아이의 양심과 자존심을 지켜주는 방법
"여보 잠깐 우리 함께 가족회의 좀 해요."
딸아이와 둘이 뭔가를 얘기하던 아내가 진지한 목소리로 날 불렀다.
우리 가족은 가끔 가족회의를 소집하는데 보통은 아이의 가치관이 잘못된 방향으로 흘러가는 것을 느끼고, 바로잡아야 할 필요가 있을 때 열린다.
가족회의에서 아내와 나의 역할이 어느 정도 정해져 있는데,
현실적이고 논리적인 아내는 아이가 잘못한 것이 뭔지 정확히 끄집어내는 형사나 검사 같은 역할,
감정을 중요하게 생각하는 나는 아이의 생각과 행동에 공감하는 변호사 같은 역할을 한다.
하지만 우리 중에 판사 역할는 없다.
그래서 모두의 의견이 맞지 않으면 협의가 될 때까지 회의를 진행한다.
오늘 회의의 주제는 다음과 같았다.
초등학교 2학년인 우리 아이의 담임선생님은 아이들이 집에서 공부나 독서를 해오면,
제대로 했는지 검사를 하고 그날 얻은 포인트와 누적 포인트를 알림장에 적어주신다.
포인트는 학습지 한쪽에 1점, 독서 40분에 2점 이런 식이다.
어느 정도 포인트를 모으면 그에 따른 선물을 주신다.
얼마 전에는 가장 먼저 누적 포인트 70점을 달성한 우리 아이가 간식 선물을 받아서 친구들이 부러워했다고 한다.
이렇다 보니 아이들에게 동기부여가 되어 열심히 하는 아이들이 많아졌고, 경쟁심이 생겨 자연스럽게 공부하는 시간이 늘어났다.
우리 아이는 꾸준히 1등을 유지하여 새로운 선물을 가장 먼저 받는 영광을 누리기 위해,
집에서 놀지 않고 공부할 정도로 좋은 정책이다.
문제는 그날 선생님의 계산 실수로 원래 받아야 할 포인트보다 더 높은 누적 포인트가 적혀있는 것이었다. 혼자서 20명이 넘는 아이들의 숙제를 짧은 시간에 다 검사하려다 보니 선생님의 계산 실수가 이해되었다.
아내는 이 잘못을 바로잡기 위해 선생님이 포인트를 적어주시는 알림장에 계산이 잘못되었다며 바로잡아달라고 쓰겠다고 했다.
하지만 아이는 그렇게 하지 말라고 하면서 거부했다.
만화영화를 보다가도 하지 말라는 걸 꼭 하는 주인공을 보면 눈살을 찌푸리고 답답해할 정도로
규칙을 중요하게 생각하는 아이가 스스로 규칙을 어기면서 합리화한다니 이해가 되지 않았다.
이 가족회의 안건에 합의점을 찾기는 어려워 보였다.
정직과 신의를 중요하게 생각하는 나는 정당하게 얻은 것이 아니라면 반납하는 게 올바르다고 생각했고, 아이를 설득하는 쪽으로 방향을 잡았다.
나는 먼저 아이에게 양심과 공정함이 왜 중요한지 설명했다.
“지금은 네가 1등이지만, 혹여나 너를 시샘하는 친구들이 잘못된 합산 포인트를 발견하게 된다면
'선생님 이거 잘못됐어요'라거나
'얘 사기 쳤어요.'라면서
큰 소리로 말하거나 뒤에서 수군댈 수도 있는데, 그럴 때 부끄럽지 않겠니?”
“또는 반대로 선생님께서 다른 친구의 포인트 계산을 실수해서
너보다 높은 점수를 얻었는데,
그 친구가 잘못된 걸 알고도 바로잡지 않아서
네가 1등을 빼앗기게 되었고, 그 사실을 나중에 알게 된다면
너는 그것에 대해 억울해하지 않을 수 있겠니?”
라면서 앞으로 발생할 수 있는 안 좋은 일들을 설명해 주며 한참을 설득하고 있었는데,
아이가 자그맣게 얘기했다.
“나 이 점수 받았다고 친구들 앞에서 큰 소리로 자랑했단 말이야. 그래서 친구들이 다들 부러워했어.”
규칙을 중요하게 생각하는 아이가 왜 바로 잡는 걸 망설였는지 한 번에 이해가 되었다.
그렇게 공개적으로 떠벌려 놓았으니, 선생님께 말씀드려 바로잡으면, 그걸 본 주변 아이들이
‘뭐야 사실은 1등 아니었네?’라면서 비아냥거리는 모습이 머릿속에 선명하게 그려졌다.
그 얘기를 듣고 아내와 나는 잠시 눈을 마주쳤다. 서로 말은 하지 않았지만, 잘못된 것을 바로잡으면서 아이의 자존심도 지켜줘야 한다는 생각을 주고받았다.
난 아무리 고민해 봐도 좋은 생각이 나질 않아서 눈을 질끈 감았는데
아내가 그럼 간단한 방법이 있다며 말했다.
주말 동안 평소 풀어가는 양에 선생님 잘못 계산하신 만큼을 더 풀고,
엄마는 알림장에 '선생님이 포인트를 잘못 계산하신 게 있으셔서 그만큼 더 풀었어요’라고 쓰겠다고 했다.
나는 속으로 아내는 현명함에 감탄했다.
그렇게 하면 1등은 그대로 유지하면서, 정당하게 얻지 않은 점수도 바로잡고, 아이의 양심과 자존심, 그리고 당당함도 지켜줄 수 있는 최고의 방법이었다.
물론 아이는 황금 같은 주말 동안 조금 고달프겠지만 말이다.
아이는 조금 고민하더니,
"그렇게 할게."라고 대답했다.
짧은 대답과 작은 목소리였지만 아이의 말에는 의지가 담겨 있었다.
바로잡을 시간도, 아이의 의지도 충분했다. 이제 실행만 하면 되는 것이었다.
사실상 이번 문제 해결에 기여한 바가 거의 없는 나는 옆에서 둘 다 좋은 결정을 했다며 맞장구를 쳤다.
그리고 아이에게
"그런 일이 있다고 말해준 거 고맙고, 정말 칭찬받을 일이야. 앞으로도 그렇게 얘기해주면 우리 함께 어려운 문제도 쉽게 해결할 수 있을 거야"라고 말했다.
그렇게 잘못된 것을 바로잡기 위해 문제를 풀던 아이는 어려운 문제가 나오면 답답함을 못 이기고 눈물이 글썽이면서 엄마 아빠를 찾는다.
개념과 풀이 과정을 중요하게 생각하는 요즘 초등학교 수학은 어른인 내가 봐도 어렵다.
그럴 때마다 나와 아내는 아이만의 과외선생님이 되어 여러 문제를 함께 풀어나가고 있다.
앞으로도 우리 가족은 언제 어디서든 함께,
안 풀리는 수학 문제보다 훨씬 어려운 이 세상살이를
하나씩 해결하며 살아 나갈 것이라고 믿는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