다문화가정 학습봉사활동을 통해 만난 제아
유리로 된 낡은 철문을 가볍게 세 번 두드리며
"제아야"
하고 잠시 기다린다. 안에서는 마치 무언가를 정리하는 듯한 바쁜 움직임이 느껴진다.
제아엄마는 나를 향해 웃으며
" 제아, 선생님 왔어요."
서툰 한국어로 인사를 하며 문을 열어준다.
"안녕, 제아, 신짜오 제아엄마."
제아의 쑥스러운 느낌의 인사를 받고 나는 밝게 웃으며 집안으로 들어선다. 매주 수요일 저녁이면 어김없이 제아네 집에 들어서며 베트남어인 신짜오로 인사를 한다. '신짜오'는 베트남어로 '안녕하세요'이다.
착한 가족 봉사활동을 시작하고 1년이 지나고 있을 무렵이었다. 내가 살고 있는 동네의 자원봉사 캠프의 캠프장님을 통해 제아 이야기를 듣게 되었다.
동주민센터 방문복지팀을 통해 다문화가정의 대상자로 아빠는 돌아가셨고, 엄마 혼자 아이를 키우고 있는 상황이라 학습지원활동이 필요하며, 제아가 초등학교에 입학하여 학습에 관련한 생활지도가 필요했다. 복지관 사례관리담당은 제아네 상황을 살펴보고 면담을 통해 봉사자를 배치하기로 했다는 것이다. 우리 동의 자원봉사 캠프 활동을 책임지고, 착한 가족 봉사활동을 이끌어 가는 캠프장님은 때마침 내가 적임자라는 생각이 들었다고 했다. 동네에서 공부방을 운영하고 있고, 같은 동이라 학습지원이라면 문제없다는 생각에서 제아를 연결해 주셨다. 그 인연으로 제아를 만나 매주 학습지원 활동을 하게 되었다.
제아는 텔레비전에 나오는 아이돌이 되는 게 꿈인 다문화가정의 초등학교 1학년 학생이다. 아이돌이 되어 유명해지면 엄마와 함께 베트남에 계시는 할머니와 좋은 집에서 사는 것이 꿈이다. 제아의 아빠는 제아가 태어 난지 6개월이 되었을 때 간암으로 돌아가셨다. 때문에 제아는 아빠와의 추억도, 기억도 없이 엄마와 단 둘이 살아가고 있다. 제아의 엄마는 제아를 혼자 힘으로 키워내느라 한국어 교육을 받을 기회를 놓쳐 한국어도 서툴렀다. 제아가 유치원을 다니는 7세까지는 보육 중심의 부모역할이 더 중요했기에 큰 어려움 없이 지낼 수 있었다. 안타깝게도 제아가 초등학교 입학을 하고 어려움에 부딪히기 시작했다. 우선 가정통신문을 제대로 볼 수 없으니 과제가 무엇인지, 언제까지 방과 후 활동을 신청해야 하는지 등등 어려움이 많았다. 그나마 다행인 것은 베트남에서 먼저 결혼하여 한국에 오게 된 제아의 이모가 울산에 살고 있어서 제아 엄마는 급한 대로 제아 이모의 도움을 받으며 제아를 학교에 보내고 있었다. 그나마도 멀리 떨어져 있어서 실질적인 도움을 받기는 어려웠다. 제아에게 이런 상황과 공백을 메꿔줄 봉사자가 필요한 순간이었다.
제아를 위한 학습 지원 봉사활동은 매주 1회로 2년이 조금 넘는 기간 동안 꾸준하게 이어졌다. 매주 수요일 저녁 공부방이 끝나면 제아네로 달려갔다. 제아 엄마는 내가 오는 시간을 손꼽아 기다리고 매우 좋아했다. 문을 열고 들어가기가 바쁘게 일주일 동안 학교에서 배부된 가정통신문을 내민다. 신청 날짜가 정해져 있는 가정통신문은 제아와 제아 엄마에게 설명해 가며 신청서를 작성하고 학교에 제출할 수 있게 안내해 주었다. 학기 초에는 챙겨할 일들이 많아서 때로는 제아 엄마가 전화를 걸어 어떻게 해야 하느냐고 묻기도 했다. 급한 경우는 요일과 상관없이 찾아가 일을 처리하기도 했다. 다행히 학교의 방과 후 수업이나 신청서등은 빼놓지 않고 챙길 수 있었다. 제아의 학교 생활에 필요한 부분은 제아 스스로 챙길 수 있게 했다. 제아는 야무진 편이라서 그 정도는 거뜬하게 해냈다.
제아에게 해 줄 수 있는 학습지원은 수학문제집과 국어문제집을 펼치고 한 주 동안 학교에서 배운 진도를 봐주며 놓치는 부분은 없는지 이해하고 있는지 등을 확인하는 것이었다. 1시간으로는 부족해서 공부량에 따라 조금씩 더 하기도 하고 학교 진도를 따라갈 수 있게 애를 썼다. 제아는 초등학교 1학년 과정과 2학년 과정 동안 힘들고 어렵지만 잘 따라와 주었다. 학교 체험학습을 다녀온 날은 피곤해서 꾸벅꾸벅 졸아가며 공부하기도 했다. 국어 단원을 공부할 때 특히 힘들어했는데 경험 부족에서 오는 이해가 느린 부분도 있어서 그럴 때는 매우 안타까운 생각이 들었다. 자연스럽게 가족과 생활하면서 알게 되는 어렵지 않은 실생활의 커먼센스 같은 것이다. 전문적인 지식이 아니라 일반적인 이해와 판단으로 충분하게 알거나 처리할 수 있는 것들조차 놓치고 있기 때문이다. 무엇이든 부족한 부분을 채우면 좋겠지만 제아를 위해 학교 학습 이외의 개입은 스스로의 발전을 나약하게 만드는 방해가 될 수 있기 때문에 신경 쓰이는 부분이었다. 봉사활등에 대한 이해와 책임등을 외면한 채 대상자와 만나고 활동을 이어가는 것 역시 만만치 않은 어려움이다. 활동에 대한 구분이 있지만 급한 일과 나중에 처리해야 하는 일이 있는 것처럼 내가 할 수 있는 일이라면 해주고 싶은 마음이 앞선 나로서는 학습지원활동이라는 활동이 힘든 부분도 포함하고 있었다.
장맛비가 억수같이 쏟아지는 날에도 제아와의 약속을 지키기 위해 바지까지 젖어가며 제아네 집에 들어서면 에어컨을 켜두고 수건을 가져와 발을 닦으라고 내미는 제아엄마, 날씨가 덥다며 미리 준비해 둔 코코넛을 내어주기도 하며 여름을 지냈다. 그 무렵 제아의 공부뿐 아니라 제아 엄마의 한국어 수업도 조금씩 봐주었다. 제아엄마 역시 이번에는 반드시 한국어 시험을 통과해야겠다고 다짐을 하며 열심히 공부했다. 베트남 여행을 앞둔 나는 자연스럽게 베트남어에 관심을 가지게 되었고, 간단한 인사말을 제아엄마에게 배우기도 했다. 처음 배운 말이 신짜오와 신깜언이었는데, 나의 모국어가 아니라 매우 서툴고 발음도 이상하게 느껴졌다. 언어는 자주 사용해야 자연스럽게 익힐 수 있어서 인사말을 알게 된 후로는 제아네 집에 들어서면 신짜오, 안녕하세요라고 인사를 했다. 공부가 끝나고 나올 때는 신깜언, 감사합니다라고 했다. 제아네를 방문할 때면 약속한 듯 우리는 서로 각자의 모국어로 인사를 했다.
제아와 2학년의 5월을 맞이할 무렵이었다. 다양한 경험을 하게 해주고 싶은 나의 마음은 멈추지 않았다. 고궁에도 데려가고 놀이동산도 가고 싶지만 안전사고를 포함 한 여러 이유로 선뜻 용기를 내지 못하고 있었다. 그러던 중 제아에게 이미 몇 주 전 물었었다. 외식을 해본 적이 있느냐고 말이다. 김밥이나 햄버거와 같은 간단한 음식을 사 먹은 적은 있지만 직접 가보지는 못했다는 것이다. 제아가 먹고 싶어 하는 음식이 뭐냐 물으니 자장면과 탕수육이라고 했다. 그렇다면 걸어서 갈 수 있는 곳에 맛집이 있었다. 수업이 끝나고 나오면서 제아 엄마에게 다음 주 수요일에는 따로 저녁식사 준비를 하지 말라고 당부했다. 수업을 마친 후 함께 나가서 외식을 하자고 말이다.
약속한 수요일 저녁 공부를 마치고 제아, 제아 엄마와 함께 근처 중식당으로 향했다. 탕수육과 자장면을 주문하고 이런저런 이야기를 나누며 맛있게 한 끼를 나누었다. 제아는 처음에는 조심스러운 눈치였으나 식사를 하는 도중 자장면으로 입주위를 다른 아이들처럼 티 내고 있었다. 그 모습이 귀여워 제아 엄마와 나는 눈을 맞추며 미소 지었다. 제아 엄마도 소소한 행복을 느끼는 표정이었다. 제아네 가족이 맛있는 한 끼를 경험할 수 있어서 마음이 참 따스했다. 다문화가정 아이와 학습지원 봉사활동이라는 이름으로 만나 공부하고 지낼 수 있었던 시간은 제아뿐 아니라 제아 엄마와도 재미있고 소중한 시간이었다. 제아의 학습지원 봉사활동이 끝나 갈 무렵 제아 엄마는 매우 아쉬워하며 걱정을 했다. 선생님을 이제 만날 수 없느냐며 말이다.
2년 동안 학습지원 봉사활동을 하면서 필요한 누군가를 위해 나의 재능을 나눌 수 있어 큰 보람을 느낄 수 있었다. 뿐만 아니라 지역사회의 한 사람으로 나도 성장하는 시간이었다. 나 자신에게 제아를 위한 학습지원이 지역사회 자원봉사활동의 범위를 넓혀가는 밑거름이 되기도 했다. 자원봉사활동의 특성 중 지속성은 봉사자와 대상자 모두에게 매우 중요한 부분이다. 어떤 활동은 일회성에 그칠 때도 있지만 제아의 사례처럼 적어도 2년 이상 꾸준하게 이어지는 활동이 필요한 곳도 있기 때문이다.
중학교 2학년이 되는 제아는 대한민국 중2라면 누구도 피해 갈 수 없는 증후군인 중2병을 겪지 않으며 순조롭게 지나가길 바라본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