나는 왜 운전하지 않는가
장롱면허 10년 차 정도 되었을 때였다. ‘내 손으로 운전을 하고 만다’며 이를 갈만한 일이 생겼으니 큰 애가 두 살 무렵 주말 나들이를 가던 어느 날이었다.
남편이 운전을 하고 나는 뒷좌석에서 아이의 시중을 들고 있었다. 카시트 밖으로 빠져나오고 싶어서 떼를 쓰는 아이를 잠재우기 위해 별의별 수단을 동원했다. 간식은 물론, 책을 읽어주다가 노래를 불러주기도 하고, 장난감으로 열심히 놀아주기도 했다. 30분쯤 지났을까. 드디어 꼬맹이가 잠이 들었다.
‘휴우’ 그제야 아이한테 내내 돌아가 있던 허리를 바로 펴보았다. 그리고 창 밖 하늘을 올려다보았다. 청명한 가을 하늘이 드넓게 펼쳐져 있었다. 한 3분 정도 지났을까. 룸미러로 나를 보는 남편의 시선이 느껴졌다.
“내가 기사야?”
가시가 씨게 돋친 말에 흠칫 놀랐다. 뒤이어 한 말은 정확히 기억은 안 나는데, 요는 “나는 운전하는데 뒷좌석에서 하늘이나 올려다보고 있고, 내가 운전기사와 뭐가 다르냐”는 말이었다. 기가 막혔다. 아이 보는 건 쉬운 줄 아나. 차라리 운전하는 게 백배 날 것이라고 받아치고 싶은 말이 목구멍까지 차고 올랐으나 주말 분위기를 망치고 싶지 않아 꾹 삼켰다.
세상 설움 중에 운전 못하는 설움도 있구나. 치사하고 더러워서 내 기어코 운전을 하고 말리라며 어금니를 깨물었다. 그리하여 큰 애가 세 살이 되어 어린이집에 보내자마자 학원에서 운전연수를 받았다.
자존심 상하는 건 그때가 되기까지 외출할 때마다 뒷좌석에서 남편의 눈치를 보던 내 모습이었다. 아이가 잠들어도 남편 기분을 상하게 할까봐 창밖으로 고개도 돌리지 않았다. 사람이 과거를 되돌아볼 때 내가 왜 그랬을까 싶은 시기가 있을 텐데 나에겐 그때가 바로 그런 시절이었다. 주말부부로 혼자 온종일 아이를 데리고 지내는 생활에 심신이 지쳐있어 무슨 문제이든 풀어나갈 에너지가 고갈되어 있었고, 누구와도 갈등이 생기는 게 싫어서 그럴 조짐이 보이면 일단 나를 누르는 걸 밥 먹듯이 했다. 하지만 그런 시간들이 쌓이고 쌓여서 결국 마음의 병이 되더라는.
연수를 마치고 운전을 살살 시작해 보았다. 동네를 도는 게 익숙해지자 경기도 신혼집에서 서울 친정까지 왕복하는 것을 목표로 했다. 친정 가는 길은 차선도 자주 변경해야 하고, 신호도 복잡해서 여러 개의 신호등 중 내가 가는 길의 신호등을 찾는 것도 헷갈리는 난코스였다.
운전이 이렇게 어려운 거였나! 이 세상의 모든 운전자들이 대단하게 느껴졌다. 때로는 너무 공포에 질려 다시는 운전을 하고 싶지 않기도 했다. 하지만 운전으로 더 이상 기죽고 눈치 보며 살고 싶지 않았다. 그야말로 이를 악물고 운전을 한 지 겨우 이십 일이 넘었을까. 둘째가 생긴 걸 알게 되었다. 예상치 못한 임신이었다.
첫째와는 다르게 둘째 때는 몸 상태가 너무 안 좋았다. 심한 입덧에 음식도 먹지 못하고 대상포진에 유산기까지, 운전은커녕 하루하루 살아내는 것도 벅찬 일상이었다. 출산하면 좀 나아질 줄 알았더니 둘째가 얼마나 예민하던지 한동안 또 정신을 차릴 수가 없었다. 삼사 년이 흐르니 좀 여유가 생겨 다시 운전을 시작해야겠다 싶었다. 그런데 또 생각지 못한 일이 발목을 잡았으니 병에 걸리고 만 것이다. 수술과 치료, 그리고 회복을 하느라 3년이 흘렀다.
그렇게 운전은 나의 삶에서 점점 멀어져 갔고 이제 쉰을 앞둔 나에게 운전은 너무 큰 도전의 대상이 되었다. 운전이 재밌었던 기억이 있었다면 그 기억을 의지삼아 다시 시작할 텐데, 머릿속에는 이십여 일간의 식은 땀 흐르던 기억밖에 없다. 운전공부한답시고 티브이에서 블랙박스 제보영상을 많이 본 탓도 더해진다. 그 돌발적이고 황당하고 끔찍한 사고들이 나만 비켜가리라는 생각이 들지 않는다. 차라리 운전의 어려움을 모르는 상태였으면 뭣 모르고 시작했을 것 같다.
이제야 운전을 시작하는 게 맞을까 싶기도 하다. 심심치 않게 발생하는 고령 운전자의 사고 뉴스를 보며 어렵게 운전을 시작해 봤자 몇 년이나 더 할까 싶은 생각도 든다.
운전을 못해서 생긴 우습고도 짠하고 열통 터지는 일이 그간 얼마나 많았는지 모른다. '운전을 못해서 생긴 일' 같은 제목으로 연재를 하고 싶을 정도이다. 그럼에도 나는 왜 운전하지 않는가. 거창하게 분석심리학의 대가인 칼융의 이론을 끌어와 본다.
‘무의식을 의식화하지 않으면 무의식이 삶의 방향을 결정하고, 우리는 이것을 운명이라 부른다’
즉, 무의식에 각인된 관성화된 생각, 관념이 운명을 결정한다는 것이다. 관념이 내면에 단단히 박히면 그 운명에서 벗어날 수 없다는 것.
운전을 하지 않는 삶이 나의 내면에 고착된 것이 느껴진다. 칼융의 이론을 내 인생에 대입해 보자면, 운전과 먼 삶이 나의 내면에 강력하게 박혀 있고, 그 관념이 미래의 모습이 되며 결국 그 운명에서 벗어나기 힘들게 되었다. 이것은 마치 대를 이어 가난하게 사는 사람이 누군가로부터 ‘당신은 부자가 될 수 있어요’라는 말을 들었을 때와 비슷한 마음이다. 제가요? 제가 부자가 될 수 있다고요?
-> 제가 운전을 할 수 있다고요?
어린 시절 우리 집에는 차가 없었다. 차를 못 살 정도로 집이 어려웠던 것은 아니다. 퇴근길의 아빠가 골목길에서 공을 쫓아 튀어나온 아이를 칠 뻔한 적이 있었는데, 아빠는 너무 놀란 나머지 그날 이후로 운전대를 딱 놔버리고 말았다.
사고가 실제로 난 것도 아닌데 아빠는 차를 팔아 버리고 다시는 운전을 하지 않았다. 아빠는 원래 속내를 잘 알 수 없는 사람이었고, 이런저런 이유가 있겠지만 원래 운전하기 너무 싫었던 게 가장 큰 이유로 짐작된다. 그렇게 우리
가족의 뚜벅이 생활이 시작됐다. 친척모임이 있을 때마다 우리는 버스 타고 지하철 타고 그리고 다시 걸어 가느라 여름은 땀범벅이 된 채, 겨울은 추워서 꽁꽁 언 채로 나타나곤 했다. 모임이 파하고 다른 가족들은 차 어디다 뒀냐고 서로 물을 때 우리는 조용히 지하철역으로 향하던 모습이었고.
취업 후 나라도 차를 사야겠다는 생각을 할 법도 한데, 그런 생각을 하지 못했다. 박봉이었고 큰돈을 할부로 갚아나갈 만한 배짱이 없었다. 그런데 그것보다 더 근본적인 원인은 차 없는 삶에 너무 익숙했기 때문이다. 어디를 가기 위해 고생하는 건 당연한 일이었다. 먼 길은 고생을 더 해야 하므로 가지 않는 걸 택했다. 실제로 우리 가족은 아빠가 차를 판 이후로 여행 같은 건 시도하지도 않았다. 내 기억 속 가족 여행은 10살로 끝나버렸던. 그러니까 운전이 없는 삶은 어린 시절부터 내 뼈속에 아로새겨졌다고, 분석심리학까지 들먹일 정도로 운전에 대한 내 마음의 벽은 높기만 한 것이다.
영원히 못할지도 모른다고 생각해서인지 나에게 있어 운전은 어떤 미지의 영역, 꿈, 무지개 같은 것이 되었다.
내가 운전을 할 수 있다면? 어느날밤 홀연히 동해로 떠나보기, 해안가를 하염없이 걷다가 일출을 보고 새벽에 운전해 돌아오기, 비 오는 날 아이들 학교에 데려다 주기, 부모님 모시고 드라이브하기, 멀리 사는 친구 만나러 가기, 신세 진 사람 태우고 맛있는 식사 대접하러 가기….
박연준 작가는 ‘초보운전자를 사랑합시다’라는 제목의 에세이에서 운전을 하면 내 삶을 원하는 쪽으로 몰고 가는 기분을 느낄 수 있다고 했다. 이 얼마나 멋있는 일인가! 뭐 하나 내 마음대로 하기 어려운 세상에서 운전하는 동안이라도 원하는 쪽으로 내 삶을 몰고 갈 수 있다니. 그런 일이 나한테 일어날 수 있을까.
열린 창문으로 바닷바람을 맞으며 해안도로를 따라 달리는 내 모습을 상상해 본다. 음악이 틀어져 있어야 할 것이다. 왼팔은 열린 창문에 올려놓고, 오른손은 운전대를 가볍게 잡고 있다. 그러다가 예쁜 카페가 나오면 차 한잔 마시고 또 달린다. 온종일 달린다. 마치 세상의 끝에 가버릴 것처럼.
일단 해야 할 텐데. 꿈만 꾸지 말고.
하지만 참으로 어려운 것. 그것은 운전.