에 깨알 같은 그림 수업이 있었다. 그 수업의 첫 과제가 신문지 한 장을 연필로 시커멓게 만들어 오는 것이었다. 그림의 기초인 선 연습을 한다는 취지였지만, 이딴 과제로는 제대로 된 선을 긋지도 못할뿐더러 그냥 시간 낭비에 불과했다. 나는 이 과제를 하면서 손에 주어야 하는 힘을 이빨에 주느라 연필 소리 대신 이 갈리는 소리가 더 크게 났다. 그 실실 쪼개던 교수의 얼굴을 오래된 육포로 생각하며 버텼다. 어느 날에는 마감이 촉박한 편집 과제를 하기 위해 카페를 갔었는데, 음료를 받아 들고 자리에 앉아 확인하니 콘센트가 테이프로 막혀 있었다. 카페에 너무 오래 있는 젊은이들을 겨냥한 사장님의 갸륵한 노력이었다. 그때부터 돈을 모으기 시작했기 때문에 진짜 빡돌았다. 한 모금 마신 음료를 갖다 버렸다.
나는 사진학과여서, 수업 도중에 다 같이 밖에 나가는 경우가 많았다. 이론을 20분 정도 설명하다 당장 찍으러 가자고 말이다. 날씨가 좋으면 좋은 대로 나갔고, 나쁘면 나쁘니까 나갔다. 한창 짜증이 쌓여 있을 때 교수님의 지시로 동기들이 강의실을 떠나기 시작했다. 나도 나가는 척하며 화장실에서 잠시 기다렸다가 다시 강의실로 돌아왔다. 그 순간의 빈 강의실을 찍어보고 싶었기 때문이다. 모든 수업이 끝난 늦은 저녁, 억지로 불을 켜고 본 강의실과는 온도가 다른 황량함을 만끽하며 사진을 찍고 있다가 교수님과 마주쳤다. 교수님은 미안하다며 자기 짐을 정리하고는 그냥 나가주셨다.
큰 위로를 얻은 나는 찍을 사진을 다 찍고 건물 밖으로 나갔다. 간만에 유쾌한 사진을 찍을 수 있을 것 같았다. 로케이션을 물색하다가 동기들 여럿을 관찰할 수 있었다. 봄날의 따사한 햇살과 아직 선선한 공기를 핑계 삼아 벤치에 앉아 놀고 있는 애들, 자기들 맘대로 일찍 수업을 끝내고 밥 먹으러 가는 애들, 무작정 셔터를 누르는 녀석과 그 녀석을 찍으며 꼬리 잡기를 하고 있는 애들. 답답하고 짜증 나는 애들이지만 그 날 만큼은 따뜻하게 바라볼 수 있었다. 그러다 한 녀석이 모르는 사람과 대화하는 꼴을 봤고, 거기서 내 위태로웠던 심지가 확실히 끊어졌다.
우리가 그때 한창 준비해야 했던 과제는 모델 사진이었다. 누가 됐든 본인이 아닌 사람 한 명을 찍어야 했다. 보통 동기들끼리 서로 모델을 서주거나, 발이 넓으면 자신의 컨셉에 맞는 적절한 인물을 섭외하기도 했다. 당시 나는 인간관계가 거의 단절됐고, 모르는 사람 대하는 것도 예전 같지 않아서 모델을 구하지 못하고 있었다. 근데 동기들 중 내가 가장 싫어하는 놈이 모르는 사람에게 사진 한 장 찍어도 되냐고 양해를 구하고는 몇 장 해치우더니 앞으로도 비슷한 과제 있으면 또 도와주면 안 되겠냐고 자신 있게 말했다. 그 자신감이 너무 눈꼴셨고, 원래는 내가 더 자신감 넘쳐야 하는데 그러지 못하는 자신의 모습에 울렁거리기 시작했다.
그러다 불현듯 저번 주에 찍은 사진이 떠올랐다. 밤에 공원을 산책하다 내 그림자에 영감을 받아서 찍은 사진이었다. 검은색 형체를 온전히 담기 위해 오른손에 카메라를 들고 쭉 뻗었고, 거기에 집중하느라 왼손은 약하디 약한 지렁이처럼 오므려 버렸다. 사진에 찍힌 그림자의 오른쪽 손 부분은 카메라 때문에 뻗은 팔에서 뭉툭 튀어나왔다. 푸른 채소를 왕창 먹고 주먹이 커진 어느 미국 애니메이션의 싸움꾼처럼 말이다. 그 모습이 우스웠지만 재밌어서 마음에 들었는데, 다시 그 사진을 떠올려보니 그 이미지에 연관된 내 모든 일부분이 너무 추했다. 그날, 고민하던 자퇴를 결심했다. 생각보다 간단했던 수속을 처리하고 받은 자퇴 원서를 찍은 사진은 대학교 합격증 사진과 별반 다르지 않았다. 되려 쾌감은 자퇴 원서 쪽이 더 강렬했다.
평소 대화가 잘 통하지 않았던 부모님이지만 자퇴 사실을 숨기고 싶지는 않았다. 아마 이때가 가장 치열했던 최후의 호승심이었을 것이다. 부모님은 예상대로 길길이 화를 내셨다. 대체 너는 애가 왜 그러냐며, 내 결정을 무시무시한 젊음의 헛발질로 취급하며 소리를 질렀다. 이 날이 내가 처음으로 요리 외의 용도로 칼을 잡아본 날이었다. 부모님의 분노는 솔직히 자식으로서 크게 할 말은 없었지만, 부모님의 안 쪽 표정이 너무 차분한 게 정말 짜증 났다. 무슨 길고 좆같았던 문제 하나를 드디어 치운 느낌? 짜증 안 쪽에 숨기지 못한 후련함이 보였다.
자기들이 계획하고 기획했던 자식농사를 정반대의 결과였지만 겨우 졸업한 것처럼 느끼는 것 같았다. 나는 그 영혼의 단편을 카메라에 담고 싶었다. 그래서 카메라를 들었고, 아빠는 역시 미친년이라며 더 욕을 해댔고, 엄마는 빨리 카메라 치우라고 손가락질했다. 셔터를 누른 뒤 아무런 대꾸도 하지 않고 방에서 나갔다. 아무 생각이 없었다, 그냥 눈 떠보니 부엌이었다. 나는 낯설게 움켜잡은 식칼로 부모님을 찌르려 했는지, 들고 소리치려 했는지 잘 모르겠다. 어떤 행동이 됐든 그전에 그게 부질없다는 걸 깨달았고, 이번엔 칼을 들고 있는 모습을 일인칭으로 찍었다. 웬만한 종군 기자도 그 사진보다 날카로운 사진을 찍지는 못했을 것이다.
칼을 부여잡고 있는 왼손은 엄지손톱 바로 아래까지만 담겼다. 만약 칼자루가 담길 만큼 앵글이 내려갔다면 그 사진은 애들 장난처럼 보였을 것이다. 와중에 사진 오른편에 담긴 손세정제도 정말 훌륭한 오브제였다. 자기 늙은 나이 눈치 보느라 안간힘 쓰며 예민함을 연기하는 엄마가 테이블에 올려놓은 것이었다. 덕분에 들고 있는 칼로 찢어버리고 싶은 게 손세정제 같다는 해석도 할 수 있었고, 그 적당히 가벼운 시선은 분명 필요한 것이었다. 어쨌든 내가 이 날 칼을 잡았다는 사실이 너무 충격이었고, 독립한 이후에도 한동안 칼을 못 썼다. 요리는 원룸에 들어간 지 반년 정도 지난 뒤에야 할 수 있었다. 그것도 칼은 안 쓰는, 대파 하나 없는 계란말이였지만. 부모님이 그날 내가 칼을 쥔 순간을 보지 못해서 다행이었다. 봤다면 분명 자기들이 숨겼다고 착각한 후련함이 배가 됐을 테니까.
독립을 선언한 이후로 여러 일을 했다. 해보고 싶었던 히피 펌에 도전했다. 약물을 말리느라 작은 수건으로 이마 위쪽을 동여매고, 다른 수건으로 귀 쪽을 덮으니 무슨 중동 패션 같았다. 캐주얼하려고 안간힘 쓰는 히잡 같기도 한 내 모습을 헤어 디자이너님께 찍어달라고 부탁드렸는데, 그 사진은 수평이 심하게 안 맞았다. 그래도 내 날카로운 표정과 이국적인 착장에 걸맞은 반항스러운 이미지가 연출돼 마음에 들었다.
알바는 물류센터 위주로 했다. 처음엔 시급 때문이었지만 퇴근 시간 이후에 사람이 없는 공장 배경에 중독됐다. 자기 몸을 늘렸다 줄였다 하며 우리를 채찍질하던 컨베이어 벨트는 코도 안 골며 자고 있었고, 미처 옮기지 못한 소품종 택배는 어시장에서 버려진 몇 마리 생선 같았다. 테이블 곳곳에 널브러진 바코드 스캔 건은 사냥꾼이 몇 시간 이내로 오겠지만 여유를 즐기는 철새처럼 다소곳이 누워 있었다. 퇴근시간에서 15분 정도만 기다리면 그 광경들을 볼 수 있었다. 고된 일이었지만 그 배경을 사진으로 담다 보면 내가 산타의 조수가 된 것 같았고, 결재 사항을 직접 확인하러 온 장난감 회사의 대표가 된 것 같기도 했다.
사진 일도 가리지 않고 했다. 그중 하나가 셀프 스튜디오 진행을 돕는 일이었는데, 학생들 세, 네 명이 와서는 30분 동안 마음대로 원격 셔터를 누르며 재밌는 포즈를 많이 취했다. 한 학생이 굳이 셔터를 카메라에 향하지 않아도 셔터가 반응한다는 걸 발견한 뒤로, 싸구려 첩보영화 주인공처럼 사방, 위아래에 있는 적들을 쏴 죽이는 모습은 인상 깊었다.
바쁜 와중에도 외로움은 언제나 널널했다. 출퇴근길, 월세가 계좌에서 빠져나간 직후, 저녁 메뉴 고민을 시작하고 결정하기 전에 중간 즈음, 엄습하는 불안감은 중독적이었지만 역시 괴로웠다. 언제는 낮에 공원을 산책하다 엄청 인상이 험한 가로등을 만났다. 햇빛이 강하진 않았지만 그래도 밝은 날이었는데, 역광을 제대로 맞아서 시커멓게 보였다. 무슨 소프트한 현대미술 작품 같았다. 괜히 옆에 있는 나무들도 눈치를 보고 있더라. 술자리에서 기분 잡친 걸 숨기지 못하는 순수한 사람 같았고, 자기 외로움을 감당하기 힘들어하는 것 같았다. 이를 온전히 카메라에 담고 싶었는데, 찍은 사진을 확인하니 내가 목격한 칠흑 같은 어둠은 아니었다. 약간 빛이 들어갔는지, 가로등의 세밀한 윤곽을 어렴풋이 확인할 수 있었다. 거기 난입한 한 움큼의 빛은 내가 그때 존경을 표한 가로등에 대한 모욕이었다.
서서 잡생각을 너무 많이 했다. 다리가 후들후들 떨렸다. 벤치에 앉아 뻐근해진 목을 풀며 하늘을 봤는데, 구름 한 점 없이 완벽한 단색이길래 급하게 찍었다. 사진이라기보다는 편집 프로그램에서 무료로 내놓는 배경 이미지 같았다. 철저하게 깨끗하지만 그렇다고 아름다운 가을 하늘도 아닌 이 애매하게 푸른색은 엄청난 위로가 됐다. 송악산은 나를 위로하지 않았지만 송악산의 상사는 나를 생각해줬나 보다.
이번 여행은 아마 무미건조할 것이다. 서울행 비행기도 특색이라고는 없을 것이다. 그거면 충분하다. 서울로 돌아가면 이제 뭐가 됐든 제대로 준비할 것이다. 예술 때문에 멀쩡한 성격 버리고, 돈도 쪼달리지만 뭐 어쩌겠어. 나를 사랑해 주는 건 내가 사랑하는 내 습관 정도밖에 없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