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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뮤뮤 Apr 10. 2024

내 생애 가장 빨리 달렸던 순간은

당신은 언제인가요

산을 다니다 보면 가끔  넘어지는 등산객을 보게 된다. 미처 보지 못한 돌부리에 걸리거나, 눈비로 미끄러워진 흙길에서 중심을 잡지 못한 경우이다. 2년 간 대여섯 명을 보았는데 전부 할아버지였다. 내가 본 대여섯 명으로 통계까지 낼 수는 없겠지만 확률적으로 할머니들의 조심성이 더 높을 것 같다.



초반에 넘어진 할아버지를 보았을 때 나는 “어머!”와 “앗!”의 중간쯤인 “어맛!” 소리를 내며 깜짝 놀라곤 했다. 어디 크게 다치셨을까 싶어 넘어져 있는 할아버지께 서둘러 달려가보았다. 하지만 모두 나의 도움을 거절했다.



제일 처음의 정황은 이러하다. 가을이 깊어가던 10월의 어느 날, 나는 산길을 올라가고 있었고 맞은편에서 한 할아버님이 내려오시던 중이었다. 당시 나는 흙길로, 할아버지는 낙엽이 쌓인 곳으로 내려오고 있었는데 그쪽 길이 더 나을까 싶어서 할아버지 쪽을 잠시 쳐다보았다.



그런데 할아버님이 순간 휘청하며 균형을 잃는가 싶더니 뒤로 넘어지시면서 엉덩방아를 쿵 찧고 말았다. 내가 어맛 소리를 내며 할아버지 쪽으로 달려가는 중에 할아버지는 놀라운 속도로 벌떡 일어나셨다. 좀 전에 산길을 주춤거리며 내려오는 그 몸놀림이 아니었다. 그리고는 “길이 미끄럽네” 라며, 혼잣말 치고는 꽤 큰 소리로, 중얼거리시고는 그 길로 휘리릭 산 길을 내려가셨고 나는 멀어지는 할아버지 뒷모습을 멍하니 보다가 내 길을 갔었다.



그렇게 비슷한 일이 대여섯 번 반복되었다. 넘어지자마자 힘차게 벌떡 일어나셨고, 미끄럽다는 말을 꼭 남기고는 내가 다가가기 전에 줄행랑을 치셨다. 마치 넘어진 이유가 본인의 하체가 부실해서가 아니고, 미끄러운 길 때문이라는 정보를 알려주기라도 하듯이 말이다. 뭐지 싶었다가 아주 나중에서야 깨달았다. 창피하셨던 것이다.



젊은 여자(적지 않은 나이지만 등산객치고는 젊은 편) 앞에서 넘어지는 모습을 보여준 게 민망하셨던 것이다. 여섯 번 째쯤 이런 장면이 반복되서야 나는 그 이유를 알아차렸고  이후로는 넘어지는 할아버지를 보아도, 크게 다치지 않은 것 같으면 짐짓 못 본 척 딴청을 하며 지나간다.  




사실은 나도 그런 경험이 있는 게, 스물다섯 쯤인가였다. 버스에서 내리는데 누가 내 뒤를 확 잡는다는 생각이 들었다. 고개를 돌릴 새도 없었다. 그 힘을 느끼는 순간, 갑자기 사라지는 바람에 그 반동으로 나는 고꾸라지고 말았다. 정신을 차렸을 때는 이미 길바닥에 대자로 넘어진 상태였다.


이게 무슨 일인가 싶어 고개를 돌려보니 버스 창가에 있던 사람들과 문가에 서있던 사람들이 멍한 얼굴로 나를 내려다보고 있었다. 그리고 문 한가운데 서있는 남자와 눈이 마주쳤다. 그의 얼굴에는 당혹스러움이 가득했다.


그때 나는 발목까지 오는 긴치마를 입고 있었는데, 내 뒤를 따라 내리던 그 남자가 계단 위에 끌리던 내 치마를 순간 밟아버린 것이다. 치마가 밟히는 순간 나는 그 힘에 뒤로 휘청거렸고, 그 남자가 얼른 발을 떼자 그 반동으로 앞으로 넘어졌던 것.


그렇게 바닥에 뻗은 것만 해도 창피한 일인데 치마가 고무밴딩이었던 게 일을 키웠다. 치마 허릿단이 아래로 벗겨지고 만 것이다. 아직 볼살도 다 안 빠진 이십 대 아가씨의 엉덩이가 대낮에 만천하에 드러났다. 승객들도 넘어진 나도 몇 초간을 멍하니 있다가 남자가 부랴부랴 나한테 오는 모습을 보고서야 정신이 들었다.


아픔을 느낄 겨를도 없이 벌떡 일어났다. 오로지 그 자리를 빨리 떠야 한다는 생각밖에 없었다. 손바닥에 흙모래가 박히고 무릎에 피가 베인 것은 집에 도착하고 나서야 알아차린 일이었다. 나는 남자가 나에게 오기 전까지 빠르게 치마를 추켜 올리고는 전력을 다해 달리기 시작했다. “괜찮아요?(많이 놀랬죠?)“가 등 뒤에서 메아리쳤지만 절대로 돌아보지 않았다. "달려!"라는 단어만 머릿속에 가득했다.


안타까웠던 것은 내가 정신없이 내달린 방향이 버스가 진행하는 방향이었던 것이다. 나란히 달리는 버스를 흘깃거리면서 나는 더욱 전속력으로 달렸다. 어떻게든 사람들의 시선에서 벗어나야 했다. 숨이 막히고 심장이 터질 것 같아도 있는 힘을 다해 뛰고 또 뛰었다. 오로지 달려야 한다는 일념뿐이었다.


사람이 위기에 봉착하면 기적 같은 힘이 난다고 한다. 차에 치일 뻔한 아이를 빛의 속도로 구하는 어느 엄마의 스토리 같은 것 말이다. 하필 그 순간 기적 같은 힘이 신처럼 내렸고 나는 평소에는 도저히 낼 수 없는 엄청난 속도를 내는 바람에 한동안 버스와 나란히 달릴 수 있었다.

 

드디어 숨이 턱에 찬 내가 발이 느려지면서 버스가 나를 추월하여 유유히 떠나는 순간, 승객들은 고개를 꺾어가며 나를 내려다보았다. 어쩌냐 싶은 얼굴도 있었고 알 수 없는 미소를 지은 얼굴도 있었다. 버스가 페이드 아웃 되면서 정신이 들었다. 어찌나 달렸는지 뱃속에서부터 헛구역질이 올라왔다. 차라리 달리지 않는 게 더 나았을 거라는 깨달음이 왔을 때는 눈에서도 땀이 났다. 아마도 내 삶에서 가장 빨리 달렸던 순간이 아닐까 싶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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