홍제동 한 식당, 창가 자리에서 남편과 칼국수를 먹고 있었다. 맞은편 빈자리에 젊은 남자가 혼자 와 앉더니 칼국수 한 그릇을 시킨다. 오후 시간인데도 좀 전까지 자다 나왔는지 머리에 튼 까치집이 꽤 큰 모양새이다. 그리고 칼국수가 나오기까지 내내 창밖을 주시했다. ‘누구를 기다리나.’ 남자의 시선을 따라가 보니 개 한 마리가 앉아 있다.
부스스한 주인의 머리와는 달리 미색 털이 반지르르한 커다란 래브라도 리트리버, 목줄을 입간판에 묶어 놓았지만 굳이 그럴 필요가 없을 듯하다. 개는 남자를 쳐다보느라 미동도 안 하기 때문이다. 그야말로 망부석이다.
칼국수를 한참 먹던 남자가 갑자기 일어나 자리를 떴다. 순간 리트리버는 벌떡 일어나 식당 출입구로 시선을 돌린다. 눈에 생기가 돌고 꼬리는 살랑살랑. 그러나 남자는 물을 마시러 간 것이었다. 자리에 돌아온 주인을 보더니 개는 다시 표정을 잃고 털썩 주저 앉는다. 그리고 다시 남자를 뚫어져라 쳐다본다.
개의 그 집요한 시선에 내가 숨이 막혀 칼국수가 넘어가질 않았다. ‘세상에서 의미 있는 존재는 당신뿐‘이라고 말하는 듯한 저 맹목적인 사랑, 너무 지나치고 버거운 집착! 칼국수를 반쯤 남기고 식당을 나오면서 개를 쳐다보았다. 바로 옆을 지나는 나한테는 시선 한번 주지 않는다. 오로지 자신의 남자에게만 집중하는 모습. 진정한 기다림이란 개의 기다림일 것이다. 단순하면서 깊고, 애절하면서 우직하다.
“나는 종종 개를 보면 슬프다. 가족에게 사랑받는 행복한 개조차도 잠깐 가게 앞에 묶여 혼자 남겨지면 출입문만 바라보며 시선을 못 떼는데, 나는 그런 개의 뒤통수를 볼 때도 슬퍼진다. 개는 왜 사람 따위를 이토록 사랑하는 걸까. 개의 중심은 제 안에 있지 않고 자기가 바라보는 사람 안에 있는 것 같다.”. - 김하나, <개의 슬픔>
그렇다. 개는 왜 사람 따위에 이토록 충성과 사랑을 퍼붓는 걸까. 자신과 다른 종을 이토록 사랑하는 게 가능하다니! 나는 개의 인간에 대한 사랑과 헌신을 볼 때마다 진심으로 놀라곤 한다.
개가 이렇게 인간과 가깝게 된 데에는 과거 수렵 채집인이 늑대 새끼를 데려와 사냥견, 파수견으로 길들여 키웠던 게 그 시작이라는 학설이 우세했으나 요즘은 개가 스스로 축화를 선도했다는 학설이 힘을 얻는다고 한다. 즉 늑대들이 인간의 거주지에 얹혀 살기 시작했다가 인간과 사랑에 빠져 난폭성을 누르고 좀 더 귀엽고 작게 진화했다는 설인데 나는 후자의 설에 더 믿음이 간다.
결혼 전에는 10년쯤 두 마리의 반려견과 살아보았고, 결혼 후에는 반려견을 들이지 않았지만 동물에 관심이 많은 큰 애 덕분에 동물 관련 TV 프로그램들을 10년 간 시청해 왔다. 프로그램에 단골 등장인물은 단연코 개와 고양이. 그 중 자이언트 푸들 세 마리를 키우는 한 여자의 영상이 기억에 남는다. 그녀는 외출만 했다 하면 이 송아지만한 녀석들이 문을 부수고 나오는 바람에 프로그램에 SOS를 요청했다. 별의별 방법을 써봤지만 소용없었고, 결국 회사까지 그만 둔 상황이었다.
관찰 카메라를 설치하고 확인해 보니, 과연 그러했다. 주인이 외출하자마자 개들은 손 아니, 앞발과 입을 사용해 문을 열고 건물 밖으로 스프링처럼 튀어나갔다. 나는 그들이 밖에 나온 김에 신나게 달려보는 게 아닐까 추측했지만 전문가의 말은 달랐다. 그들의 목적은 오로지 사라진 주인을 찾는 데 있다고 한다. 달리는 차들 사이로 주인을 찾아 맹렬하게 질주하는 그들의 미친 사랑에 나는 눈을 질끈 감고 말았다.
슬픔에 빠진 개도 많이 보았다. 상심에 빠진 개, 트라우마에서 벗어나지 못하는 개, 그래서 시름시름 앓아가며 죽어가는 개. 그들이 그렇게 된 이유는 대부분 자신의 충성을 바친 상대에게 배신을 당했기 때문이다. 그들은 자신의 꺼져가는 마음을 가누지 못하고 끝끝내 구렁텅이로 빠져든다. 잊는 것도 능력이라면 개들은 그 능력을 소유하지 못했다. 그들의 실연은 오로지 또 다른 사랑으로만 치유받을 수 있지만 그마저도 쉬운 것은 아니다.
반면 고양이는 쉽게 마음을 정리할 수 있다고 한다. 그들은 여유를 가지고 상대방을 지켜볼 수 있고, 기분에 따라 가까이 다가서기도 하고 멀리 떨어질 수도 있다. 당신의 사랑을 얻기 위해 사정없이 조바심을 치거나 안달내지 않고 자신만의 평화에 침잠할 수 있다. 개와 달리 그들의 중심은 제 안에 있기 때문이다.
그러면 개보다 고양이가 더 이기적인 걸까. 박연준 작가는 한 산문집에서 ‘사랑에 목을 매는 개는 스스로를 위해 그러는 거다. 충성심, 그건 당신의 개가 드러내는 자기 사랑에 대한 믿음, 영원성, 나르시시즘에 지나지 않을지도 모른다’라고 했는데 과연 그럴 법도 하다. 원하는 바를 얻을 때까지 줄기차게 요구하는 것, 나만을 봐달라고 호소하는 것, 상대가 내 요구를 들어줄 거라는 영원불멸의 믿음! 그것이 사랑의 이기성이 아니고 무엇이겠는가.
나는 ‘고양이’과 인간이다. 내 마음을 개처럼 직접적으로 드러내는 건 좀처럼 없는 일이다. 고양이처럼 암시와 은유, 상징이 깃든 표현을 좋아한다. 창가의 고양이처럼 타인을 멀리서 주시하는 걸 즐기고, 사랑하는 사람이 내 옆에 없으면 그의 안부가 궁금은 하지만 나름 잘 먹고 잘 지낼 수 있다. 연락에도 별로 연연해하지 않는다(돌이켜 보면 연연해하지 않게 그들이 잘한 것 같기도). 고양이처럼 속내를 알 수 없는 나를 두고 남자는 원망 섞인 말을 하고는 했다.
“나는 대체 너에게 뭐냐.”
사람은 자기가 가지고 있지 않은 걸 지닌 이에게 본능적으로 이끌린다. 나는 내게는 없는 개들의 뜨거움에 식겁하면서도 그 순수함에 경의를 표하지 않을 수 없다. 끈질기고, 변하지 않으며, 상대방을 가늠해보지 않는 순수 결정체의 사랑!
무엇보다 그들은 이 사랑을 위해 기꺼이 목숨을 내던진다. 실제로, 유튜브에서 우연히 본 영상에서, 한 주인은 개의 헌신을 시험해보고 싶었는지 반려견과 어느 벼랑 끝에서 쉬다가 갑자기 계곡 아래로 몸을 던졌다. 개는 놀란 듯 펄쩍 뛰어오르더니 1초의 망설임도 없이 주인을 향해 벼랑으로 몸을 던지더라는(그 둘이 어떻게 되었는지는 나오지 않아 모르겠지만 무사할 듯).
노벨문학상 수상자이기도 한 미국 작가 토니 모리슨의 <빌러비드>에는 이런 문장이 나온다.
“사랑이 그런 거야. 그렇지 않으면 사랑이 아니지. 옅은 사랑은 사랑이 아니야.”
너의 사랑은 너무 짙다고 힐난하는 남자에게 주인공이 하는 말이다.
그래, 사랑은 그런 거지. 너무 지나치고, 주체할 수 없이 맹렬한 마음으로 가득 찬 것. 상대를 위해 기꺼이 몸을 날리는 것.
그 ‘개’ 같은 사랑을 나는 해보았던가. 옅은 마음의 고양잇과 여자는 문득 사랑을 돌아본다. 진실로 깊은 가을의 어느 날밤.
영국의 화가 브리튼 리비에르 작품 (1869)
사진출처- 픽사베이