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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다흰 Mar 04. 2023

나에게 하는 말

영혼이 담긴 말에는 분명 힘이 있으니까


지난해 두 번의 퇴사를 했다. 잘하고 싶은 마음과 참을 수 없는 마음 사이에서 거듭한 고민 끝에 내린 결정들이었다. 우연이 반복되면 필연이라는 것을 알기에 ‘회사를 고르는 안목이 고작 이 정도인걸까?’, 혹은 ‘내가 문제가 있는 인간인가?’ 따위의 건강하지 않은 고민을 하며 스스로에게도 작지 않게 실망했다. 그럼에도 내가 단지 피고용인이라는 이유로 상사 혹은 대표로부터 당한 모욕을 감내할 필요는 없다는 교훈이 크게 작용했다. 이 교훈은 나의 첫 회사로부터 얻은 것이었다.


첫 회사는 한마디로 최악이었다. 인신공격, 가스라이팅은 기본이었고, 임금을 제대로 지불하지 않기 위한 꼼수, 나아가 직원을 동원해 개인의 부를 축적하고자 자행한 온갖 불법 등을 버틴 것이다. 무려 4년에 가까운 세월 동안! 은은하게 쌓인 모욕감은 적개심으로 폭발했다. 특히 성희롱을 시발점으로 한 직장 내 괴롭힘이 참을 수 없는 지경에 이르렀을 때 비로소 퇴사를 결심했다. 나는 말 그대로 꼭지가 돌았고, "성희롱 가해자들을 징계하고 싶거든 고소를 하라"는 이사의 지시를 이행한 것이 그곳에서의 마지막이었다.


고백하건대 그 무렵 나는 가해자들과 비슷한 연령의 남자 직장인은 모두 쓰레기로 간주했다. 나를 동료는커녕 사무실의 기쁨조 정도로나 생각하는 것이 투명하게 비칠 때 인간 말종의 실체를 보았고, 내가 조직 안에서 보여주는 퍼포먼스에는 전혀 관심이 없고 그저 퇴근 후 술자리에 어떻게 끌고갈지만 고민하는 것을 보고 난생 처음으로 누군가의 코로 들어가는 공기가 아깝다는 생각을 했다. 그런 존재를 앞으로 숨 쉬듯 마주치며 견디는 것이 사회생활인 줄 알았다.


그러나 일과 삶의 경험이 쌓일수록 내가 얼마나 상식이 통하지 않는 우물 속 개구리였는지를 실감했다. 애초에 그만큼 지독하게 도태된 사람이 여럿 모여있는 조직 자체가 드물뿐더러, 그 뒤로 만난 동료 대부분은 누군가를 집요하게 괴롭힐 정도로 한가하지 않았기 때문이다. 두번째 회사로 출근을 시작하고 머지않아 회사는 ‘하나의 목표를 이루기 위해 각자 맡은 과업에 몰두하고 또 협업하며 성취하는 곳’이란 것을 알게 됐다. 사실 최근 두 번의 퇴사를 결정하게 만든 장본인들 역시 첫 회사에서 봐왔던 사람과 마찬가지로 누구에게도 해선 안될 말과 행동을 하면서, 그걸 일의 연장선으로 퉁치는 치졸한 자들이었다.


얼마 전 한 기업의 면접 전형에서 겪은 일이다. 2차 인터뷰에 참석한 임원으로부터 이런 질문을 받았다. "실례되는 말이지만, 지원자님은 결혼 할 계획이 없나요?" 구조화된 면접에서는 예상하기 어려웠던 질문이었다. 왜인지 그 순간만큼은 모범 답안이 아니라 그냥 솔직한 답을 해야 할 것 같다는 생각이 들었다.


"사회초년생일 때는 결혼을 하지 않으려고 했습니다. 의사결정권을 가진 여성은 한 명도 없었던 마초적인 집단에서 롤모델로 삼을 수 있는 사람은 없었습니다. 그래서 가사 혹은 육아로부터 자유로워야 커리어를 계속 쌓을 수 있을 것이라고 오해했습니다. 하지만 여성이 리더인 조직을 보고, 듣고, 겪은 뒤 생각이 달라졌습니다. 결혼과 육아를 하면서도 여전히 커리어를 이어갈 수 있다는 것을 알았습니다. 어려움이 없진 않겠지만 가능하다는 것을 이제는 압니다. 그래서 결혼을 하겠다거나 결혼을 하지 않겠다고, 제 미래를 그런 이유로 장담하지는 않으려고 합니다."


꼭 입사하고 싶은 회사이기 때문에 잘 보이고 싶은 마음도 있었지만, 사실 그보다는 어떤 문제를 내가 통제할 수 있기를 바라는 마음이 컸다. 물론 잘 해내고 싶기도 했다. 그 마음이 정말로 절실해서, 그렇게 됐으면 하는 바람을 입 밖으로 한번 더 소리 내 말했다. 어떻게 들렸을지는 모르지만, 최종 합격 연락을 받은 것을 보면 내 진심을 전해졌을 수도 있겠다.


최근 진행했던 몇 차례의 북토크에서는 반대로 내 쪽에서 질문을 던졌다. '미래에도 변하지 않았으면 하는 것', '올해 꼭 이루고 싶은 목표' 같은 것을 묻고 마이크를 건네었다. 그러면 가슴 깊은 곳에 간직했을 그들의 크고 작은 바람은 말이 되어 돌아온다. 그 바람이 어찌나 간절하던지 어떤 목소리는 미세하게 떨렸고, 어떤 눈에는 뜨거운 눈물이 고였다.


누군가 던진 물음에 대한 답으로 보이지만, 실은 나에게 하는 말이 있다. 들어줬으면 하는 누군가가 바로 자신인 말. 내 입으로부터 나온 말은 내 귀로 들어올 것이다. 한 음절 한 음절 힘주어 꺼낸 선언은 이루어질 것이다. 정말로 그렇게 믿는다. 영혼이 담긴 말에는 분명 힘이 있으니까.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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