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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뮤뮤 Oct 09. 2024

서울에서 여수까지, 비행기 탔는데 다섯 시간 걸린 사연

얼마 전 일이다. 시댁인 여수로 가기 위해 김포에서 비행기를 탔다. 오후 4시발 기내의 분위기는 조용하고 다소 피곤이 깃든 분위기였다. 승객 대부분은 중장년 층이었고 어린애들은 우리 아이들 뿐인 것 같았다. 좌석은 열마다 여섯 좌석이 세 개씩 좌우로 나누어졌으니, 네 가족인 우리 가족 중 한 명은 떨어져 앉아야 했다. 남편이 남매와 나란히 앉고, 같은 열에서 나는 양복을 입은 두 신사와 앉게 되었다. 피곤이 느껴지는 시간대라 승객들 대부분은 이륙하고 얼마 되지 않아 잠 속에 빠져들었다. 귓속이 먹먹해짐을 느끼며 모처럼만에 맛보는 고요함에 내 눈꺼풀도 무거워지기 시작했다. 그렇게 삼십 분쯤 흘렀을까. 갑자기 비행기가 강하게 흔들려 눈을 떴고 순간  엉덩이가 붕 위로 떴다가 내려왔다. 롤러코스터가 하강곡면을 탔을 때, 딱 그 느낌이었다.




이게 무슨 일인가 싶어 눈이 커졌다. 급하강한 비행기는 다시 균형을 찾는가 싶더니 이내 좌우로 크게 흔들리기 시작했다. 기내의 승객들이 "어어"하며 놀란 소리를 내었다. 난기류를 만난 걸까. 전날 기상 예보에는 '전국적으로 구름 많고 흐린 하늘에 소나기가 예상되는 날씨'라고 했다. 창밖을 보니 온통 회색구름으로 가득 차 있고 빛은 한 줄 기도 들어오지 않았다. 작은 전등만 켜진 기내는 어두컴컴해서 마치 야간비행 중인 듯한 착각을 일으켰다. 등을 좀 더 밝게 할 수는 없을까라고 생각한 순간 번개가 쳤다. 섬광을 받아 회색빛으로 번쩍인 기내 모습은 마치 공포영화의 첫 장면처럼 을씨년스러웠다.


이 정도면 안내방송이 나와야 할 듯도 싶은데 감감무소식. 이후에도 비행기는 몇 번을 요동쳤다. 착륙시간이 다가오고 있는데도 기체는 계속 비행 중이었다. 짙은 구름에 여수는 보이지 않고 고도가 높은 건지 낮은 건지 조차 가늠할 수 없었다. 괜찮은 건가, 답답증이 올라올 때쯤에서야 "기상악화로 착륙시간이 지연될 예정이며, 자세한 것은 잠시 후 기장이 방송할 것"이라는 안내방송이 나왔다. 방송하는 승무원이 긴장한 듯 몇 단어를 더듬거렸다. 기장이 안내방송할 여유도 없이 상황이 긴박한 건가, 바짝 긴장하면서 사태의 추이를 주시했다.


그렇게 비행기는 착륙하지 못한 채 여수 하늘 위를  배회하기 시작했다.  


기체가 크게 흔들릴 때마다 승객들 사이에서 비명이 나오고 심장이 옥죄이는 것 같았다. 외국을 많이 나가보지는 않았어도 국내선은 셀 수 없이 많이 타봤는데, 이런 경우는 처음이었다.  내가 느끼기에는 비상사태 같은데, 아닌 건가? 이럴 수도 있는 건가? 누군가에게 묻고 싶었다. 남편은 10년 넘게 해외출장을 숱하게 다녔기 때문에 나보다 경험이 많을 터,  남편을 수시로 쳐다보았지만 아이들 쪽으로 수그리고 있어 그의 등짝밖에 보이지 않았다. 어미곰이 새끼곰을 품어주는 모양새였다. 아무리 자식새끼들이 중요해도 그렇지. 나는? 마누라는 안중에도 없나?


어이가 없는 채로 다른 이들은 무얼 하나 주변을 살펴보았다.

어느 여인은 머리를 숙이고 두 손을 꼭 모은 채 기도를 하고 있었다. 어떤 부부는 손깍지를 꼭 낀 채 굳은 얼굴로 앞만 보고 있는 모습도 보였다. 대각선 앞으로 앉은 두 남녀는 응급상황 매뉴얼을 읽고 있었다. 그러고 보니 국내선이라 응급상황대처법에 대한 승무원의 가이드가 생략되었던 사실을 깨달았다. 위기상황시 산소마스크가 어디에서 떨어지는 걸까 싶어 천장 쪽을 훑어보는데 기체가 또 한 번 크게 흔들렸다. 겁에 질린 비명 소리와 함께 뒷좌석에서 울음소리가 터져 나왔다. 젊은 여성일 것으로 추청 되는 앳된 소리였다. "흐으윽" 울음소리를 듣는 순간 나도 눈물이 맺혔다. 사람이 너무 무서우면 눈물이 나는구나 싶었다. 정말 퓨어한, 순수 100%의 '공포에 질린 눈물'이었다. 슬퍼서 울어는 봤어도 너무 무서워서 눈물을 흘리기는 처음이었다.


 “울지 말아요!  아무 일 없을 거예요!”

중년 여성일 것으로 추정되는 목소리. 다독이는 내용이었지만 말투는 엄했다. 울지 말라고 꾸짖는 엄마의 어투였다. 아가씨가 억지로 울음소리를 죽였고 승객들 모두 숨죽여 침묵했지만, 짓눌린 공포와 두려움이 눈에 보이는 것만 같았다. 얼마나 날았을까, 비행기가 크게 덜컹거렸다. 비명소리와 함께 앞칸의 누군가가 통성기도를 드리기 시작했다.


“주여! 주여!”  


기도내용이 청산유수 흘러나오는 것이 통성기도를 많이 해본 듯한 할머니 목소리였다. 나도 마음속으로 기도를 드리고 있던 참이었다. '무사히 땅에 내릴 수 있도록 도와주세요!' 온 힘을 다해 화살기도를 드리고 있었다. 교회 목사님이 위급한 상황일 때는 마치 아이가 부모에게 매달리듯 하나님을 생각하면서 간략하고도 절실하게 드리는 '화살기도'가 더 위력을 발휘한다고 한 말이 생각나서였다. 


그러나 내 기도가 너무 미약하지 않을까 하던 차에 할머니의 통성기도를 들으니 다소 안심이 되었다. 나의 웅얼거림보다는 할머니의 우렁찬 목소리를 하나님이 더 잘 들으실 수 있을 것만 같았다. 할머니가 목이 쇠도록 통성기도를 드리는 동안 뭐라 하는 사람은 한 명도 없었다. 나도 열심히 하나님께 화살을 쏘는 사이, 비행기는 안정을 찾았고 할머니의 기도소리도 잦아들었다.


이렇게 해서까지 무리한 착륙을 할 필요가 있을까. 돌아가도 되는데.


한참 전부터 이런 생각이 들었지만 나만의 생각일지도 모르는 일이었다. 많은 승객이 놀랐지만 비행 경력이 오래된 사람에게 이런 일쯤은 비일비재할 지도 모른다. 내가 이런 생각이 든 이유는 바로 내 옆자리 두 신사 때문이었다. 창가에 앉은, 예순 가까이 되어 보이는 서양인은 아까부터 까만 안대를 내리고 숙면 중이었던 것이다. 이 난리통에 잠을 잘 수 있다니! 나는 그가 혹시 기절한 게 아닌가 싶어 유심히 살펴보았다. 그러나 그는 들숨날숨을 고루 쉬며 세상 평화롭게 숙면 중이었다. 그러다가 기체가 어딘가에 충돌한 듯 덜컹거렸을 때, 그는 드디어 안대를 내리고 두리번거리더니 그의 옆자리, 그러니까 나의 옆자리이기도 한 남자에게 뭐라 말하며 낄낄 거리기 시작했다. 정말 '낄낄'이라는 의성어에 가까운 웃음소리였다.


저 여유는 무엇일까, 죽는 게 무섭지도 않은 걸까, 아니면 이 정도의 연착은 아무것도 아니라는 것일까. 대체 뭐라고 말하는 건지 너무 궁금했지만 바람의 거센 마찰 소리로 잘 안 들리기도 했고, 이 와중에 영어집중 듣기를 할 만큼의 여유는 내게 없었다. 노신사가 한참을 영어로 떠드는 동안  내 옆자리 아저씨는 아무런 대꾸도 하지 않고 그저 손잡이만 손가락이 빨개지도록 움켜쥐고 있었다. 토요일임에도 양복차림인 것으로 보아 두 사람은 아무래도 여수에 비지니스 때문에 가는 듯했다. 고액의 계약금이 걸린 미팅에 참석해야 할 수도 있고, 오래전부터 기획된 국제회의에 발제자로 참석해야 할 런지도 모른다. 그러니 다시 돌아갔으면 하는 생각은 나만 하는 것일 수도 있다.

속이 바짝바짝 타들어가는 사이 비행기가 여수 위를 돌기 시작한 지 한 시간 반이 넘어갔다. 그러니까 김포에서 출발해 두 시간 삼십 분을 넘게 하늘에 떠 있는 것이다. 기체가 요동칠 때마다 폭풍처럼 몰아치는 불안을 잠재우기 위해 팔짱을 낀 채 숙면 중인 노신사를 쳐다보았지만, 그리 도움이 되지는 않았다. 머릿속에서는 그동안 뉴스에서 접한 각종 비행기 사고들이 끊임없이 떠올랐다. 비행기 사고는 차 사고 확률보다 현저히 낮지만 사고 여파는 비교할 수 없다. 그리고 아무리 낮은 확률이라도 나에게 일어나면 그건 100% 의 확률, 수치의 따짐이 무의미하다.


'갑자기 곤두박질치게 될까, 비행기 파편들이 내 몸애 꽂혀서 죽게 될까, 아니면 바다에 떨어져 질식사하게 될까. 어느 쪽이든 너무 아프지는 않았으면 좋겠다. 통증이라면 너무 징글징글하다. 아, 이렇게 생을 마감하게 되는 건가. 수술이며 항암이며 개고생을 하고 이제야 좀 살아보나 싶었는데 결국은 얼마 더 살아보지도 못하고 죽는 건가.'


공포와 죽음은 밀접하다. 심장은 빨리 뛰고 입은 바짝바짝 마르고 신경은 팽팽해졌다. 극도의 스트레스 상황이라는 게 스스로도 느껴졌다. 죽을지도 모른다는 공포에 직면했을 때 느껴지는 스트레스 강도, 수치화할 수 있다면 최고치를 찍을 만한 그런 강도였다. 그러면서 동시에 든 생각은 이 스트레스가 꽤 익숙하다는 사실이었다. 암에 걸렸음을 처음 알았을 때와 항암 치료가 끝난 후 CT 결과를 들으러 갈 때 느꼈던 스트레스 정도와 비슷했다. 만약 무사히 살게 된다면 이 같은 스트레스를 어떻게서든 받지 않아야겠다는 생각이 들었다. 이런 절정의 스트레스를 정기적으로 받다가는 누구라도 제 명에 못 살 거 같았다.


기체가 또 요동치자 뒷좌석의 여성이 다시 흐느꼈고, 아까 그 아주머니가 울지 말라고 혼냈고, 나는 울 수도 있는 거 아닌가라는 반발심이 들었다. 그리고 나도 눈물이 또 주르륵 흘러내렸다. 그때 앞 좌석에 있던 어떤 아주머니가 소리를 질렀다.


"서울로 가요! 여수 안 가도 돼요!"


울부짖음에 가까운 절규였다. 참다 참다 내지르는 포효였다. 여기저기서 "서울로 가!"라는 동조의 소리가 나왔다. 여수에 안 가도 되는 게 나만의 생각이 아니었다. 눈물이 뚝뚝 떨어지면서도 실소가 나왔다. 너무 무섭고 안타까운데 어딘가 너무 코미디 같았기 때문이다. 그로부터 5분 뒤, 드디어 기장이라는 사람의 목소리가 나왔다. 기상악화로 여수에 착륙할 수가 없어 가까운 광주공항으로 착륙할 테니 이해를 구한다는 내용이었다. 그렇게 20분을 달려, 아니 날아서 광주에 들어섰을 때  창문 아래로 보이는 광주는 마치 스노볼 안에 있는 작은 마을처럼 아늑하고 따듯해 보였다.


 '살았다.'


비행기의 바퀴가 땅에 닿으며 활주로에 사뿐히 내려앉고서야 비로소 오그라들었던 손발이 풀렸다. 김포에서 출발한 지 세 시간만이었다. 동남아에도 갈 수 있는 비행시간, 무사해서 다행이라는 안도와 동시에 대체 이게 평범한 일인가 하는 의구심은 해소되지 않았다. '내리면 공항에서 별도의 안내를 받을 것'이라는 승무원의 말에 승객들은 어안이 벙벙한 얼굴로 순순히 따라 내렸다. 모두들 혼이 나간 얼굴이었다. 수하물 컨베이어 벨트 앞에 미리 대기하고 서있던 직원들이 잠시 뒤에 '여수터미널'과 '여수공항'으로 가는 고속버스가 올 것이라고 안내해 주었다. 항공사에서 해주는 대처는 이것이 전부였다.


버스를 기다리는 동안 사람들의 모습을 살펴봤다. 내 옆의 할아버지는 누군가에게 전화를 해서 "폭삭 또 늙어버렸어. 진짜 죽는 줄 알았네."라고 하였고, 컨베이어 벨트에서 짐을 기다리던 아주머니는 나와 눈이 마주치자 "우황청심환을 가져왔어야 하는데."라며 말을 잇지 못했다. 수십 번 비행기를 타봤던 남편도 ”이렇게 죽나 보다 싶었다“며 “어차피 한번에 갈 인생, 하고 싶은 거 하며 사는 게 낫지 않겠냐"는 씨알도 먹히지 않을 권유를 했고, 나는 “더욱 열심히 살아야 겠다는 다짐을 했다"고 응수했다. 여하튼 그 외국인 노신사만 빼고 모두들 놀란 것은 틀림없는 듯했다. 대기석에 한쪽에 할머니들이 모여 있길래 무슨 이야기가 나올까 싶어서 가보았다.


"나는 남자들이 무슨 소리라도 할 줄 알았어. 위험하게 착륙하지 말라고."

"남자들이 여자들보다 더 겁쟁이야. 나이 들면 여자 뒤만 졸졸 따라다니거 봐요."


아, 그러고 보니, 모두들 여자들이었다. 무서워서 소리 내어 울던 사람도, 울지 말라고 호통친 사람도, 하나님께 도움을 요청한 사람도, 서울로 돌아가자고 소리친 사람도, 모두들 여자였다. 문득 이슬아 작가의 <창작과 농담> 중 한 단락이 떠올랐다. '할배들은 남성중심의 경쟁사회에 길들여져 있기 때문에 자신의 부족함과 미성숙함을 드러내지 않는 반면, 할매들은 내려놓고 고난 속에서도 지혜를 구하고 실천한다'는 내용이었다. 책 속 내용과 할머니들의 대화가 많이 닮아 있어서, 그리고 기승전 아빠 험담으로 끝나는 엄마가 생각나서, 그 와중에도 흥미롭다는 생각이 들었다.




광주공항에서 20여 분간 버스를 기다리고 1시간 40분을 달려 여수터미널에 도착한 시간은 저녁 9시가 넘은 시간이었다. 그러니까 김포에서 4시에 비행기를 타고 여수에 도착하는데 5시간이 걸린 것이다. 시어머니는 도착시간이 두 시간 넘도록 가족 모두 통화가 되지 않아 뭔 사고가 났나 싶어 태산같은 걱정을 하시던 중이었다.


진땀 나는 시간이었자만,  이 경험 또한 시간과 함께 빠른 속도로 옅어질 테고, 그저 '정말 무서웠어' 정도의 모험담으로만 남기고 싶지 않았다. 어떤 유의미한 교훈을 얻을만한 특별한 순간인 것 같았고 그것이 무엇일까 생각해 보니 뉴스에서 접했던 대형사고로 이어질 뻔한 상황 속에 난생처음 있어 봤다는 것이었다.


기상악화 속에 한 시간을 비행하고, 다시 한 시간 반 이나 태풍 속에 착륙을 시도한 것은 너무 무리한 일이 아니었는지 의문이 든다.


물론 기장이 매뉴얼을 벗어난 판단을 내릴 확률은 매우 낮을 테지만, 없는 일도 아니라는 게 그간의 숱한 대형사고들- 배와 승객을 버리고 도망간 세월호 선장, 독일의 항공기 저먼윙스 부기장이 고의로 알프스 산맥에 추락한 사고 등등-로 학습이 되었기 때문이다.


밀폐된 공간에서 집단의 한 명으로 있어보니, 사람은 무의식적으로 다수에 동조되게 되기 쉽다는 것을 절실히 느꼈다. 김영하 작가는 이것을 '다수 동조 편향'이라고 말했다. 대구 지하철 참사 때에 사람들은 전동차 내부에 연기가 자욱해졌는데도 다른 사람들이 움직이지 않아서 동요하지 않았는데 바로 이런 현상을 일컫는다.  2011년 일본 미야기현에 대지진쓰나미가 덮쳤을 때 주민들이 대피하지 않아 칠백여 명이 사망한 사건도 이와 비슷한 현상으로 해석된다고 한다.


이번 여수행 비행기의 경우에도 극도의 긴장과 초조함 속에서도 그 긴 시간 동안 모두들 가만히 기다리기만 하던 모습이 인상적이었다. 핸드폰도 안 되고 공중에 떠있어서 별다른 행동을 하지 못하는 특수한 상황이었지만, 무리하게 착륙하지 말아달라는 내용 정도는 승객으로서 진작에 기장에게 전달했어야 하지 않았나 싶다.


<내가 하늘에서 떨어졌을 때>의 저자 율리아네는 "세상에서 완벽하게 안전한 곳은 없으며, 이런 생각은 곤경에 처했을 때 침착하게 대처하는데 큰 도움이 될 수 있다"라고 조언했다. 대부분은 무사히 일이 풀릴지라도, 이 사회에서 완벽히 안전한 곳은 없다는 생각을 가질 필요가 있다고 생각한다.

예측 못한 위험에 직면했을 때는 다수에 편향되어 그저 잠자코 있기보다는 공동의 질서를 해치지 않는 범위 내에서 침착하게 자신의 방식대로 맞서는 용기가 필요하다는게 이번 일로 얻은 나의 교훈이다.

‘가만히'는 나를 구원해 주지 않는다고, 가만히 잘 있는 나에게 당부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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