충동성에 대한 고찰
'orosi'라는 필명의 브런치 글동무가 있다. 그녀는 운동을 주제로 한 원고로 한 출판사와 계약이 성사되어 출간을 준비 중이다. 아직 첫 책이 나오지도 않았는데 벌써 다음 책에 대한 얘기도 출판사와 오가고 있다고 한다. 브런치를 시작한 지 2년도 안 되어 출간을 앞둔 비결에 대해 그녀는 자신의 '충동성' 덕분이라고 했다. "재밌겠다, 해볼까." 깊은 고민 없이 충동적으로 저질렀던 일들이 씨를 뿌려 열매를 맺게 되었다는 것이다.
충동성, 남극과 아프리카처럼 나와는 반대편에 서 있는 단어. 되도록이면 나의 삶에 가까이 오지 못하게 했던 그것이 가장 중요한 키포인트였다고 하니, 순간 어인이 벙벙했다.
브런치에 입문하기 전, 출판사에서 10년 간 근무했기 때문에 책과 글을 가까이해야 했고, 결혼 출산 육아 3종 세트로 초래한 10년 간의 경력단절기간에는 아이들 때문에라도 책이 항상 옆에 있어야 했다. 그리고 브런치스토리로 쓰는 삶을 지속한 지 2년. 지난 20여 년의 기간 동안 나에게 필요한 덕목은 성실, 균형, 지속성이었다. 그것이 책과 글이 함께 하는 삶을 유지하기 위한 제일 중요한 가치라고 생각했다. 차분하게, 신중하게, 꾸준하게.
그런 나에게 충동은 성숙하지 못한 것, 본능에 가까운 것, 바람처럼 날아가 버리는 것, 따라서 특별한 결과물도 낼 수 없는 것이라고 생각했다. 되도록이면 충동적으로 행동하거나 결정하지 않으려고 했다. 그런데 출간의 비결로 뽑은 가장 중요한 요소가 충동성이라니.
스물일곱, 출판사 입사를 앞두고 친구랑 재미로 본 사주카페에서 나의 천직은 따로 있다는 말을 들었을 때와 비슷한 기분이었다.
"출판사가 아니고 미술을 해야 돼. 미술을! “
"엥? 미술이요?"
(너무 뜬금없는. 그런데 어릴 적 꿈은 화가였다!)
꼭 책과 글 때문이 아니더라도 나라는 사람은 살면서 충동적으로 무언가를 해본 적이 거의 없다. 이것 좀 해볼까, 해서 바로 시작하는 경우가 없다는 말이다. 천천히 알아보고, 두고두고 생각하고, 삼고초려 끝에 정말 해도 괜찮겠다는 생각이 들면 그제야 움직인다.
친구한테 "오늘 만날래?"라는 전화를 할 때조차 그 친구를 봐야겠다는 마음이 '갑자기' 들어서 전화한 경우는 거의 없다. 이 친구를 만날 때가 되었으니 상황이 괜찮을 때 전화를 해보자는 마음을 며칠간 먹고 있다가 온도, 습도, 조명 등등이 완벽한 날 전화를 거는 식이다.
한 번 시작한 인연은 특별한 일이 발생하지 않으면 오래 이어가고, 한 번 시작한 일은 사소한 것이라도 꾸준히 10년 넘게 이어가는 나의 특성상 오래 가지고 갈 만한 것들을 선택하자면 신중할 수밖에 없는 것 같다. 그런데 이렇게 까다롭게 선택한 것들로 내 일상을 구성해 놓고 그 루틴을 이어가는데 집중하다 보니 때로는 내가 그 안에 갇혀있는 게 아닐까라는 생각이 들 때가 있다.
충동성은 도전과 모험으로 연결되는데, 요즘의 나는 어떤 결과를 감수할 만한 도전도, 모험도 하고 싶지 않다. 재밌겠다, 해볼까. 이런 마음이 싹 사라졌다고나 할까.
충동적으로 뭘 하지도 않고, 그렇게 하는 건 나에게 너무 힘든 일이다. 나의 본성을 위반하는 일이다. 충동적으로 벌인 일이 내가 애써 꾸려놓은 일상의 균형을 깨트리게 될까봐 두렵다. 그래, 균형. 나에게는 균형이 제일 중요하다.내면의 평화를 언제까지고 유지하고 싶다.
덕분에 내 삶에 시행착오와 그로 인한 낙담은 별로 없었다. 대신, 별다른 일이 일어나지 않는다.
언젠가부터 내 삶에 ‘재미’라는 요소는 중요한 가치가 아니었다. 그것보다는 ‘곰곰이 생각하기, 집중하기, 지속하기'를 삶의 취상위 가치에 두고 몰입했다. 어쨌든 시간은 흐르고, 세월은 가고, 기차는 달리니, 그러다 보면 어느 근사한 곳에 도착해 있지 않을까 작은 희망을 품고. 그저 내 길을 걸어가기.
그런데 요즘에는 희미한 물음표가 뜬다. 나에게 그렇게 많은 시간이 허락되었을까. 나 자신과 나의 삶을 무조건적으로 믿어도 될까. 누가 그걸 확신해 주지?
나답지 않게 충동적이었다고 생각할 만한 일이 있기는 하다. 오래전, 절친과 떠난 보성 여행이었다. 각자 회사일로 너무 바빴어서 꼭 가봐야 할 장소 세 군데와 숙소를 정하는 것 말고는 아무런 계획도 세우지 않고 떠났다. 그러다 보니 숙소로 가는 차를 눈앞에서 놓치고, 급하게 올라탄 버스는 반대편으로 가는 버스였다. 한참 후 이 사실을 알았을 때는 어두컴컴한 밤 낯선 곳에 남겨진 뒤였다. 차가 끊겨서 망연자실해 있는 우리를 지역민이 분위기 좋은 펜션에 데려다주었고, 그 펜션 주인과 친해져서 나중에 서울로 돌아와서도 인연을 이어갔다. 다음날은 가보려고 했던 장소 말고 다른 장소로 가봤다가 거기서 한 학생을 만났고, 다음날 다른 장소에서 또 우연히 그 친구를 만나게 되어 꽤 오랜 훗날까지 인연이 이어졌다.
2박 3일 동안 참 많은 추억과 인연을 만들 수 있었던 것은 아무리 생각해도 충동적인 결정 덕분이었다.
그런데,
오로시 작가님이 말한 충동성은 마음이 동하는 욕구만은 아닐 게다. 그것은 무라카미 하루키가 소설가가 되기로 마음먹은 계기와 비슷하지 않을까 싶다. 그는 외야석에서 맥주를 마시며 야구를 보다가 스왈로즈의 타자가 2루타를 친 순간, 방망이가 공에 맞는 상쾌한 소리를 들으면서 '아무 맥락 없이' 이렇게 생각했다. '그래, 나도 소설을 쓸 수 있을지 모른다.' 하루키는 바로 펜과 잉크를 사서 그날로 소설을 쓰기 시작했다고 한다.
그가 40년 넘게 쓰는 삶을 시작하게 된 역사적이고도 충동적인 순간이다. 그러나 이전에 수년에 걸친 엄청난 독서량이 받쳐주지 않았다면 어쩌면 그 결심은 그저 충동적인 시도로 끝나지 않았을까.
충동이 공기 중으로 휘발되지 않고 열매를 맺기 위해서는 사전에 하루하루 쌓아가는 그 무엇이 바탕이 되어야 한다. 내 삶에서 크고 작은 어떤 일들이 일어나더라도 '어쨌든', '무조건적으로' 계속 부어 넣는 시간이 필요하다. 어떻게든 견뎌내면서 쌓아놓은 것들이 있을 때 충동적으로 한 행동은 돌파구가 되어주고, 또 다른 길을 비춰주는 빛이 된다.
즉 우리가 생각해야 할 충동은 갑자기 튀어나오는 스프링 같은 게 아니라 이 방에서 저 방으로 가기 위해 누르는 버튼의 개념이다. 이 버튼이 요즘의 나에게 필요하다는 생각이 들었다.
그래도, 버튼은 눌러야 하지 않겠니.
무엇보다, 훗날 이 고요한 시간들이 조금은 후회가 될 것 같다. 나의 청년 시절을 돌이켜 볼 때 가장 후회되는 것은 좀 더 많은 도전과 모험을 하지 않은 것이다. '이것을 하기에 늦은 게 아닐까'라는 생각이 계속 나를 주저하게 만들었다. 새로운 직업을 구하기에, 공부를 시작하기에, 떠나기에, 너무 늦은 게 아닐까. 주저주저하다가 어느덧 쉰을 앞둔 나이가 되었다. 그 한창때에 나이를 고민했다니 지금 생각하면 어이없을 뿐이다.
그때는 막연한 미래에 대한 불안으로 가득해서 조금의 변화도 두려웠다. 그 시도들이 초래할 실패를 감내할 용기가 부족했다. 하지만 이제 나는 앞날에 대해 그렇게 불안하지 않다. 세월이 준 선물일 수도 있겠다. 이제 내게는 넘어져도 일어나서 다시 걸어갈 정도의 회복력이 있고, 내가 해야 할 일을 스스로 찾을 수 있는 판단력과 게으름을 이겨낼 수 있는 의지가 있다. 무엇이 중요한 것인지 우선순위를 매길 수 있는 분별력도 있다.
그러니 내 삶에 충동성 한 방울을 떨어트리겠다. 충동성이 가져올 낯섦을 마주해 보겠다. 늦어서 안 하는 게 아니라 늦어서 더 많이 해보는 것이다. 그렇게 생긴 인연과 마음이 만들어낸 이야기들을 즐겨보리라. 그러고 나면, 보성의 여행을 추억하 듯, 이 시절의 이야기들을 추억할 날이 또 오겠지.
*영감을 주신 오로시 작가님 감사합니다. 도로시에게도 안부 전해 주세요.
https://brunch.co.kr/@orosi-yum
*올 한 해 <수요에세이>를 읽어주신 모든 분께 감사드립니다. 잠시 쉼의 시간을 갖고, 시즌 2로 돌아오겠습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