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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솔찬제티 Feb 05. 2024

88세 아빠와 띠동갑 딸

농부 할아버지 서울 2박 3일 브이로그

이사하기 일주일 전 아빠는 전화를 걸어오셨다.

"이사허고나서 다음 주 28일은 어디 안가제?"

"네에 그럼요. 아빠, 어디 안 가요. 왜요?"

"이..... 이사 혔응게 이사헌 집도 한 번 가보고, 파주서 종중 정기총회가 있어서 그렁만. 그러먼은 나랑 파주 가서 회의허고 같이 올 수 있겄그만."

"아하, 파주 회의 있으시군요? 알았어요. 아빠. 충분히 가능해요. 걱정 말고 올라오셔요."

아마도 딸이 이사를 한다니 궁금하기도 하고 파주에서 하는 회의참석도 하실 겸 올라오실 계획이셨다. 


나와 띠동갑이신 나의 아빠는 외모 또한 나와 가장 많이 닮았다. 어렸을 적 동네 아주머니들은 내가 지나가면 저기 매우 양반 다섯째 딸 지나간다고 이야기를 하셨다. 엄마와 아빠는 결혼을 하시면서 당신들의 이름보다는 택호로 불리게 되었는데, 엄마의 친정은 면소재지의 가장 넓은 뜰이 위치한 "매우"라는 곳이다. 자연스럽게 그 지역의 지명을 따서 매우 댁과 매우 양반으로 불리게 되셨다. 그래서인지 모르지만 나는 '매우 양반의 다섯째 딸'이라는 수식어가 참 듣기 좋았다. 


나는 아빠와 성격도 비슷하고 닮은 부분이 많지만 왼손잡이인 공통점을 가지고 있다. 1남 6녀를 두신 부모님은 할아버지 할머니와 함께 사셨기에 아이들의 보육은 할아버지와 할머니가 맡아 키워주셨다. 할아버지는 직접 만든 대나무 파리채 하나로 오빠와 우리 여섯 딸의 생활교육을 담당하셨다. 아이들이 자라면서 기어 다닐 때가 되어 텔레비전에 손대려고 한다거나 할아버지 머리맡의 화로에 손을 갖다 댄다거나 할 경우는 대나무 파리채로 손등을 가볍게 툭 건드려 주며 "애비"라는 말씀으로 짧고 명확하게 행동을 제어하셨다. 젓가락질도 마찬가지였다. 끼니때마다 엄마는 최소 3개의 밥상을 따로 차려 할아버지가 계신 안방으로 들이셨는데 할아버지 할머니와 나의 막내 여동생이 겸상을 했다. 다음 상에서는 아빠, 오빠, 언니들이 오봉이라 불리는 상에서는 엄마와 나이가 가장 많은 큰언니, 둘째 언니가 함께했다. 당연히 내가 숟가락과 젓가락질을 배울 시기쯤 왼손잡이이니 파리채로 많이 맞은 듯싶다. 얼마나 혹독했으면 오른손으로 마치 타고난 것처럼 이렇게 잘할 수 있게 되었으니 말이다. 할아버지의 교육이 권위적이다 보니 아빠는 거스를 수 없어 지켜보기만 하셨던 것 같다.


27일 토요일 오후 서둘러 용산역으로 향했다. 아빠가 도착하는 시간보다 40분 일찍 용산역에 주차를 했다. 아빠가 좋아하시는 빵을 사기 위해서였다. 빵을 사서 차에 넣어두고 열차가 도착할 플랫폼으로 향했다. 2분 정도 지연되었지만 오빠가 예약해 준 특실에서 환한 미소를 지으며 나를 향해 내리신다. 

"일찍 나왔구먼?"

"하하하, 아니요. 일찍 안 나오고 그냥 적당히 나왔어요. 아빠, 특실 타고 오셨네요? 와, 저는 딱 한번 타봤는데 아들이 있으니 특실도 예매해 주고 호강하시는데요? 하하하."

"오빠한테 이야기를 혔더니 표가 없었는가 타서봉게 특실이그만. 옆에 젊은 사람이 뭐라도 드실 거냐고 물어본디 그냥 왔그만. 2시간이먼 오는디 뭘 먹고 말고 혀."

"물이라도 드시죠? 그건 서비스니까요. 사실 아빠 아무것도 안 드시고 오실 것 같아서 좋아하시는 빵 사놨어요. 저희 집에 가서 따습게 차랑 드시게요."

토요일 오후 5시가 되어가니 차량이동이 많았다. 



집에 도착하여 아까 사두었던 빵과 따뜻한 생강차를 달달하게 끓여 드시게 했다. 저녁에는 넷째 언니, 조카와 샤부샤부를 먹었다. 저녁을 드신 후 집으로 돌아와 일찍 주무시게 했다. 다음 날 파주의 종중회의에 일찍 가야 하니 주무시겠다고 하여 잠자리를 봐드렸다. 전기매트를 틀고 잠옷을 드리니 갈아입으시고나서 따뜻하고 좋으시다며 1분도 안되어 코를 골고 주무신다.



다음 날 6시 30분 아침 식사를 마치고 오전 8시가 되지 않은 시각에 파주를 향해 달렸다. 새로 생긴 고속도로 덕분에 1시간이 되지 않아 종중빌딩 지하주차장에 도착했다. 사무실로 올라가니 벌써 종손님과 종중이사님 몇 분이 와계셨다. 아빠를 모시고 함께 있으니 오시는 분마다 누구냐고 묻는다. 세상이 달라졌다고는 하지만 종중 관련 행사에는 여성 종중 가족들은 보이지 않는다. 10시 30분부터 시작된 회의는 2시간이 다 되어 마쳤다. 점심을 먹은 후 아빠를 모시고 회의에 참석하신 종중 이사님들과 인사를 나누고 서둘러 차를 타고 주차장을 빠져나왔다. 


"아빠, 저랑 함께 파주 아울렛 가보실래요?"

"아울렛이 뭐 허는 대여?

"아울렛에 가면 옷도 사고 신발도 사고 이런저런 물건을 살 수 있는 곳이요."

"여그서 가깝 가니? 그러믄 한번 가봐. 아직 시간이 그렇게 많이 안됬그만."

"좋아요. 그럼 파주 아울렛으로 가요?"

아빠가 입고 오신 패딩 점퍼를 하나 새로 사드리고 싶었다. 벌써 몇 해 동안 입으셔서 색도 바랬고 충전재도 좀 가라앉은 느낌이어서 마음이 쓰였었다. 분명 옷을 사자고 하면 안 가실게 뻔하니 구경을 목적으로 가보시자고 하니 흔쾌히 좋다고 하셔서 나 역시 마음이 좋았다.


아울렛에 도착하여 아빠를 모시고 남성복 매장이 있는 2층으로 이동했다. 올라가서 1층 전경을 내려다보시고는 이렇게 넓은 곳을 누가 지어서 만들었냐며 한참을 감탄하신다. 

"아빠, 잠바하나 새로 사시게요. 서울 오셨는데 예쁜 거 하나 사드리고 싶어요."

"왜?, 지금 입고 온 옷이 못쓰게 생겼가니? 아직 괜찮은디. 가볍고."

"아뇨, 괜찮은데 벌써 몇 년 입으셨잖아. 하나 새로 장만하시게요. 아마 엄마도 좋아하실걸."

"그려, 그럼 한번 가봐."



우리 아빠는 상당히 까다로운 분이다. 매장 5군데를 모두 둘러보고도 마음에 들지 않는다고 하셨는데 한 군데만 더 보시자고 졸라 간 곳에서 결국 선택을 하셨다. 옷감도 보시고 길이 특히 중요하게 보시는 부분이 있었는데 주머니의 위치와 개수였다. 지금 입고 계신 옷의 주머니 위치와 지퍼가 익숙한 탓인지 똑같이 나온 옷만을 찾으시는 통에 매우 어려움이 컸다. 매우 만족스럽지 않았지만 마지막 매장에서 옷을 구입하고 소매를 수선하여 시골집으로 택배를 받기로 했다. 


"아빠, 차 한 잔 하셔야죠? 피곤하시지?"

"아니, 농게 좋그만. 하나도 안피곤허고. 대처나 이렇게 넓은디 사람들도 많고."

일요일이라 그나마 사람들이 덜 붐볐다. 아빠는 신기한 도시사람들의 생활모습을 보고 이런저런 생각을 하시는 것 같았다. 아빠는 따뜻한 라테를 시키고 나는 따뜻한 아메리카노를 시켰다. 왠지 케이크 한 조각을 시켜야 할 것 같아 함께 주문하고 진동벨이 울리자 바로 받아 테이블로 가져갔다. 딸기 케이크를 맛있게 포크로 떠드시는 아빠를 보니 아기 같다는 생각을 했다. 입술에 묻힐까, 밑으로 흘릴까 조심조심 떠드시는 모습이 귀엽기도 하고 한편 어느 틈에 벌써 할아버지가 되신 아빠가 좀 더 꼿꼿하셨다면 하는 생각도 들었다. 1시간을 넘게 집안이야기, 우리 형제자매들 이야기, 농사이야기로 시간 가는 줄 모르게 아빠와 이야기를 나눌 수 있었다. 


아빠와 함께 한 2박 3일의 일정이 끝나가고 있다. 서울 병원에 다니러 오실 때면 항상 엄마와 함께 동행을 하시기에 이번처럼 혼자 오시는 경우는 드물다. 엄마가 함께 오셨다면 아빠의 불편함이 더 크셨을 테지만 아울렛을 돌아보며 지팡이 의존하지 않고 걸으시는 모습에서 오랜만에 아빠도 홀가분한 기분이셨을 것이다. 이사 한 딸 집에서 불편함을 뒤로 잠도 잘 주무시고 대한민국 최고 입담을 자랑하며 띠동갑 아빠와 함께한 시간이 참 좋았다. 내년에도 내후년에도 앞으로 아주 오랫동안 이런 시간을 함께한다면 더없이 좋을 텐데 말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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