하늘의 별빛보다 사람의 불빛을 좋아한다. 내 인생 최고의 별빛은 스물네 살 때 태국 북경지역에서 본 밤하늘이었다. 9시면 전기가 끊기는 그곳에서 올려다 본 밤하늘에 ‘절대적’이라는 말을 붙이고 싶다. 별들이 어찌나 촘촘하게 한가득 박혀있는지 하늘이 별의 무게를 못 이기고 뚝 땅으로 떨어질 것만 같았다.
풀벌레 소리 가득한 한여름 밤 그리고 별로 가득한 드넓고 검푸른 하늘, 그 절대적인 아름다움을 목격한 뒤로는 희뿌연 도시의 밤하늘에는 절로 시큰둥하게 되었으니 하늘의 별빛보다 사람의 불빛을 좋아하게 된 나름의 내력이다.
지금 사는 산밑 동네로 이사 오기 전, 먼저 살던 집은 밤늦게까지 거리가 밝은 곳에 있었다. 마음이 허하고 가라앉는 밤에는 입고 있던 옷에 점퍼 하나 걸치고 발길 닿는 대로 거리를 쏘다녔다. 작고 낡은 고깃집에서 소주 한 잔을 걸치는 머리가 희끗한 아저씨들, 밝은 조명 아래서 진지한 얼굴로 화장품을 고르는 학생들, 텅 빈 가게에서 하릴없이 손님을 기다리는 아주머니. 분주한 낮시간을 지나 저녁에도 다시 살아보려는 그들의 작은 에너지를 마음껏 받아들였던 나날들.
검진하러 간 병원 복도에서 우연히 전동민 작가의 작품들을 보았다. 청각장애자이면서 도시 야경 작가로 알려진 그의 작품들은 야경 이미지처럼 화려하면서도 몽환적이었다. 그의 작품을 한참 들여다보고 있자니 신혼집에서 내려다본 야경이 생각났다. 고층 아파트였던 신혼집은 주방 쪽 창문에서 내려다보면 외곽으로 빠지는 고속도로도가 한눈에 들어왔다. 도로를 타고 쏟아져 내리던 빛의 물결. 아이들이 잠들고 나면 작은 창문가에 오래 서서 도로의 불빛들을 보았다. 한참을 그러고 있으면 시간이 아득해지고 차라리 빨리 늙어버렸으면 좋겠다고 생각하곤 했다. 불빛처럼 반짝이다가 바로 위 깜깜한 심연의 하늘처럼 까맣게 풀어져 버리면 좋겠다고.
전동민 작 <광주 전경>
“없는 사람들이 살기에는 겨울보다 여름이 낫다”는 말이 있다. 이제 그 말은 수정되어야 하지 않나 싶다. 지난여름더위가 너무 심했기 때문이다. 기록적인 폭염 속에서 에어컨이 없는 사람들, 있어도 전기세 누진세가 무서워 틀지 않고 참아야 했던 사람들은 더위를 온몸으로 이겨내느라 잠을 이루지 못했겠지.
찢어지게 가난했던 것도 아닌데, 전기세 많이 나가는 게 너무나 싫었던 엄마는 항상 집안을 컴컴하게 두었다. 아무도 없는 거실에 불이 환하게 켜져 있거나 텔레비전이 켜 있으면 바로 불호령이 떨어졌다. 필요 없는 불은 모조리 끄는 것은 물론 심지어 필요한 불도 꺼버렸다.
어느 날밤에는 아빠가 거실에서 TV를 보고 엄마가 안방으로 들어가면서 거실 불을 탁 꺼버렸다(우리 집 스위치는 유난히 ‘탁’ 소리가 컸다). 아빠는 사람 있는데 불을 끈다면서 ‘썅’ 소리와 함께 들고 있던 도자기 물컵을 TV를 향해 던져버렸다. 대형 TV가 ‘빡’하며 박살 나는 소리도 처음 듣지만 아빠 입에서 욕이 나온 것도 처음 들은 밤이었다.
아빠가 정년퇴임한 지 몇 달 안 되던 즈음에 벌어진 일이었다. 아빠는 점잖고 좀처럼 자신의 의견을 강하게 내세우지 않는 사람이었다(동시에 다른 사람 의견도 잘 받아들이지 않는). 그런 아빠가 자신의 불만을 처음으로 아빠답지 않게 표현한 것은 다름 아닌 ‘밥’ 때문이었다.
고등교사였던 아빠는 은퇴하자마자 그간의 바른생활을 청산하려는 사람처럼 당신이 일어나고 싶을 때 일어나고 자고 싶을 때 자는 무위도식의 생활을 시작했다. 그에 반해 엄마는 시계추처럼 규칙적인 사람이었다. 엄마는 아빠의 변한 생활 리듬에 맞춰 본인의 생활리듬을 깨고 또 밥을 차려낼 생각은 눈곱만큼도 없었다. 아빠는 아빠대로 엄마가 상을 또 차리는 수고를 덜어주도록 기상 시간을 바꿀 노력은 조금도 하지 않았다. 이렇게 삼시세끼 그놈의 ‘밥’을 두고 팽팽한 신경전이 계속되다가 그날밤 거실 스위치가 도화선이 되어 불이 붙은 것이다.
TV가 박살 난 채 몇 주가 흘렀다. 퇴근 후 드라마 보는 게 큰 낙이었던 동생은 견디다 못해 정중하고 간곡한 어조로 티브이를 고쳐달라고 아빠에게 문자를 보냈다. 아빠는 별다른 말없이 다음날 기사를 불러 TV를 고쳐 놓았다. 그리고 이후로는 아빠가 식사하고 싶으실 때 스스로 식사를 차려 드시기 시작했다.
놀라운 건, 그 사달이 나고도 엄마는 아빠가 늦은 저녁에 거실에서 불을 켜고 TV를 보고 있으면 탁하고 스위치를 내려버리는 행동을 계속하셨다는 것이다. 상대방이 아무리 난리를 쳐도 ‘내가 한다면 한다’는 유형의 사람이 우리 엄마였다. 아빠도 만만치 않으신 게, 제시간에 일어나고 자야 건강할 거라는 온 가족의 거듭된 권유에도, 20년째 그 생활을 이어오고 있다는 것이다. 내 밥 내가 차려먹으면 되지 않냐는 논리인 것이다. 50년 가까이 평행선을 달리는 엄마아빠를 보면 사람은 정말 변하지 않는구나를 실감하게 된다.
그런 엄마도 연세가 드셨는지 요즘 들어 ‘뭐 하러 그렇게 돈 안 쓰고 악착같이 살았는지 모르겠다’고 후회하듯이 말씀하시지만 오랜만에 친정에 가면 여전히 어둡게 하고 지내는 모습이다. 반면 우리 삼 남매는 어두컴컴했던 집에 질린 나머지 아무도 그렇게 어둡게 해 놓고 살지 않는다. 특히 막내는 보기 드물 정도로 절약정신이 투철한 아이인데도 온 집안의 불을 환하게 켜놓고 지내기를 즐긴다. 그깟 전기세 그렇게 많이 나오지도 않는다며. 집이 환해야 복이 들어오고 기분도 좋다며.
밝으면서 흐릿하고, 가물가물하면서도 영롱한 야경, 문득 야경이 보고 싶은 걸 보니 겨울이 오려나 보다. 폭염이 늦게까지 머무르더니 이제야 제법 찬바람이 분다. 불빛은 차가운 공기 속에 더 뽀얗게 빛나기 때문에 야경 보기 좋은 계절은 딱 이맘때이다. 너무 추우면 오래 지켜보기 힘들기도 하다.
사사롭고 짠한 풍경을 묵직한 침잠의 어둠 속에 가라앉히면서 화려한 불빛으로 되살리는 야경의 매력. 오렌지, 노랑, 파랑, 주황 색색의 형광색으로 가득한 울긋불긋한 야경 속에 어두컴컴한 엄마아빠의 집이 있다. 서울의 야경을 볼 때면 괜스레 코끝이 찡한 이유이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