brunch

오랜만에 드라마

기분이 좋구나

by 내복과 털양말

아들에게,


점점 더워지는구나. 습기가 기세등등해졌어. 곰팡이와 본격 전쟁을 벌여야지. 엄마에겐 매직 블록과 독일산 곰팡이제거제가 있으니 올해도 싸울 만하겠어.


엄마는 오랜만에 마음에 드는 드라마를 보았어. 너랑 같이 보지는 못하지. 너는 재미없어하니까. 어른이 등장하는 드라마 중에 너와 함께 보는 건, 발레 하는 형님이 발레를 하고 싶었던 할아버지를 만나며 벌어지는 이야기지. 우린 막 크게 이야기하며 보잖아. "엄마, 저 가족들은 할아버지가 해보고 싶은 거 왜 못하게 해요?"라거나, "저 형님 춤추는 것 마치 새가 날아오르는 것 같아요."라거나, "엄마, 저 할아버지가 만든 전복죽 되게 맛있겠다요."라거나, "엄마, 저 할아버지는 참 따뜻한 사람이다요." 하는 말을 하면서. 나는 네게 때로는 사랑도 화로 표현되기도 한다는 둥, 춤추는 형님들은 정말 멋지다는 둥 하면서 현대무용, 발레, 한국무용하는 형님들이 나와서 춤 대결하는 장면도 찾아서 보여주지. 그럼 너는 "엄마, 나 좀 봐봐요." 하면서 춤을 추는데 현대무용 하는 형님들처럼 굴러다니기도 하고, 엄마의 부채를 쥐고 한국무용하는 형님들처럼 포즈도 취해. 엄마는 막 박수를 치면서 너를 보는데, 역시 너는 나의 빛나는 행복이라 멋진 형님들 보는 것보다 네 춤에 더 몰입해서 본다니까. 앗, 이야기가 샜네.


주말에 네가 잠든 뒤 살금살금 나와서 그 드라마를 끝까지 몰아보았어.

이 드라마에는 스물아홉 살의 방황하는 청춘들이 나와. 빛나는 재능을 가진 유명 피아니스트와 음악을 너무 사랑하여 경영대를 졸업하고 다시 사수 끝에 음대에 들어갔지만 평생 음악만 해온 예중, 예고 졸업생들 사이에서 실력에 밀려 점점 자신이 초라하게 느껴지는 바이올리니스트가 나오지. 복잡한 인생사, 무거운 짐 같은 현실에 상처받으면서도 용감하게 사랑하고 상처받고 다시 또 사랑하는 이야기였어. 엄마는 오랜만에 가슴 설레어하면서 그들을 지켜보았지. 스물아홉을 지나온 지 한참이나 지났는데, 마음은 아직 나이를 먹지 않았는지 어쩜 그리 순식간에 이입이 되던지.


피아니스트는 자기가 힘든 걸 남에게 말하지 않는 사람이야. 네 아빠와 비슷하지. 남에게 이야기한다고 해서 해결해 줄 수도 없는 걸, 굳이 말해서 함께 힘들어야 하느냐고 말해. (어쩜 네 아빠의 말과 저렇게 똑같은 소리를 하는지 놀랍더라.) 아무 말 없으면 그저 잘 지내나 보다, 생각해 달라고. 그런 그가 사랑을 잃고 힘들어하면서 얼굴이 많이 상해 보이지. 피아니스트의 엄마는 아들을 걱정하면서 산책하고 오겠다는 아들에게, 하긴 네가 힘들어도 힘들다는 말을 하는 애도 아니고, 하며 말을 줄이고 우산을 챙기라고 말하거든? 그때 그 피아니스트가 엄마에게 처음으로 말해. 엄마, 나 너무 힘들어요. 그리고 울어버려. 고개를 푹 숙이고. 그랬더니 그 엄마가 아유, 아유 세상에, 하면서 더 말을 잇지 못하고 아들을 끌어안고 등을 토닥여. 엄마는 그 부분에서 눈물이 터졌지. 피아니스트 역을 맡은 남자 배우가 연기를 잘했더라고. 그 남자의 마음도 느껴지고, 그런 아들을 보고 그저 끌어안고 토닥이는 엄마의 마음도 느껴지고, 마찬가지로 연기를 잘하는 여자배우가 바이올리니스트로 나와 내 지나온 청춘을 곱씹게도 해주더라. 네겐 내가 그저 엄마이지만, 이 세상 누구나 그렇듯이, 자기만의 역사라는 게 있으니까.


두 명의 내가 드라마를 본달까. 젊은 날의 나와, 아들을 가진 엄마인 내가 나란히 앉아서 울었네. 나중에 내 아들도 저런 사랑을 하겠지? 했으면 좋겠다 싶기도 하고. 아무 근거도 없는데, 나는 네가 자라나서 그 피아니스트 같은 성격이 될 것 같다는 예감이 들기도 했어. 수줍고 예의 바른 인물들이지만 자기의 감정에 솔직한 인물들이라 더없이 좋았어. 잔잔한 바다의 수면 같은 드라마 속에 진한 감정이 해류처럼 흘러. 인생에서 그런 사랑을 만날 수 있다면 평범한 우리도 찬란한 순간을 갖게 되지. 오랜만에 드라마에 푹 빠졌네. 기분이 좋구나.


이제 다시 현실로 돌아와야지. 설레며 기다리던 초강력 불빛의 손전등이 도착했으니 이제 해가 지길 기다렸다가 곤충채집통 챙겨서 출동해 보자고! 지극정성 사랑으로 키워봤자 나중에 다른 여자한테 줘야 하는 게 아들이라고들 하던데, 엄마는 괜찮아. 다정한 네 아빠 만나 마음이 호강하는 엄마처럼, 한국에서 자라나고 있는 다른 한 명의 여자도 다정한 너를 만나 호강해 봐야지. 일단 지금 눈앞에 펼쳐진 네 유년을 함께 즐겨보자!




사랑해.

엄마가.


keyword
이전 14화내가 해결할게요