작은 아버지 칠순을 기념해 오랜만에 친척들이 한 자리에 모인 날이었다. 식사가 끝나가자 한 말씀하라는 가족들의 성화에 못 이겨 작은 아버지는 자리에서 일어섰다. 평생 경찰 공무원으로 성실학고 단정하게 사신 작은 아버지. 젊은 시절, 나를 참 예뻐해 주셨던 분. 만날 때마다 인형과 장난감들을 손에 쥐어주시고, 여기저기 데리고 다니면서 사진을 많이 찍어주셨다. 당신 아이들을 갖게 되신 후에는 그 예쁨 원조가 하루아침에 뚝 끊기기는 했지만 작은 아버지에 대한 고마움은 항상 마음 한편에 자리 잡고 있었다.
자리에서 일어선 작은 아버지는 쳐다보는 가족들의 얼굴을 휘 둘러보더니 입을 여셨다.
“내가 칠순이 될 줄 몰랐습니다.”
여기저기서 웃음이 터졌다. 나도 미소 지으며 괜스레 코끝이 찡해졌다. 저도 몰랐어요. 꽃미남이었던 작은 아버지가 백발이 성성한 칠순의 할아버지가 될 줄은. 그리고 작은 아버지가 쥐어준 막대 사탕을 쪽쪽 빨던 꼬맹이가 아이 둘을 둔 중년이 될 줄은.
몰랐다.
핸드폰이 꽃 사진으로 가득 찰 줄은, 겨울이면 무조건 뜨근한 온수매트에 몸을 지져야 잠이 들 줄은,
몸에 좋다는 먹거리나 약 정보만 들으면 귀가 솔깃할 줄은.
중년들만 할 것 같은 행동을 어느 순간부터는 내가 하고 있더라는.
40년을 훌쩍 넘게 사용한 몸은 슬슬 기능이 떨어지기 시작하고 있다. 어느 순간, 책 볼 때 글자가 겹쳐 보인다 싶더니 멀찍이 떨어뜨리지 않으면 초첨이 안 맞기 시작했다. 얼마 뒤에는 글을 쓰거나 스마트폰 메시지를 쓸 때 오타가 많이 난다는 것을 알게 되었다. ‘고요’라고 써야 하는데 '교요'라고 쓰는 식이다. 자기 전 어두운 방에서 스마트폰 들여다본 업보가 결국 돌아오는 걸까. 아니다. 글 쓰고 책 보느라 얻게 된 훈장 같은 거라고 우겨본다. 발레리나 강수지의 발처럼. 하지만 이내 뭘 그렇게 쓰고, 뭘 그렇게 읽었냐는 자아반성. 그냥 나빠질 때가 된 거다.
“노안이죠.” 까만 뿔테 안경을 쓴 안과 의사가 무미건조하게 말했다. 보통 40대 중반에서 시작된다고 하는데 그래도 남들보다 조금은 늦게 온 데서 위안을 찾아야 하나. 나빠진 시력에 도수를 맞춘 안경을 쓰니 그제야 30센티 적정 거리의 글자들이 명료하게 보인다. 그런데 돋보기를 쓴 채 먼 곳을 보면 바로 흐릿해지며 조금 어지러운 느낌.
아 그래서 어른들에게 말 시키면 안경 너머로 노려보듯이 쳐다봤구나. 얼핏 그런 이유일 거라 생각했는데, 이제야 그랬구나 싶은 게, 사람이 자기 일이 아니면 정말 관심이 없다 싶다. 젊은 시절, 중년의 세계는 정말 관심권 밖이었는데. 그냥 아줌마, 아저씨들의 이야기였는데.
칠순을 맞은 작은 아버지처럼, 내가 중년이 될 줄은 몰랐다고 중얼거린다.
이런 와중에도 나이 먹는 게 조금 재미있다. 나 자신에게 좀 더 귀 기울이게 된 느낌이라고나 할까. 탈 나지 않게 나를 세심히 케어하면서 나라는 사람을 알아가고 나 자신과 친구가 된 느낌.
외출할 때는 강한 햇살에 눈건강이 상할까 암막양산으로 눈을 편안하게 해 주며, 불편한 신발은 금방 피로를 불러오니 부드럽고 쿠션이 좋은 신발을 신어준다. 불필요한 감정소비가 발생할 만한 일도 가급적 만들지 않는다.
운동하는 시간이 제일 아깝던 내가 이제는 매일 필라테스에 출근 도장을 찍으러 간다. 유연성과 근력이 떨어졌으므로 예전보다 힘에 겨운 동작들이 많아졌다. "다리를 더 들어요." "어깨를 쫙 펴야 해요." 선생님의 지적이 들려올 때마다 "저 40대예요!"라고 호소하고 싶지만 부들부들 떨면서도 '근육이 연금이다'를 되니이며 동작의 완성도를 위해 최선을 다한다.
운동은 생활 속에서도 계속되어야 한다. 밥 먹고 달달한 믹스 커피 한잔하고 싶지만, 끙차 몸을 일으켜 동네 한 바퀴 돌러 나간다. 그래야 당이 안 오르기 때문이다. 젊을 때 얘기해서 무엇하겠냐마는, 조금 이야기하자면 하이힐을 신고도 전국 출장을 잘도 다녔고, 늦게까지 술 마신 날도 다음날이면 벌떡벌떡 일어나 대충 세수하고 바깥으로 뛰쳐나갈 수 있었다. 좀 피로한 날 숙면을 취하면, 다음날 몸이 깃털처럼 가벼웠으니 이제는 푹 자고 싶어도 잠이 잘 오지 않는다.
몇 살을 먹든 삶은 현재진행형, 나를 돌보며 계속 걸어갈 때이다. 내가 건강해야 자식이, 부모님 일상이 평화롭다. 내 몸 하나에 여러 명의 안부가 걸려 있다. 그러니 되도록이면 탈 나지 않도록 잘 보살펴야지. 가만히 나를 들여다봐야지.