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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유시안 Jan 08. 2020

비와 뱀

잘고 가느다랗고 선명한_200107

 겨울비가 추적추적 내린다. 일기예보에서 한 사흘 비 올 거라더니, 정말 이틀째 비가 온다. 일기예보가 딱 들어맞을 거란 기대가 없어서, 우산을 준비하지 않았는데, 대표님께서 사무실에 굴러다니는 투명 비닐우산 하나 급히 챙겨주신 것을 요긴하게 쓰고 있다. 종일 내리는 비는 오랜만인 것 같다.

 아침에 한 친구가 '비가 오면 너는 어떤 기분이야?'라고 물었다. 나는 비가 오면 기분이 어떻냐고 물어봐주는 것 자체가 신기해서 한동안 먹먹해져 있다가 '오랫동안 마르던 마음이 적셔지는 기분이야. 까슬까슬한 피부가 조금 촉촉해지며 상태가 나아지는 기분도 들어. 차 가진 사람들은 운전하느라 성가시겠구나─하는 생각도 들어. 그리고 비 오면 신발과 양말이 젖는데, 그걸 아주 싫어하는 사람이 생각 나. 비 오면 축 늘어져서 평소 능력치의 30~40% 정도만 발휘하게 되는 사람을 알고 있어. 비 오고 흐린 날씨를 흐뭇해하고 사랑하는 사람도 알고 있어. 그리고...' 하고 내 생각이 이어지는 것을 알고 좀 더 성마르고 건조하게 대답했다. "다 내리고 나면 좀 덜 건조하겠구나 싶지. 난 이 겨울의 낮은 습도에 고통받고 있어. 비가 다 내리고 나면 덜 고통스러울 거야."


 집에 돌아와 보니 택배물 5개가 있다. 하나는 예전에 후원했던 소설. 다른 하나는 ADsP 수험서. 밀가루 없이 만든 떡 같은 빵. 대용식과 두유 박스. 마지막은 휘뚜루마뚜루 입기 좋다는 기모 맨투맨 원피스 찐 보라색. 한 번도 사 본 적 없는 옷 스타일이라서 두근두근. 메신저 이모티콘에 보면 있는, 택배 받고 좋아하는 표정, 희열에 들떠 눈 튀어나올 것 같은 표정, 그 표정이 내 표정. 읭? 택배가 5개 하고 이름을 확인하며 다 내 것임을 확인하고 내가 시키긴 많이 시켰구나, 했다. 우리 집에는 3.5명이 살기 때문에, 내 택배가 맞는지 잘 확인해야 한다.


 오늘은 회사에서 직원들과 함께 점심을 먹다가 스무 살 무렵에 뱀에 물렸던 이야기를 하게 됐다. 이야기를 하게 된 원인은, 근 몇 개월간 내가 운동을 하는 것에 열을 올려왔는데 12월 초 심하게 넘어지면서 오른쪽 무릎에 골좌상(이것을 쉬운 말로 '뼈멍'이라고 부른다.)을 입고 약 두 달간 운동을 쉬어야 한다는 이야기를 해서였다. 점심시간에도 헬스장에 가고, 저녁에도 시간 되면 헬스장에 가던 생활을 한두 달 했었는데 지병 같은 우울이 많이 잦아들고(덕분에 시도 거의 못 썼지만) 운동하는 시간에 '생각하는 정신'에 시달리지 않아서 좋았다. 하지만 그걸 요새 못 하니까 허전하고, 근육이 찢김을 원하는 것 같고. (....) (PT쌤 잘 계시죠. 저 2월에 꼭 갈게요...)

 아무튼, 무릎 아파서 어떡하냐, 저는 요가하는데 너무 좋더라, MJ님은 복싱하신대요, 저는 유도 했었는데 유도는 사람 둘이 엉겨야지만 할 수 있는 거라 복싱 같이 조금 떨어져 있어도 기술 가능한 스포츠가 배우고 싶더라고요, 복싱하면 다 남자들만 있지 않아요?, 아니요 요새는 성비 비슷해요, 요가는 거의 다 여자잖아요, 남자 오면 청일점 되더라고요, 맞아요 아주머니들이 막 여기 XX총각 자리야 하면서 자리도 맡아 주더라고요, 그래도 난 마라톤이 좋아, 복싱하면 맨날 (붕대) 감지 않아요? 그거 감다 시간 다 가던데, 맞아요 시작한 지 삼일 됐는데 감는 것만 30분 걸렸어요, 일동 웃음, 시안님은 언제까지 운동 쉬셔야 한대요?

 그러게, 오른발에 저주가 걸렸는지 스무 살엔 뱀에 물렸고 스물여섯 살에는 오토바이 사고로 오른 발목을 다쳤다. 사고 당시 내가 오토바이에 타고 있었냐고 종종 질문하는 사람이 있는데, 오토바이를 사서 타고 다니는 취미는 내가 재산이 한 몇 백억 원 수준이 되면 갖고 싶어도 될 것으로 생각한다. (살아생전 아마 안 탈 거라는 뜻) 아주 어렸을 때 오토바이 좀 많이 얻어 탔기에 오토바이 뒷좌석 타는 건 많이 해봤고, 운전해보고 싶은 마음도 크지만, 사고 위험에 대해서도 아주 잘 알기에, '오토바이 타고 있다가 다친 거냐'는 질문에는 '당연히 아니다.'라고 대답해줄 수 있다. 내가 다녔던 중학교 옆에 있던 고등학교에서 오토바이 타고 죽었다는 사람이 두셋 된다. 중학교 재학 3년 내내 두셋이면 일 년에 약 한 명 꼴인데, 숱하게 죽었단 느낌이다. 대학교 신입생 때 굴다리 밑에서 오토바이도 날아가고 사람도 날아가는 사고 목격 후로 오토바이 사서 타고 다니겠다는 생각은 접었다.

 

 오토바이 얘기로 8줄을 썼네? 아무튼 두 번째 사고에 대해서는 나중에 다시 언급하기로 하고, 뱀 물린 얘기 다시 해보겠다. 8월 말 개강총회를 하고 늦은 귀가를 하던 중, 아파트 주차장을 지나다 뱀에 물렸다. 처음에는 철사에 찔린 줄 알았다. 세상천지 아파트에 어디 뱀이 있어? 뱀, snake, 蛇, 그냥 글자로나 화면으로만 알던 것을 본다고 내가 실감할 수 있었겠느냐만은, 머릿속에 넣고 다니지 않을 때는 더더욱 생각해내기 어렵다. 나는 T-스트랩 힐을 신고 있던 내 발등을 찍은 것이 뱀 이빨일 것이라고는 그 당시에 생각해보지 못했다. 술도 못 마시지만 혈기에 두어 잔 걸치고(두어 잔이 내 최대 주량이었다.) 어찌어찌 귀가 중이었던 나는 엄격한 집안 분위기 덕에 혼날 것만 걱정하며 적군에 쫓기는 사람처럼 집에 가고 있었다. 지금, 철사에 찔렸다고 해서, 주변을 주의 깊게 살피거나 부상에 대해서 염려할 만한 정신 상태가 아니었다는 것이다.

 철사에 찔리고(뱀에 물리고...) 아파트 로비에 들어서는 데까지 1분 20초쯤, 엘리베이터 기다리는 데에 1분쯤, 올라가는 데에 약 1분쯤 걸린 것 같은데, 이미 로비에 서 있을 때부터 너무 아팠다. 이야, 철사에 찔린 것 치고는 너무 아프네. 라고 생각했다. 그때 문자 주고받고 있었던 친구를 기억한다. 그 친구에게 내 부상을 사진으로 찍어 보내곤(아이고 철없다...), '헐, 나 발등에 피 남!!' 정도로 문자 했던 것 같다. 다들 잠든 자정이 지난 밤, 조용히 들어가 옷을 대충 갈아입고 화장 지우고 세수만 하고 자려는데 아 글쎄, 너무 아팠다. 세수할 때 한 발로 서서 세수하고 엉금엉금 기어서(!) 방에 이부자리 펴고 누웠다. 밤새 나는 장판과 벽지를 긁어댔다. 오므려도, 펴도, 다리가 너무 아팠고 다리가 부어오르기 시작했다. 식은땀이 나고, '아, 이대로 죽나? 파상풍인가?' 같은 생각을 했다. 새벽이 오고 단죄(?)의 시간이 왔다. 부모님께서 방문을 홱 열고 '너 어제 몇 시에 들어왔...읭?' 하셨다. 혼내려고 문 열었는데 딸이 다 죽어가는 걸 보시곤, 이래저래 물으시더니 '이거 뱀 (물린 것) 같은데.'라며 부랴부랴 들처 업으신다. 결론적으로는 시골에서 자란 아버지 눈이 틀리지 않았던 것이다. 뭐 아무튼 환자는 응급실로.

 처음에 작은 병원 가서 피 뽑고 소변 검사하고 입원까지 했는데, 당직의 말고 담당의가 따로 왔는지 나를 큰 병원으로 이송하라고 처분(?)을 변경했다고 한다. 뱀독에는 보통 두 종류가 있고 용혈독이면 괜찮은데 신경독이면 하반신 마비될 수 있으니 속히 가라는 게 메시지였다. 진통제 좀 맞고 삶이 펴서(?) 병원에 동행해준 동생이랑 병원 침대가 크네 마네 둘이서 소시지빵 먹을까 말까 시시덕거리고 있었는데 '하반신 마비'이러니까 그 키워드가 주는 공포감이 커지거나 실감이 나지는 않았다. 마치 남의 일처럼 '대박이네.' 했던 게 지금 생각하면 참 대박이다...

 우여곡절 끝에 큰 병원 응급실에 들어서는데 (들것에 들려 가다가 마지막에 잠깐 부축받으며 응급실에 들어섰다), 응급의학과 의사 간호사 선생님들 우르르 (지금 기억엔 3~4명) 곁에 오셨던 게 기억난다. 뱀 물린 지 약 9시간 째인데 안 죽고 살아있다며, 왜 이제야 왔냐고, 몸에 뭐 붙이고 그러길래 그때서야 '아, 많이 심각하구나.' 했다. 작은 병원에서 했던 피 검사, 소변 검사 등등 다 다시 하고 결국 입원했다. 그때 내가 과외 5개 할 땐데, 과외비 번 것으로 전부 병원비 냈다. 다행히 신경독 아니고 용혈독이어서 하반신 마비는 오지 않았고 대신 수혈을 많이 받았어야 했다. 과외를 미루게 생겼으니, 학부모님들께 전화를 드렸는데 첫 전화에서 '어머님, 제가 뱀에 물려가지고요, 병원인데요, 그래서 수업을 한 두 번 미뤄야 할 것 같은데요'로 운을 떼니 '과외하러 오기 싫으면 싫다고 하지 웬 뱀 핑계여?' 싶은 못마땅함이 느껴져서 두 번째 전화 돌릴 때부턴 요령껏 '제가 성모병원에 입원을 하게 되어서요...'라고 더 불쌍한 어조로 얘기했다.

 

 병원 생활 이야기, 거기서 만난 인연, 뱀에 물리기 전후로 내 인생철학의 변화 등에 대해서 다 얘기하고 싶지만 또 날짜가 바뀐 고로 다음에 힘이 생길 때 다시 써보도록 하겠다. 골좌상을 뼈멍이라고 설명하니 '뼈도 멍이 들어요? 멍든 건 보통 핏줄 터져서 그런 거 아니에요?'라고 하길래 그냥 이해하기 쉽게 뼈멍이라고 한 거라고 얼버무렸다. MRI까지 찍었는데, 보니까 희여멀건한 뼈에 확실한 흰 점 같은 것들이 뭉친 게 보이더라. 이런 거 보통 교통사고 나면 생기는 건데, 도대체 얼마나 심하게 넘어지신 거냐고 의사가 반문할 정도였다. 교통사고는 아니시죠? 한 번 더 물어봤다. 네...그냥 낮은 계단 한 칸 아래로 넘어진 거예요...


 오늘 K1과 K2는 점심때 마주 앉아 밥을 먹었다. 나는 농담으로 'K1님! K2님 앞에 있는 거 괜찮아요? 자리 바꿔드릴까요?'라고 했고 K1님은 웃으며 괜찮다고 했다. 둘은 별다른 문제 없이 소통하는 것처럼 보였다. 하지만 오후에 K2가 K1에게 또 화내며 업무 지시를 했다. 감정의 진폭이 커지는 것을 느껴 나는 자리를 피했다. 예전에 변호사가 되고 싶었던 적이 있다. 꽤 오랫동안 변호사라는 직업에 기준을 둬왔다. 지금 와 생각해보면, 갈등이 첨예하기 벌어지는 자리에서 한쪽을 변호해야 하는 일이다. 물론 문서작업과 영업이 더 많고, 감정 노동에 가까운 일들이 더 많으리라는 것은 이제 사회생활을 해봐서 짐작 가능한 일이지만, 변호사라는 직업을 막연히 동경할 때에는 흔히 법정 싸움에서의 멋진 변론을 떠올리지 않나. 나는 누가 누구를 싫어하고 증오하고 이기려고 하는 일에 대신 나서준다는 것이 나에게 무척 힘든 일이라는 생각을 하게 되었다. 약자를 변호하고 돕는다는 중요한 책무, 법을 수호하고 생활에 적용되도록 하는 일에 대해서는 좋다고 생각하지만 그 과정에서 감정의 진폭이 큰 첨예한 갈등이 있을 때 시 쓰는 마음을 갖고 태어나서 과연 제대로 변호할 수 있었을까? 생각해본다. 좋은 사람이 되고자 하는, 내 좋은 사람 콤플렉스가 아무래도 걸림돌이 되었을 것이다. 이거 신포도 아니냐고? 신포도 맞다.


 처음 몸 담았던 직장의 같은 팀 동기가 과장이 되었다는 소식을 들었다. 같이 춤도 추고(?) 업무 하며 깨지고 해외로 출장도 다니던 사람이었는데 과장이라고 하니 멀게 느껴진다. 이제 과장 타이틀도 낯설지 않은 때가 되었구나. 직책이 뭐가 중요해, 하다가도 막 쏟아버린 커피에서도 느껴지는 미약한 열기처럼 '아쉽다'는 마음이 내 안에 있는 것을 느꼈다. 이런 건 인스타그램을 할 수 없으니까 브런치를 하고 있는 것이겠지. 서랍에 닫아 가둬둔 감성을 꺼내기에 브런치가 좋기는 하구나. 추억팔이로 살아가는 나이가 되어버렸나. 생각에 모터가 달린 것처럼 다다다, 다다다 계속 과거가 펼쳐진다.


  Quora (미국판 지식인 같은 것) 에서 메일을 받아보고 있는데 오늘의 질문은 "How can one live alone and happy?" 이다. 어떻게 사람이 혼자 그리고 행복하게 살 수 있죠? 보면 '1. 자기 자신을 향상시킬 수 있는 단기 목표를 세워라.', '2. 새 언어를 배워라.', '3. 자기 자신이 자랑스러울 만한 일을 해라.', '4. Quora를 시간 날 때마다 봐라(유머인듯)', '5. 기술 영상이나 스탠드업 코미디 같은 자기가 좋아하는 유** 비디오를 봐라.' , '6. 표준 몸매를 유지해라', '7. 부모님을 기쁘게 해라.' 였다. 적어도 2,4,6,7을 하려고 노력할 순 있겠네.


 사무실엔 면접 보러 오는 사람들이 자꾸 있고, 그만큼 보내야 할 사람도 늘어난다. 연락이 끊기고 삶이 겹치지 않는 것에 너무 아쉬워하지 않게 되는 때가 오긴 올까? 단기적 목표에 집중하고, 내 자신을 자랑스럽게 할 일을 해내면 될까? 삶에는 정답이 없고, 한 템포 쉬어가는 것이 너무 필요하다고, 생각하고 있다. 산문집을 펴내고 싶다고 생각만 했는데, 미국 여행이나 영국 여행 같은 것을 주제로 글을 써봐도 몇 꼭지 쓸 수 있겠다. 내가 아주 특별한 누군가가 아니라, 생활인이고 글쓰기를 좋아하는 사람이라고 객관화하려고 노력하고 있다. 그렇기에 좀 더 건조한 어조로 더 발랄한 어조로 나 자신을, 내 잘고 가느다란 일상을 선명하게 풀어놓을 수 있으리라.


 자랑할 것은 못 되지만, 혹자의 눈에 미천한 인간일지 모르나 평범에 다가서려고 노력하고 있는 나 자신이 대견하여 오늘도 적어둔다. 아, 하루 더 살았다. 그리고 방금 휙 날아가는 무언가가 모기인 것을 확인하였다. 엥, 지금 1월인데요? 방 안에 모기가 있다. 우리 집 내에 모기 서식지가 있는 게 분명하다. 하긴, 아파트 단지에서도 뱀에 물리는데, 뭐. 하아. 오늘 자긴 글렀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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