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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솔찬제티 Jun 02. 2023

거적할아버지의 비단자손

아버지의 가르침으로 자라나다


내가 태어나고 자란 마을은 초등학교 입학 당시 마을 앞으로 버스가 하루 딱 두 번 지나가는 비포장 도로의 먼지가 폴폴 날리는 촌 마을이었다. 봄이면 친구들과 냉이와 쑥을 뜯으러 온 들판을 돌아다녔고, 여름이면 엄마가 빨래하는 빨래터에서 붕어, 미꾸라지, 다슬기들과 멱을 감고, 가을에는 주로 알밤을 줍거나 감나무에서 홍시를 따서 먹고 놀았고, 겨울이면 비료포대 하나씩 들고 뒷동산에 올라 눈썰매를 타고 놀았다. 또래 친구들이 열명이나 되어 왁자지껄 하루도 조용한 날이 없을 정도로 재미있는 일상을 지냈다. 우리 집은 동네에서 가장 높은 집으로 마을 입구인 마을회관에서 부터 서서히 시작되는 오르막길을 한 참 오르면 작은 삼거리 왼쪽으로 대문이 나타난다.



나는 1남 6녀의 7남매 중 여섯째 딸로 태어나 부모님 사랑은 물론 할아버지 할머니의 사랑과 귀여움을 듬뿍 받으며 자랐다. 산으로 들로 철없이 쏘다니던 내가 드디어 초등학교 입학을 앞두고 아빠는 빨간 책가방과 빨간 체스판무늬 운동화를 입학 선물로 사 오셨다. 왼쪽 가슴에 이름표와 손수건 한 장을 옷핀으로 고정하고, 당시 유행하던 빨간 책가방을 메고 언니들과 입학식에 가기 위해 집을 나섰다. 셋째 언니, 넷째 언니와 함께 집을 나서며 안방에 계시는 할아버지 할머니께 학교에 다녀오겠습니다를 크게 외치고 부엌에 계신 엄마께도 인사를 드리고 언니들을 따라 나섰다.



40호 정도의 시골마을이지만 워낙 아이들이 많으니 학교에 가는 시간이면 골목길이 왁자지껄 사람 사는 마을의 향기가 동네 입구 정자나무까지 퍼질 정도였다. 나도 언니들이 학교 갈 때마다 매우 부러웠다. 학교 다녀오겠습니다라는 인사를 해보는 게 소원일 정도로 학교는 나에게 호기심의 천국쯤이었다. 더구나 나는 초등학교 입학과 동시 지역 최초의 급식시범학교에 다니게 되었으니 그 기쁨이 매우 컸다. 가장 기억에 남는 급식소동은 한 번도 먹어보지 못했던 카레가 급식으로 나오던 날, 그 냄새와 특유의 향 때문에 토하고 급기야 집으로 조퇴를 하는 사태까지 속출했었다. 이렇게 나의 호기심과 다양한 경험의 이야기를 안겨줄 학교로 향하는 발걸음은 마치 구름 위를 걷는 기분이었다.  안타깝게도 아빠가 사주신 빨간 운동화는 마루 밑 뚤방 뒤에 숨겨져 매우 소중하게 넣어둔 채 말이다. 어린 마음에 처음 운동화를 가지게 되어 아끼고 싶은 마음과 어딘지 모르게 편하지 않아서 한 겨울을 제외하고 늘 신고 다녔던 검정고무신을 신은 채 초등학교 입학식을 위해 학교로 가고 있었다. (당시 검정고무신은 나의 어린 시절 나와 함께했던 가장 애착이 있는 물건이다.)



나는 종종걸음으로 행여나 뒤처져서 언니들에게 잔소리를 들을까 정신없이 두 언니들의 뒤를 따랐다. 두 언니들 중 누구 한 사람도 아빠가 사준 운동화를 신었는지 검정고무신을 신었는지 몰랐다. 나의 입장에서는 입학식이라 들떠 있었고 언니들은 새 학기라 나름대로 긴장하고 설레어서 다른 일에 관심을 둘 여유가 없었을 것이다. 시골 학교의 입학식은 그리 요란스럽지 않았다. 교장선생님의 길고 긴 훈화말씀 및 축사가 있었고 교감선생님을 비롯한 선생님들 소개가 끝나고 우리를 맡아주실 담임선생님과 인사를 나누고 우리가 일 년 동안 생활 할 교실에 들어가서 서로의 얼굴을 확인하고 끝이 났다. 그중 반 아이들의 10명은 우리 동네 아이들이었다. 입학식이 끝나고 집으로 돌아오는 길에 친구들과 뒤섞여 서로 새 가방과 신발을 자랑하던 중 두 언니들과 친구들의 눈에 나의 검정고무신이 들어온 것이다. 친구들의 놀림과 언니들의 폭풍 잔소리에 머리까지 쥐어 박히고 그야말로 매우 개념 없는 엉뚱한 동생으로 언니들에게 얼마나 호되게 혼났는지 모른다. 두 언니들은 애가 저러고 학교에 간다고 나온 걸 보지 못했냐는 둥, 네 동생이니 네가 챙겼어야 되는 것 아니냐고 서로서로에게 핑계와 이유를 만들어 대고 있었다. 집에 돌아와 당당한 모습으로 엄마께 학교 다녀왔습니다라고 인사도 하지 못하고 세차게 등짝을 스매싱당했다.  새 신발을 멀쩡히 두고 왜 신지 않았냐며 말이다. 검정고무신은 집에서 신는 슬리퍼와 같은 개념이었으나 나는 편하고 익숙한 것에 이끌려 초등학교 입학식날 신었으니 말이다. 그렇게 나의 입학식 날 검정고무신사건은 끝나가는 듯했다.


저녁 밥상에서 두 언니들의 고자질로 다시 나의 검정고무신 사건이 새롭게 회자되기 시작했다. 아빠는 그날 군청에서 있었던 회의에 다녀오시느라 내용을 전혀 알지 못하셨다.  할아버지 할머니까지 계시는 상황이라 저녁을 먹고 셋째 언니와 넷째 언니, 나 이렇게 셋은 아빠의 부름을 받고 작은방으로 들어가 무릎을 꿇고 앉았다. 매우 기쁘고 자랑스러워야 하는 초등학교 입학식 날 종아리를 맞는가 싶었다. 아빠는 자녀교육에 대해 대단한 열정과 관심이 있으셨다. 우리 셋을 앉혀두고 꺼내신 아빠의 첫마디는 거적할아버지의 비단자손이 되어야 한다는 것이었다. 부모 공경이 첫째이며, 형제자매 간에 우애 있게 지내고 서로의 잘못을 보듬어 줄줄 알아야 한다는 말씀 이셨다.  아무리 가진 게 없고 모습이 초라한 집안의 어른이라 하더라도 그 자손교육은 제대로 잘 시켜야 덕망 있는 가문이라는 이야기를 듣는다는 것이다. 그런 가르침을 받으며 집안의 어른들이 비록 뒷바라지를 제대로 해주지 못했다 하더라도 그 자손들만큼은 제대로 된 가치관을 가진 자녀들로 자라나야 한다는 말씀이기도 했다. 나의 초등학교 입학식 날 검정고무신 사건은 지금도 자매들과 만나면 단골 이야깃거리로 심심치 않게 하곤 한다. 지금도 나의 아빠는 우리 형제들이 크고 작은 일에 의견차이를 보이거나 중요한 결정을 앞두고 있을 때 꼭 이 격언을 말씀을 하신다. '거적할아버지 비단자손이야 말로 제대로 된 교육이며 올바른 이치이다'라고 말씀하시곤 한다. 우리 7남매는 아버지의 이런 가르침 속에 지금도 자라나고 있다.

사진설명 - 얼마 전 모내기를 마친 논과 마을 앞 300년이 넘은 정자나무 배경이다. 들판에서 일을 할 때면 새참을 나눠먹고, 여름이면 동네 어르신들께 시원한 낮잠을 잘 수 있게 해주는 유일한 곳이기도 하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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