끄적끄적 생각일기
중요한 일에 타이밍이 딱딱 잘 맞는 사람을 보면 부러웠다.
성적은 낮게 나왔지만 상향지원한 과가 미달이 나서 덜컥 합격한 사람
별 노력을 안 하는 것 같았는데 승진이 빠른 사람
그냥 집을 샀는데 호재가 생겨 집 값이 엄청 오른 사람들을 보면
하늘에 대고 나도 인생 좀 쉽게 풀릴 수 있게 해달라고
운수 좋은 날 좀 많이 많이 생기게 해달라고 구걸 같은 원망을 하곤 했다.
그런 푸념들이 하늘에 닿았던지
오늘 하루는 소소하게나마 타이밍이 아주 잘 맞는 날이었다.
#1 운수 좋은 날 오전 9시에서 10시 사이
짜증을 내던 아기에게 연고를 쥐여줘서 관심을 돌리게 하고 후딱 기저귀를 새것으로 바꾸어줬다. 다시 휙-하고 연고를 아가 손에서 뺏으니 아가가 울어버린다. 생각해 보니 내 일 다 보았다고 후딱 연고를 빼앗아 버린 것이 미안했고, 아기를 충분히 기다려주자는 마음으로 다른 집안일을 하기 시작했다. 마침 옷장 정리가 하고 싶어서 외투를 꺼내다 왼쪽에 끼고 있던 무선이어폰이 옷장 밑으로 덱데굴 굴러가 버렸다. 손이 안 닿는 곳에 깊숙이 들어갔을까 봐 재빨리 바짝 엎드렸고 나는 행복한 비명을 질렀다.
몇 달 동안 잃어버린 줄만 알았던 오른쪽 이어폰이 “오랜만이야” 하고 나를 맞이했다. 남편에게 신나서 문자를 보냈고, 육아 스트레스도 단 숨에 날아가 버릴 정도로 기뻤다. 아싸!
그리고 생각해 보니 아기가 연고를 가지고 놀게 기다려 주지 않았다면,
오른쪽 이어폰을 언젠가 찾을 수 있지 않을까? 막연히 기다리지 않았다면,
필연 같기도 한 우연의 현장을 목격하지 못했을 것이다.
기다리면 언젠가 좋은 날은 오는구나!
#2 운수 좋은 날 오후 1시에서 2시 사이
며칠 전 아기 점퍼를 주문했던 쇼핑몰에서 전화가 왔다. 쇼핑몰 직원이 재고가 3개밖에 없는데 5명이 결제를 해서 주문한 제품을 구매할 수 없다는 통보였다. 육아를 끝내고 늦은 밤에 졸린 눈을 비벼가며 고민해서 고른 점퍼였다. 재고 5개, 품절 임박이라는 멘트를 보고 결제를 했것만 이해할 수 없는 통보에 속이 부글부글 끓었다. 왜 하필 나야? 하며 속상해하던 찰나, 곧이어 직원이 제안을 한다. “8개월 아기에게는 매우 크겠지만 4세 사이즈는 재고가 있는데요......” 아기가 큰 편이라 크게 주문하자고 해서 3세 사이즈를 주문했는데 고민이 되었다. 직원과 여러 차례 대화가 오가고 나는 4세 사이즈를 대범하게? 주문해 버렸다.
그리고 오늘 택배가 왔다. '엄청 크겠지? 지금 입히고 싶은데 못 입히겠지?' 걱정을 하며 택배 상자를 열어보았을 때 너무 기뻐서 소리를 질렀다. 4세용이라고 쓰여있었지만 사이즈가 작게 나와 딱 원하는 사이즈였다. 사진보다 훨씬 예쁘고 잘 만들어진 점퍼였다. 아기가 겨울에 따뜻한 점퍼를 입고 눈을 만지는 모습을 상상하니 뿌듯했다. 오늘 완전 운이 좋은데?
왜 운이 좋았을까? 곰곰이 생각해 보았다. 옷에 대한 나의 안목을 믿었고, '사이즈 선택에 실패해도 괜찮아'하는 마음으로 주문을 취소하지 않았던 것 같다. 다음에 결과가 불투명해서 할지 말지 고민이 되는 일이 생기면, ‘실패에 대한 너그러운 마음’과 ‘자기 확신’이 충분한지 자기점검을 해보고 도전해보려고 한다.
#3 운수 좋은 날 늦은 오후~저녁 사이
출산 후에 갑작스럽게 온몸에 번진 두드러기 때문에 요즘 피부과를 다닌다. 일찍 퇴근한 남편에게 육아 바통터치를 하고 역으로 갔다. 역까지 가서야 달랑 핸드폰과 이어폰만 가지고 나왔다는 걸 알았다. 왔다 갔다 하면 30~40분 지연되고 체력도 고갈되는지라 난감했다. 순간 뇌리를 스쳐가는 말 '위기는 기회이다! 셀프치료하자' 피부과 진료를 허탕치고 돌아가는 나의 발걸음은 너무나 설렜다. 3시간의 일탈시간 동안 (물론 남편에게는 비밀이지만) 하고 싶었던 일들을 해보기로 했다.
출산 전에 자주 갔었던 동네 파스타 집으로 망설임 없이 갔다. 직원이 메뉴판을 테이블에 놓기도 전에 “뇨끼 약간 맵게 하나 주세요. 그리고 아메리카노 따뜻한 거 한잔 미리 주세요.” 항상 하던 주문인데 주문만으로 행복하다. 브런치앱을 켜고 좋아하는 작가의 글들을 한 줄 한 줄 음미하며 이 시간을 즐겼다. 맛있게 뇨끼를 먹고 나서 내게 남은 시간을 대충 계산해 보았다. 1시간 정도 더 놀 수 있을 것 같아, 동네에 가보고 싶었던 곳들 구경했다. ‘새로 생긴 빵집은 장사가 안 되네, LP펍은 항상 분위기가 좋구나, 저기 황금잉어빵 가게 줄이 기네 어떻게 생겼나, 여기 괜찮은 토분집이 있었네. 가격 봐두고 남편이랑 사러 와야지.’ 이런저런 동네구경을 하고 마지막 30분은 단골 카페에서 생강라테를 마시며 마무리하기로 했다. 따뜻한 라테를 마시며 예쁜 카페의 모습들을 폰에 담았다.
일탈시간 동안 행복해서 풍선처럼 둥실둥실 동네를 떠다녔다. 셀프치료 덕분인지 그날은 약을 먹지 않았는데도 두드러기가 거의 나지 않았다. 내 몸은 3시간의 자유를 너무나 원하고 있었던 것 같다. 집에 돌아가면서 생각해 보았다. 오늘처럼 위기를 기회로 보는 유연함을 가졌었다면, 내 인생에 운수 좋은 날이 더 많이 있지 않았을까? 이래저래 소소하게 운이 참 좋았던 하루였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