대적자가 아닌 같은 편이 되는 비법
예전에 내가 가르치던 어떤 학생은 아버지가 환단고기를 깊게 믿고 있었다. 환단고기란, 고조선보다도 이전 초초고대 한민족이 세운 환국이라는 국가가 극동아시아부터 중국, 중동을 거쳐 동유럽까지 지배했다는 사이비 역사학이다. 학생은 자기는 그런 소리를 믿지 않는다고 했지만 그 중에서도 일부는 사실이라면서, 자꾸 수업시간에 신라 황실의 흉노족 기원설이니 고대 한국 기마민족의 중국 정복설이니 하는 소리를 자꾸 해대곤 했다. 사실 무시하고 수업하면 큰 문제가 안 생겼을텐데 나름 역사학에 조예가 있다고 생각했던 나는 자꾸 올바른 팩트와 교정에 집착했다. 나는 학생이 믿고 있는 사이비 역사학이 얼마나 허무맹랑한지, 혹은 그 말이 사실이라 하더라도 왜 그런 곳에서 그의 자존감을 채우려 하는지를 지적하며 논리적으로 학생을 설득하려 했다. 하지만 아무리 나의 논리가 날카로워도 도무지 말이 통하지 않았다. 어머니께 말씀드려 반드시 이런 상황을 고쳐야한다고 설득했다. 하지만 어머니는 이미 자신도 그런 상황을 알고있고 포기한지 오래라며 그냥 국어 수업이나 해달라는 것이 아닌가. 그렇게 몇달간 더 수업이 이어지다가 여러가지 복합적인 이유로 결국 그 학생은 과외를 그만두게 되었다. 나는 학생을 진심으로 걱정하는 내 마음이 전달되지 않은 듯 느껴져서 억울했다. 그리고 그 학생은 정말 이상한 학생이라고 생각했다.
그런데 이상한 점은 이세상에 이상한 인간이 너무너무 많다는 것이다. 나에게는 내가 꼬셔서 나와 같은 직업을 가지게 된 나의 대학 동기이자 동료 교사가 있다. 그가 만난 어떤 학생은 수업시간에 어떤 지문을 읽어보라고 한다거나 문제를 풀게 시키면 자꾸 수업시간에 잠을 자는 습관이 있다. 처음 몇번은 좋은 말로 타이르고 깨웠지만, 그 상황이 반복되자 내 친구도 나와 비슷하게 학부모님께 말씀드려 상황을 해결하려 했다. 그리고 나와 비슷한 선생님 교체라는 결과를 맞게 되었다.
왜 분명히 학생에게 잘못이 있음에도 불구하고 명백한 우리의 선의는 항상 거절당하는 것일까. 거기다 더더욱 이상한 점은 오은영이나 최민준 같은 전문가들은 거의 모든 아이들의 문제행동을 교정하는 비법을 가지고 있다는 점이다. 오은영 박사님이야 모두들 알것이고 최민준 소장님에 대해 간단히 소개하자면 남자아이를 전문으로 하는 미술 학원을 운영 중인 원장님이자 <최민준의 아들TV>라는 남자아이들의 문제행동을 교정하는 유튜브 채널을 운영 중인 아동심리 전문가이며, 나에게 가장 많은 영감을 준 멘토이다. 엄마 말도 안듣는 게임 중독 아이 ADHD아이들을 능숙하게 다루는 그의 모습을 보면서, 아이가 바뀌지 않는 것은 아이의 문제가 아닌 내 지도방식의 문제라는 것을 진심으로 깨닫게 되었다. 아이에게 어떤 문제적 기질이나 습관이 있더라도 그것을 개선해나가는 것은 교육자의 몫이다. 단순히 누구나 할 수 있는 지적이나 학부모한테 일르는 방법은 문제 상황 개선에 도움이 되기는 커녕 기껏 만들어 놓은 학생과의 유대감을 배신감과 적의로 바꿔버리는 결과를 낳는다.
그렇다면 어떻게 해야 우리의 금쪽이들을 바꿀 수 있을까? 답은 뻔하고 단순하다. 귀에 딱지가 앉도록 들은 '이해'와 '공감'만 있으면 된다. 이를 활용하면, 우리는 그들의 대적자가 아닌 같은 편이 될 수 있다. 우리가 학생에 대한 이해와 공감 없이 단순히 학생의 문제를 지적하고 교정하려 들때, 우리는 그들의 대적자가 된다. 학생이 문제를 못 맞췄을 때, "너가 틀렸어"라는 말을 하면 그 말은, "너는 틀리지만, 나는 맞아." 라는 말을 함축하게 된다. 그 말은 곧 "나는 너랑 달라."라는 말과도 같다. 이런 말을 문제를 틀릴 때마다 듣게되면, 학생은 무의식적으로 공부가 힘들고 외롭게 느껴지게 되고, 그리하여 나에게 지적질을 하는 선생님이나 엄마조차도 나의 적으로 느껴지게 된다. "엄마는 나한테만 그래!"라는 아이들의 흔한 울분은 이런 억울한 마음의 표현인 것이다.
우리는 흔히 이해해주다, 라는 표현을 많이 쓴다. 하지만 '이해해준다'는 표현은 다른 말로 ' 아는 척한다'와 같은 말이다.
당신을 남자라 가정하고, 공항에 늦을까봐 뛰어가다가 하이힐이 부러져 넘어진, 무릎에서 피가 철철나는 여자친구를 떠올려보자. 이순간 당신이라면 어떤 말을 하게 될까? "너가 얼마나 아픈지 나도 알아! 근데 늦었잖아! 빨리 일어나!"라는 말을 누군가 건넨다면, 그것은 이해가 아닐 것이다. 상대방을 얼마나 평소에 사랑하는 지와는 별개로, 지금 이 순간 여자친구에게 내가 하는 지적은 그녀로 하여금 나를 남자친구가 아니라 웬수로, 조력자가 아니라 대적자로 느끼게 만들 것이다. 상대방이 얼마나 힘들지 혹은 얼마나 아플지를 이해한다면 "아이고 어떡해! 정말 아프겠다."라는 말부터 나와야 할 것이다. 하이힐 보다 운동화가 편하다는 사실, 공항에 늦지 않으려면 뛰어야만 한다는 사실만큼이나 중요한 것은 피가 철철나는 무릎으로 뛰는게 얼마나 힘들지, 여자친구가 예쁘게 보이려고 하이힐을 신고 나왔는데 넘어져서 얼마나 속상할지 알아봐주는 것이다. 우리가 경험적으로 넘어지는 것은 아프다라고 알고 있는 사실을 떠올리는 것이 아니라 "아 너무 아프겠다! 저 정도면 너무 아파서 걷지도 못하겠는데?" 라고 진심으로 그 고통을 이해하는 순간, 엉엉 우는 그녀한테 잔소리를 하는 것보다 훨씬 좋은 문제해결 방법을 떠올릴 수 있다. 예컨대 그녀를 위해 캐리어에서 운동화를 찾아 꺼내준다거나 그녀를 부축해해준다거나, 항공사라운지에 전화를 걸어 양해를 구한다던지 하는 노력이, 그 뻔한 잔소리보다 훨씬 도움될 것이다.
마찬가지로 학생의 마음을 이해'해주는' 것이 아니라 진심으로 이해'하는' 마음을 가지게 되면 결코 우리는 팩트로 무장한 지적질을 할 수는 없을 것이다. "내가 알려줬던 문제잖아!, 100점 받으려면 틀린 문제를 고쳐야 돼!" 라는 말은 "그러게 하이힐 대신 운동화를 신었어야지! 일어나서 빨리 뛰어! "라고 말하는 것만큼이나 매우 이상하고 매정한 화법인 것이다. 똑같은 오답피드백을 "이렇게 풀어야지!"라고 하는 것보다 "열심히 풀었는데 많이 틀려서 속상하겠다! 어떻게 해야 내가 도와줄 수 있을까? 이렇게 한 번 해보는 건 어때?" 와 같이 말하는 것이 학생의 마음에서 선생님이 나를 지적하는 대적자가 아닌 조력자로 느끼게끔 도와줄 것이다.
비록 환단고기에 빠져있던 학생을 도와주지는 못했지만 지금의 나는 공부가 아닌 다른 무언가에 빠져있는 학생들을 제법 잘 다루는 편이다. 그들을 환단고기와 같은 자기만의 방에서 꺼내고 싶다면, 방밖에서 그들을 불러내는 것이 아니라 일단 그들의 방에 들어가는 것이 이해의 시작이다. 그들이 좋아하는 게임, 스포츠, 영화, 드라마, 만화 속에 얼마든지 그들을 방 밖으로 내보내줄 열쇠가 이미 들어있다. 그래서 나는 공부대신 무언가에 빠져사는 학생들을 보면 그들의 마음의 방문을 열고 들어간다.
예를들어 내 학생 중에는 매 수업시간마다 만화얘기를 하는 발랄한 중1 여학생이 있다. 처음 그 학생을 만났을 땐 모든 학교 과목을 다 싫어하고 시험을 보면 10문제 중 2~3문제를 맞출까 말까한 학생이었다. 국어 과외를 받는 것도 엄마가 시켜서 억지로 한 번 받아나 보겠다는 시큰둥한 반응이었다. 처음에는 같이 문제집을 붙잡고 시나 소설을 읽게 해봤지만 거의 이해하지 못했다. 그 학생의 방도 만화, 아이돌, 리듬게임, 예쁜 인형과 키링 등의 관심사로 잔뜩 꾸며져 있는데, 나는 그중 그나마 내가 좋아하는 만화를 통해 그 학생과 친해졌다. 그 학생이 요즘 빠져사는 만화는 "도쿄 리벤저스"라는 만화인데, 현실에서 만화대여점 알바나 하고 있는 소위 '아웃사이더' 주인공이 찐따였던 학창시절로 돌아가서 도쿄를 주름잡던 낭만적인 일진들을 만나 과거를 바꾼다는 내용의 학원폭력물 만화다. 환단고기를 싫어하던 시절의 정의감 사명감 투철했던 시절의 나였다면 이런 만화보다는 더 건전하고 좋은 만화나 소설을 읽자고 학생에게 말했을 것이다. 하지만 나는 그렇게 하는 대신 전권을 소장 중인 학생에게서 매 수업때마다 그 만화를 한권씩 빌려갔다. 살짝 유치한 부분도 있긴 했지만 전체적으로 꽤 재밌었다. 단순히 읽고 끝낸다면 나는 그냥 그 학생의 마음의 방에 들려 놀고 나오는 무책임한 선생일 것이다. 그런데 좋은 국어선생님이라면 그 안에서 반드시 문학성을 발견해줄수 있을것이다. 나는 내가 그 학생에게 가르치는데 실패했던 상징이라는 단어를 이 만화로 다시 알려주었다.
도쿄 리벤저스 5권쯤에는 '피의 할로윈'이라는 에피소드가 나온다. 주인공이 속한 패거리가 다른 패거리와 싸우는 과정에서 배신자가 나오지만, 알고보니 그 배신자는 여전히 주인공 패거리와 대장을 진심으로 사랑하고 있었다는 뭐 그런 스토리다. 표면적으로 봤을 때는 10월 31에 피튀기게 싸워서 피의 할로윈이라는 제목을 붙였을 것이라 생각할 수 있다. 그런데 왜 굳이 할로윈일까? 나는 할로윈이라는 날에 사람들이 악당의 모습으로 분장하는 모습이, 배신자가 속마음을 감춘채 일부러 자기가 원래 속해 있던 패거리에 악담을 퍼붓는 모습을 상징할 수 있다고 알려주었다. 그 배신자는 학생이 그 만화에서 가장 좋아하는 잘생긴 캐릭터였고 학생은 나의 해석을 아주 마음에 들어했다. 원래는 내가 공책에 상징이나 비유를 필기시키면 엄~~청 쓰기 싫어했던 그 학생은 이제 필기를 꽤 열심히하고 심지어 숙제도 해온다! 이 얼마나 엄청난 변화인지!
최근에 예전에 배웠던 시의 다양한 표현기법을 복습하며 이것저것 물어보는데, 비유니 설의니 의인이니 하는 거의 모든 단어를 다 잊어버렸음에도, 저 그래도 상징은 뭔지 기억하고 있어요! 라고 대답했을 때 나는 이 모든 기억을 떠올리며 엄청난 감동을 느꼈다.
내가 이런 얘기를 사람들에게 하면, 흔히 돌아오는 대답은, '재미도 없고 유치한 얘기를 하는 학생의 말에 귀기울여가며 "이해해주기"를 하는 것은 감정 노동이다, 재미없다, 나만 손해다'와 같은 반응이다. 물론 때로는 내가 원치않는 포켓몬 얘기나 남자아이돌 노래, 심지어는 환단고기와 같은 완전 틀린 사실조차도 잠자코 들어주어야하지만, 그 이야기를 같이 듣고 학생이 왜 그런 것에 빠졌는지를 이해해서, 내가 그 학생과 더 좋은 관계로 나아가고 그 학생의 인생을 변화시키는 보람을 한번만 경험 해본다면 결코 그 과정이 재미없지 않을 것이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