해방감을 주는 그들의 개방성
뉴욕 생활을 시작하면서 가장 큰 걸림돌은 역시나 영어였다. 우리 모두 그렇게 영어에 투자하였으나 어린 시절 외국 경험이 없다면 누구나 영어 때문에 쪼그라들 수밖에 없다. 뉴욕에 온 지 얼마 되지 않아 동네 편의점에 클렌징폼을 사러 갔는데 원하는 브랜드가 보이지 않아 직원에게 물어봤다. 하지만 그녀는 도대체 내 cleansing 발음을 알아듣지 못했다. 그녀의 표정과 나의 절망, 부끄러움, 답답함은 오랫동안 잊지 않았다. Minority가 된다는 것은 이런 것일까? 하루아침에 상대방이 내 말을 알아듣지 못한다. 상대방은 나를 어떻게 생각할까? 원어민처럼 영어를 하지 못하니 나의 전반적인 지적 수준까지 아주 낮아지는 기분이었다. 중학생 수준의 영어로 대화가 가능하다면 그 정도의 지적 대화만 가능하다고 생각할까? 11년 전엔 없던 말이지만 정말 현타가 오는 순간들이 뉴욕 생활 초반에 많이 있었다.
미국에 오기 전 한국에서의 마지막 10년은 나의 10대 후반과 20대 중반이었다. 돌이켜 보면, 그 시절 나의 욕망은 아주 간단했다. 어느 정도 이상 주류의 기준에 맞추는 사람이 되어야 한다. (되고 싶다가 아니라 되어야 한다가 포인트!) 모든 것을 잘하고 싶었고, 프로젝트든 조직이든 상황이든 내가 주도하고 싶었다. 아마 많은 대한민국의 청소년과 청년들이 그렇듯이 자신만의 색깔을 찾기 가장 좋을 그 시절에 나는 그것보다 주류 사회의 기준에 맞추기 위해서 온 에너지를 집중했다.
항상 상황을 리드하고 싶었던 욕망덩어리던 내가 하루아침에 말도 못 하는 바보가 되어버렸으니 그 비참함은 정말 컸다.
하지만 뉴욕은 또다시 나에게 손을 내밀어 주었다. 이번엔 남편을 통해서. 영어 문제로 고생하는 건 유학 온 남편도 마찬가지였다. 특히, 인문학을 공부하러 온 그에게는 더더욱 눈앞의 현실이었고 장벽이었다. 전공 특성상 외국인 유학생이 거의 없었기 때문에 심적으로 의지할 동료마저 없었다. 마음고생을 한참 하던 그가 담당 교수를 만나러 갔다가 보물 같은 말을 듣고 와서 그날 저녁 나에게도 나눠줬다. 자신의 영어 실력에 자신감이 없어 토론 시간이 쉽지 않다는 남편에게 뉴욕에서 태어나 거의 평생을 뉴욕에서 산 80살의 노교수는 이렇게 말해줬다고 한다.
Don’t worry about your accent. It’s not your responsibility to make them understand. We live in New York City. Understanding what you said is their responsibility and my responsibility. That’s what takes to live in this city.
정말 약간 울컥했다. 너무 멋지잖아. 바닥까지 내려갔던 내 자존감이 이 말 한마디에 정말 많이 치유 되었다. 아직도 현역에서 왕성하게 활동하는 뼛속까지 뉴요커인 여든의 할아버지가 해 준 말이라 나에게는 더 큰 힘으로 다가왔다.
각자가 걸어온 다양한 인생의 길과 배경을 인정해 주는 태도가 개방성의 기본일 것이다. 하지만 내가 뉴욕에서 본 개방성은 단순히 타인의 다름을 인지하고 인정하는 수준에서 그치는 것이 아니었다. 다름을 내 일상과 삶 안에 받아들여야 한다. 상대방에게 네 악센트를 지우고 좀 더 본토 발음의 영어를 배우라고 무언의 강요를 하는 것이 아니라 그 사람의 악센트를 알아듣기 위해 귀 기울이고 애쓰는 모습이 내가 배운 뉴욕의 개방성이다.
이 과정은 당연히 나의 불편함과 수고로움을 요구한다. 하지만 뉴욕이 요구하는 삶의 자세가 이러한 개방성이라면 난 기꺼이 이곳에서 오래오래 살고 싶다. 모든 사람이 자신의 자리에서 가장 자신다운 모습으로 편하고 아름답게 살 수 있다면 이 작은 불편함과 수고로움은 감사한 마음으로 받아들일 수 있다.
남편이 전해준 노교수의 조언을 듣지 못했더라면 난 아마 한국에서 했던 것처럼 원어민의 영어를 구사할 때까지 나를 엄청나 푸시했을 것이다. 하지만 이 새로운 삶의 자세와 관점이 나를 해방 주었다. 그 뒤로는 내 영어를 못 알아듣겠다는 사람의 표정 앞에서 조금 더 당당해졌다. 온전히 나 혼자서 감당하고 그들에게 맞춰 나가야 한다는 생각을 버리니 내 태도가 달라졌다.
우리 앞에 2가지 길이 있다고 하자. 사는 것이 그렇듯 두 길 모두 고생스럽다. 첫 번째 길은 보이지 않는 누군가가 만들어 놓은 온갖 기준에 맞추기 위해 세상 모든 사람이 죽을 만큼 노력하면서 힘들게 사는 것이다. 학력, 취업, 사는 동네, 체형, 사적인 성적 취향, 언어, 기호 등등 모든 면에서 말이다. 기준에 맞는 척하기 위해 자신의 정체성을 숨기기도 해야 한다. 두 번째 길은 각자 자기가 원하는 모습으로 아주 버라이어티하게 사는 것이다. 그 차이로 인해서 생기는 다름을 받아들이기 위해서 우리는 어느 정도의 고생을 감수해야 한다. 어떤 고생스러움을 선택할 것인가? 어떤 고생스러움이 우리가 가장 인간답게 아름답게 살 수 있도록 하는 길일까?