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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뮤뮤 Apr 24. 2024

단골카페 사장님의 라테아트에 관한 단상

오랜만에 놀러 오신 엄마를 모시고 옆동네 카페거리로 마실을 나갔다. 오후 4시, 커피를 마시기에는 늦은 시간이다. 이 시간에 커피를 마시면 엄마도 나도 잠을 자지 못한다. 라테를 너무 사랑하는 나이지만 잠 못 이루는 고통에 빠지고 싶지는 않아서 생강라테를 주문했고, 엄마는 밤을 새울 각오를 하고 라테를 주문한다. 아마도 엄마는 높은 확률로 새벽 4시까지 잠이 오지 않을 것이다. 앞으로 닥칠 험준한 시간을 알면서도 지금의 행복에 몸을 던지고야 마는 것, 커피는 사랑을 닮았다.


나는 커피가 아니어서 아쉬운 마음으로 생강라테를 홀짝이고, 엄마는 약탕을 마시 듯 커다란 커피잔을 양손으로 받쳐 드신다. 로제타(입모양의 패턴)가 커피잔 가득 수놓아져 있다. 잎모양의 결이 세밀하게 표현되어 있는 멋진 라테아트이다. 별말 없는 테이블이지만, 각자의 행복에 심취해 있는 시간, 문득 이쪽으로 이사 오기 전 동네의 단골카페가 생각났다.  그 카페 사장님의 라테아트는 정말이지…




먼저 살던 동네는 구시가지로 터줏대감처럼 자리 잡은 오래된 상점들이 많은 곳이었다. 가을의 어느 날, 낡고 빛바랜 가게들 사이로 세련된 느낌의 새 카페 하나가 들어왔다. 원목 테이블과 의자가 고급스러워 보였고,  테이블 바 안쪽을 차지한 반짝반짝 빛나는 대형 커피머신에서는 이 동네에서 제일 맛있는 커피를 뽑아낼 것만 같았다.


 오픈일이면 새 카페의 분위기에 심취하게 될 줄 알았는데, 카페는 쉽사리 문을 열어주지 않았다. 인테리어가 끝났는데도 시범기간을 2주간 가진 후 오픈한다며 내내 커튼을 내리고 있었다. 얼마나 맛있는 커피를 만들기에, 카페 앞을 오갈 때마다 커튼이 내려진 카페를 기대감에 찬 눈으로 잠깐씩 바라보고는 했는데 아차 하는 사이에 오픈일을 놓치고 말았다. 퍼뜩 생각이 나서 찾았을 때는 또 커튼이 내려져 있었고, 또 다른 공지가 문에 붙어 있었다.


"3일간의 시범운영 기간 동안 찾아주셔서 감사합니다. 운영기간 동안 부족했던 점을 보완해 1주일 후 문을 열겠습니다."


거참, 커피맛 한번 보기 되게 어렵네. 최상의 서비스와 맛으로 승부를 봐야 하는 호텔도 아니고, 한남동처럼 땅값 비싼 곳도 아닌데 뭘 이렇게까지. 빨리 그 집 커피맛을 보고 싶은 커피 애호가는 애가 닳은 나머지 짜증이 날 지경이었다.


그러나 주인장이 그만큼 공을 들이겠다는데 어쩌겠는가. 드디어 카페가 커튼을 열어젖힌 날, 명품 오픈런 못지않게 아침부터 달려가서 라테를 주문했다. 동네 물가치고는 다소 비싼 가격. 일반적으로 나오는 시간보다 훨씬 더 오랜 시간이 지나서야 사장님은 라테를 들고 나타났다. 마치 캐비어와 송로버섯을 곁들인 푸아그라를 내놓듯, 조심스럽고도 정중한 자세로 내 앞에 라테를 올려놓았고 드디어 3주 만에 아 기다리고 기다리던 커피를 영접하는 순간 나는 ‘응? 이게 뭐지?’라고 속으로 묻지 않을 수 없었다.


처음 보는 라테아트였다. 튤립일까 하트일까, 아무래도 튤립에 가까운 모양인 거 같았다. 라테아트로 튤립모양은 처음이었다. 라테아트를 중요하게 여기는 편은 아니지만 좀 투박한 아트이다 싶었다. 아무튼 맛만 좋으면 되지 뭐. 입에 대는 순간, 두 번째 응?


커피가 내 입맛에는 많이 쓴 편이었었다. 연하게 해달라고 주문했는데도 이렇게 진하다니, 무엇보다 거품이 부드럽지 않았다. 폭신하면서도 쫀쫀한 거품을 좋아하는데, 거품 입자가 좀 큰 느낌이었다.


아니, 3주 동안 뭘...


실망이 이만저만이 아니었으나 그 카페를 계속 찾게 되었다. 몇 년 전부터 카페인에 약해져서 아침에 마셔도  저녁잠을 이루지 못하게 되고, 라테에 들어간 어떤 우유는 탈을 나게 했다. 그런데 그 집 커피는 그런 증상이 나타나지 않았던 것이다.


그렇게 그 카페에서 조용한 행복을 누리는 사이 사장님의 튤립 라테 아트는 조금씩 모양이 변했는데 3개월쯤 되었을까, 어느 날 나는 그게 튤립이 아니라 하트였다는 사실을 알게 되었다. 처음부터 하트였던 것이다. 이후로 여기 이사오기까지 반년 간 더 카페를 드나들었고 사장님은 라테아트로 주구장창 하트만 내놓았는데 참으로 한결같았다. 커피맛도 우유크림 정도도 그랬다.




그 카페 사장님이 보기에도 똥손일 거 같은 이미지이면 그럴 줄 알았다 싶을는지도 모르는데 그 반대였다. 뭐랄까, 독립영화의 주인공 같은 분위기가 있었다. 온화해 보이지만 결정적인 순간에 자신만의 심지를 멋지게 내보일 것 같은, 세상에 흔들리지 않는 자신만의 아우라가 있는 그런 사람. 아, 영화배우 이제훈 같은 분위기 말이다. 그런 진지한 얼굴로 이런 하트를 만들어 내는 거다.  



보석 세공이라도 하고 있는 것처럼 한껏 쭈그리고 라테아트에 한참을 몰두하는 사장님을 물끄러미 바라보다가 나는 알아채고 말았다. 사장님이 내 과라는 걸. 안 그럴 거 같은데 그런 사람 말이다.


되게 꼼꼼하고 치밀할 거 같은데 알고 보면 허당지분이 꽤 큰 사람. 뭐 하나를 배우고 이루어 내는데 유난히 시간이 오래 걸리는 사람. 자기도 그걸 알아서, 답답해 죽겠어서 손 떼고 싶은데,  또 그거는 쉽게 안 되는 사람. 그래서 끝까지 꾸역꾸역 해보는 사람.


시간의 흐름과 함께 성장하는 것 또한 당연시되지만 그게 꼭 그렇지 않은 사람도 있다. 바로 나처럼…. 세상은 절대 기다려 주지 않기 때문에 나는 나대로의 시계를 가지고 나에게 맞는 속도로 걸어가야 한다. 세상이 세워둔 줄에 무작정 올라섰다가 나가떨어지지 않으려면 말이다.


사장님의 하트 라테아트를 생각하는 사이, 엄마의 섬세한   로제타는 다 사라졌다. 갑자기 사장님의 작고 소중하고 앙증맞은 하트가 많이 그리워진다. 언제가 옛 동네를 가게 되면 그 카페도 들려볼 것이다. 사장님은 아직도 하트만을 만들고 있을까. 어쩌면 엄마가 받은 것처럼 화려한 입사귀가 올려진 라테를 내어올지도 모르겠다.


아, 그러면 나 좀 서운할 거 같은데요, 사장님.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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