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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Green Tree 한그루 Dec 15. 2022

캐나다에서 다시 써보는
어느 40대의 자기소개서

해고통지를 어떻게 받아들여나 하나

어느덧 40대 중반이 되었다.

내 인생에 한치도 오차도 허락하지 않으려고, 또 단 하루도 빈틈이라는 단어가 자리 잡을 수 없게 하려고 매일매일 정신없이 삶과 경쟁을 하며 살아왔다. 그러다 번아웃이 오면 그냥 무너져 내려서 하루 종일 유튜브를 보거나 잠을 자는 등 진짜 빈둥거리며 재충전을 했다. 사실 재충전이 되는지 아닌지는 지금까지도 모른다. 그냥 살아있음을 느끼고 행복과 불안과 감사함과 불평이 공존하면 그게 재충전이 되었다는 것으로 인식했다.


나는 대학교를 다닐 때부터 전공을 살려 영어강사가 되었다. 주위 선배들은 내가 학원에서 알바를 할 때면, "그러다가 거기에 뼈를 묻을 수 있으니 빨리 빠져나오라"라고 했다. 그런데 나는 아이들과 수업을 하면 뭔가 살아있고 능동적 존재가 되는 것 같아서 너무 즐거웠다. 그리고 그 어느 알바보다 시급이 높았다.


대학 졸업과 동시에 결혼을 하고 허니문 베이비를 가졌다. 아이를 낳고 약 1달 만에 일을 시작했다. 일이 너무 하고 싶었었다. 전 교직원이 외국인으로 구성된 영어유치원/어학원에서 코디네이터 일로 재기했다.

선생님이 아닌 경영파트에 들어가고 나니 교육계의 직업이 엄청나게 넓고 다양하다는 알게 되었다. 나는 이 일에 내 전 커리어를 걸어야겠다고 작정했다. 외국인 선생님들과 소통하고 결과를 도출해내는 과정이 꿈만 같았다. 마치 나는 한국이 아닌 외국에 메인스트림에서 사람들을 리드하고 있는 것만 같았다.


그래서일까, 진짜 해외에서 일을 해보고 싶었다. 이 경력을 더 연장하고 화려하게 만들어 주고 싶었다. 잠깐이지만 대학교 3학년 때 약 6개월 정도를 뉴질랜드에서 어학연수 경험이 있었지만 현지에서 일을 해 본 것은 아니기에 나는 정말 내 힘으로 영어권에서 배워보고 체험해 보고 싶었다. 그 열정이 결혼 시작부터 15년 동안이나 이민이라는 단어와 씨름을 하게 했다. (남편도 뉴질랜드에서 만난 터라 그 역시 해외 이민에 큰 관심이 있었다) 미국, 호주, 캐나다...그렇게 준비하던 중 한국에서 보육교사 2급 과정을 마치고 그 자격증을 캐나다 유아교사 자격증으로 교환하게 되어 드디어 캐나다에 취업을 하게 되었다.

물론 나는 한 커뮤니티 대학의 영유야자격증(ITE) 코스를 저녁에 다니면서 낮에는 풀타임으로 데이케어에서 근무를 했다. 사실 나는 비자에서 명시된 주 20시간밖에 근무를 못함에도 20시간이 넘는 시간에는 무급으로 일을 해가면서 열정으로 일을 배워나갔다.

결코 이 삶은 녹녹지 않았다. 생전 처음으로 '외노자'(외국인노동자)라는 단어를 실감했다. 우여곡절 끝에 영주권도 받았고 또 조건이 좋은 원으로도 이직을 했다. 또 이직을 했고..... 또 이직을 했고....참으로 우스운 것은, 영주권을 받기 전 약 3년 동안에 한 곳에서 일을 했는데, 영주권 후에는 뭐에 씌인 듯 이직에 이직을 했다. 집도 렌트를 했기에 여기저기 옮겨 다녔고 그에 따라 일도 옮겨 다녔다. 이곳 밴쿠버 외곽은 코로나로 인해 오히려 집값이 뛰었고(은행이자가 낮아서) 우리 가족은 더욱 자리를 잡지 못했다. 나는 이 상황을 타파하는 길은 더 좋은 스펙을 쌓는 것이라 생각했고 운이 좋게 꽤나 명망 있는 커뮤니티 대학교에 강사로 취직이 되었다. 그럼에도 입에 풀칠 기름칠을 하려면 나는 투잡을 뛰어야만 했다. 지금은 약 2년째 대학교에서 강의를 뛰면서 나머지 요일들은 데이커어에서 풀타임을 뛴다.

그렇다 난 주 6일 근무자다, 사업자도 아닌 급여자.... 한국에 있는 나로서는 상상해본 적 없는 근무환경이다. 그런데 그렇게 하고 있다. 가장 큰 부분은 소득원을 높이기 위해서였는데, 그렇게만 생각하면 너무 내 일도 생활도 싫어질까 봐 나에게 매일 최면을 건다. '나는 정말 운이 좋은 사람이라고, 주위 모든 사람들이 대단하다고 엄지척을 해주는 길을 걷고 있다고, 또 아이들의 미래를 책임지고 있는 교육가다"라고 말이다.


그러다 하나의 큰일이 일어났다.

최근에 나의 열정과 지식과 모든 스킬을 다 사용해 인정을 받고 계속 일을 하고 싶었던 원에서 단 하나의 어떤 사건으로, 나와는 대화를 시도하지 않고 그냥 나를 떠나보내고 싶어 했다. 여기는 3-6개월의 수습기간이 있는데, 그 기간에는 고용주도 고용인도 서로 선택을 할 수 있다 아무 제약없이. 

사실 그곳 조건이 너무나 좋은 곳이었고 나도 정말 최선을 다했었는데, 아이들도 너무 달라져 심지어 다른 반 선생님들 조차 알아차릴 정도였는데 왜 이런 일이 일어났을까. 


나는 항상 일은 내가 주도하는 것이라고 생각했다. 내가 열심이고 일의 주체가 된다면 누구나 알아줄 것이라고 생각했다. 또 그렇게 살아왔다. 내가 일과 일터를 선택하는 것이고, 경영자는 나의 선택으로 좋은 인재를 덤으로 얻게 되는 행운을 갖게 되는 것이라고 말이다.  하지만 내 인생 최초로 내가 의도하지 않았는데 나를 배척하는 곳이 나타나다 보니 인생에 빨강등이 들어왔다. 


그 결과를 받아들이는데 솔직히, 화만 삭히는 데에만 2주가 넘게 걸렸다. 싸워야 하나 신고해서 정의를 찾아야 하나 별의별 생각을 다했다. 그런데 그 일들을 진행하려다 보면 특히나 이렇게 느려 터진 나라에서는 나의 미래의 시간도 온전히 이 과거의 사건을 해결하는데 모두 소진해야만 했다. 미안하지만 이곳 캐나다에서 약 5년 이상을 살다 보니 그런 일에 나를 불태우고 싶은 여력이 남아있지 않았다. 그러던 중 책을 한 권 만났고 그 책이 또 다른 책으로 나를 인도했다.


현재 나는 내 인생의 큰 틀을 다시 짜고 있다. 나는 새 프레임을 가지고 한 번도 시도해보지 않았던 일들을 시작하고자 한다. 왜냐면 지금 나는 앞으로 살아갈 날들에 비해 가장 총명하고 가장 열정적이며 가장 에너지가 넘치는 시기이기 때문이다.


이 글이 첫 번째 화살이 될 것이다.


내가 앞으로 공유하고자 하는 삶이 누군가에게는 희망과 격려가 되길 바란다.

그 나이가 어디에 속해있든지 간에....'La beaute n'a pas d'age' [라 보떼 나 빠 다즈] (프랑스어) 아름다움은 나이에 상관하지 않는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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