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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담도 Jan 26. 2023

가족을 떠났습니다

프롤로그: 이야기에 들어가며



“엄마가 맏이를 안 해봐서 이해를 못 하는 거잖아!”

“말 잘했다. 니가 동생을 안 해봐서 이해를 못 하는 거지!!”

“아, 진짜 엄마는 ‘아, 그렇구나~’를 한번 안 해!!”


숨이 막혔습니다. 엄마의 말이 딸을 뒤로 끌어당겨 엄마가 있는 곳에 내 팔과 다리를 사슬로 묶어 꼭두각시 신세로 만들어 버리려는 듯하였습니다. 늘 당신의 옳음을, 나이에서 오는 권위를 들이밀어 딸의 말을 단 한 번 수용해주지 않는 엄마에게 지쳤습니다. 무슨 말을 해도 흡수되지 못한 채 튕겨져 돌아오는 대화라 할 수 없는 대화에서 힘이 빠졌습니다. 그렇게 딸은 가족의 울타리에서 소리 없이 걸어 나갔습니다.




딸은 평범한 사람입니다. 평범하게 대한민국의 정규 교육과정을 밟고, 평범하게 학교를 졸업한 후 취업이라는 절차를 밟은 평범한 대한민국 국민입니다. 아침에 사무실에 출근하여 내 맘 같지 않은 상사의 모습에 씩씩거리던 평범한 월급쟁이였습니다. 중산층의 소득으로 보고 싶은 공연도 보고, 가고 싶은 곳도 여행하고, 책도 좀 즐겨 읽으면서 나름 문화생활을 향유하던 소시민이었습니다. 주식시장이 활황이면 나도 수익금을 조금 벌어보겠다며 모은 돈을 투자하는 개미투자자였고, 어버이날 부모님께 식사를 대접하는 평범한 서민 가정의 장녀입니다. 사회에 크게 해악이 되지도 큰 보탬이 되지도 않던 성실하고 평범한 대한민국의 30대 청년이었습니다.


삼남매의 맏딸로 태어나 꼬물거리는 귀여운 동생을 귀여운 만큼 숨이 막히게 안아주는 건 본능이었고, 엄마 힘들까봐 말을 줄이고 동생들을 다독이는 건 맏이의 위치에서 학습된 역할이었습니다. 어려서 피아노를 좋아했지만, 피아노를 전공하려면 집이 네 채 있어야 한다는 부모 말에 기꺼이 피아노를 포기하였고, 부모의 관심과 칭찬이 받고 싶어서 학교에서 잘한 일만 쏙쏙 골라 말하던, 온갖 집안일에는 태평양 같은 오지랖으로 문제해결의 중심에 서려던 책임감에 중독된 장녀였습니다.

책임감 중독으로 딸의 몸을 서서히 망가졌습니다. 참여 중이던 프로젝트 워크숍 약속을 지키기 위해 피곤하고 아픈 몸을 경시하였습니다. 몸의 신호를 무시한 대가는 약속을 지키지 못하는 대가보다 훨씬 컸습니다. 몸은 평소 아무렇지 않게 하던 일을 버거워했습니다. 가벼운 산책도, 즐거운 독서도. 그리고 몸이 멈추자 마음도 따라 멈추더군요.


삶의 끝을 말하기엔 건방진 청춘이지만, 어리광을 부리기에도 민망한 길이의 삶을 살아온 딸은 늘 에너지가 넘치는 사람이었습니다. 하고 싶은 일도, 해야 하는 일도 많은 욕심쟁이었고, 보고 싶은 사람도 챙겨야 할 사람도 가득한 정 넘치는 사람이었죠. 그런데 멈춘 몸과 마음에는 어딘가 큰 구멍이 뚫려 그 모든 것이 한꺼번에 빠져나가 버린 것만 같았습니다. 모든 것이 빠져나가 버려 축 늘어진 저의 몸은 모든 것을 거부하기 시작했습니다. 기본적인 사회생활 예의도, 책임도, 의무도. 그래서 처음으로 머리가 아닌 마음의 소리를 따르기로 하였습니다. 이는 용기가 아닌 살기 위한 궁여지책이었습니다.


마음이 원하는 대로 도시를 떠나 자연 가까이서 시간을 보내고, 돈벌이를 떠나 예술을 가까이하며 시간을 보냈습니다. 내 마음을 존중하고 감각에 집중하자 그동안 가득 찬 에너지 때문에 들어오지 못했던 생각, 시각, 감각이 들어와 저를 서서히 일깨우기 시작했습니다. 내가 얼마나 ‘해야한다’에 집착하며 살고 있었는지, 내가 얼마나 나보다 남을 우선시해 왔는지, 내가 얼마나 지금 이 순간을 놓치며 살고 있었는지… 그렇게 2년이 지났습니다.


마음과 함께 한 시간은 마법 같았습니다. 그렇게 숱하게 읽던 책에서 내로라하는 전문가들이 조곤조곤 풀어 설명해 줘도 잘 이해가 되지 않던 것들이 내 마음이 소곤소곤 설명해 주자 완벽히 이해되기 시작하였습니다. 내 자식처럼 여기던 동생들과 그 누구보다 이해받고 싶고, 수용받고 싶은 부모 사이에서 장녀로서 끊임없는 요구를 받으며 자책만 반복하던 내 자아의 실체가 눈에 들어왔습니다. 수용받지 못한 자아가 어떻게 사랑을 폭력으로 변질시키고 있었는지 깨달았습니다. 가만히 들여다보며 마침내 수용해 낸 자신의 내면에 얼마나 풍부한 사랑의 화수분이 존재하고 있었는지를 머리가 아닌 가슴과 온몸으로 이해하게 되었습니다.

이 이야기는 지난 1년반의 여정입니다. 당연한 줄 알았던 것에 새롭게 눈을 뜨고, 들여다볼 생각도 하지 않은 것이 덮개를 젖히고 자신을 알아달라 제 앞에 나타났습니다. 그렇게 자신도 모르고 있던 자신을 마주하면서 그토록 원하고 갈구하던 사랑의 답을 비로소 찾아낸, 그 무엇과도 바꿀 수 없는 지난 2년의 여정입니다.




천문학 고전으로 유명한 ‘코스모스’에서 저자 칼 세이건은 말합니다. 우리 인간의 몸은 우주의 먼지 입자로 구성되어 있어, 우주 그 자체이며, 동시에 우주의 일부라고. 그리고 이렇게 덧붙이지요. 서로 몇 광년씩 떨어져 있어서 사실상 고립되어 있는 각각의 별과 행성에서 화학적 반응으로 인해 생명체가 탄생할 가능성은 극히 희박하다고. 그래서 이 지구라는 행성과 이 행성에 넘쳐나는 생명은 특별하고 소중하다고.


내 마음과 오붓하게 보내는 시간은 한 인간으로서 자신의 우주적 존재를 통감하는 기회이자, 희박한 가능성의 결과로 태어난 ‘나’라는 존재의 고귀함을 깨닫는 인생의 가장 중요한 과제이기도 하다는 말로 바꾸어 설명해 볼 수도 있겠습니다. 내 안의 우주를 느끼며, 제 마음을 옭아매고 있던 자책, 죄책감, 미숙함을 제 우주에 반짝이는 별의 먼지와 버무려, 마치 조개가 진주를 만들어내듯 제 안에 단단하게 보석을 형성한 시간이 되었습니다. 누군가에게는 이 2년의 여정이 언감생심일 수도 있고, 누군가에게는 스스로 용기를 낼 동기요인이 될 수도 있겠지만, 이 글을 읽는 독자 여러분이 인생의 어느 시점에 있든, 자신 안에 우주를 들여다보고 자신의 빛을 드러내기 시작하는 계기가 되었으면 하는 마음으로 부끄럽지만 제 이야기를 풀어보려고 합니다.


이미 당신 안에 별이 반짝이고 있음을 알고 있으니까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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