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후성유전학이란 DNA 자체에는 변화가 없이 삶의 조건에 따른 유전자 발현을 연구하는 학문입니다.” 경기도바이오센터 강당에서 관리자들을 대상으로 하는 연수에서 이원영강사님이 하시는 말씀에 귀가 번쩍 뜨였다. 무엇보다도 처음 듣는 용어였다. ‘얼마 전까지 유전자는 마치 돌에 새겨진 것처럼, 우리 스스로는 아무런 선택권이 없이 고정된 설계도였다. 하지만 그렇지 않다. 우리가 매일 일상적으로 하는 일들이 유전자의 활동에 커다란 차이를 가져온다. 매일 먹는 음식, 정신적 트라우마, 작은 행동 하나하나가 유전자의 작용에 영향을 준다.’ -샤론 모알렘, 『유전자, 당신이 결정한다』 유전자라는 것이 부모에게 물려받은 것이 40%, 환경적 요인이 10%, 의도적 활동(Intentionnal activity)에 의해서 50%가 변화가 가능하다고 한다. 즉 인간의 유전자는 환경과 식이 등과 상호작용을 하면서 성장하고 학습한다는 것이다. 유전자가 곧 운명이 아니라 극복 가능한 희망을 우리에게 제시해 준다. 강사님의 강의가 이어지고 있는데 내 생각은 어느새 신혼시절로 되돌아가 있었다. 지방에서 교대를 졸업 후 첫 발령을 받은 시흥 장곡초등학교에서 2년을 근무하고 신천리에 있는 소래초등학교로 전근하였다. 충남 벽지에서 근무하고 있는 아내와 신혼살림을 차리기 위해서였다. 첫아들이 태어나고 처음 부모 역할을 하는 우리는 월세를 살면서 아이를 맡길 분을 수소문했다. 아들이 둘이 있는 분이 우리 아이를 돌보기로 해서 아침에 아이를 맡기고 퇴근 후에 집으로 데려왔다. 주중에는 잘 적응하는가 싶다가도 토요일과 일요일을 보내고 월요일 아침에는 부모에게 떨어지지 않으려고 울고 떼를 썼다. 가슴이 아팠지만 학교로 출근해야 하기에 생이별해야 했다. 강사님은 후성유전학을 설명하시면서 임신 순간부터 만 2, 3세 유아기 때 인간 뇌의 신경망이 폭발적으로 연결되므로 부모의 역할이 매우 중요하다고 한다. 하지만 아이를 처음 키워본 부모로서 아이에게 할 수 있는 것이 많지 않았다. 여름방학 동안 친밀감을 높이고자 엄마와 함께 실내 수영장을 다녔다. 여름방학이 지나고 아이가 갑자기 아파왔다. 감기인 줄 알았지만 뇌수막염에 걸린 것이었다. 40도가 넘는 고열과 합병증으로 동네 병원에서 부천 세종병원으로 옮겼다. 병원에는 많은 아이가 고열로 입원해 있었다. 아이의 회복을 기대했지만 오히려 상태가 나빠져서 오른쪽 다리도 부어올랐다.
605호 병실
열은 화가 나면 난다. 참을 수 없어 열이 난다. 열은 아플 때도 난다. 머릿속을 파고든 바이러스뇌막염과 골수염이 아이를 혼수상태로 만들었다. 아이가 아프면 마음은 먼저 하늘에 가 있다. 세상 살면서 곁눈질한 죄 허튼 데 마음 빼앗긴 죄죄인 줄도 모르고 지은 죄까지 죄다 떠오른다. 말도 못 하는 아이가 고열 때문에 내는 신음아빠와 아파를 구별 못 하는 아이가 차갑게 몸속으로 스미는 항생제 주사액방울방울 눈물처럼 떨어지는데 말 못 하는 아가야. 네 곁에 사랑하는 아빠가 있다. 오늘도 마음 불 밝혀놓고 맘을 새우고 있다. 보이지 않는 적과 싸우고 있는 어린 아가야.
고열로 인해 아이의 상태가 나빠져서 이제는 치료하기가 힘들다는 담당 의사의 말에 가족들과 상의 후 서울 한양대학교 병원으로 다시 병원을 옮기게 되었다. 짐을 정리하는 아내는 아이의 병간호에 지치고 힘들어 보였다. 그렇지만 고열이 떨어지고 예전의 모습으로 돌아가 함께 그네도 타고 공원에서 뛰어논다면 부모로서 무엇이든지 할 것만 같았다. 안타깝게도 아이의 병은 점점 나락으로 떨어지고 있었다. 기존 항생제조차 듣지 않아 임상용 항생제 처방까지 받으며 아이는 버티고 있었다. 담당의사도 고열이 오면 경기하는 아이들에 대부분인데 참 잘 참아준다고 아이의 머리를 쓰다듬어 주었다. 아픈 병마와 싸우고 있는 아이가 있기에 눈물도 마음속으로만 흘리며 참았다. 우리 아이보다 더 절망적인 백혈병에 걸린 아이들, 소아 당뇨로 매일 인슐린 주사를 맞는 아이들을 보면서 마음속으로 기도하고 또 기도했다. 여름방학이 끝난 8월에 입원해서 어느덧 가을이 지나고 잎이 떨어지는 추운 겨울이 왔다. 아이 옆에는 간병 휴직을 내고 아이와 함께 있는 아내가 있고, 나는 저녁에 퇴근해서 병실에서 밤을 새우고, 새벽에 전철과 버스를 타고 학교로 출근해야 하는 고통을 감내해야 했다. 아이의 고관절에 침투한 골수염을 수술하기로 한 날 새벽이었다. 잠깐 선잠을 자다 깨었는데 아이의 아내가 침상에서 기도하고 있었다. 간절한 기도였다. 아침에 일어나니 아내가 “여보, 나 이상한 체험을 했어요. 내가 새벽에 아이 수술이 잘 되게 해 달라고 하나님께 기도하고 있었는데 내 옆에 누군가가 함께 기도하고 있었어요. 깜짝 놀라 누구신가요? 하고 물었더니 바로 예수님이셨어요.” “예수님께서는 아무 염려하지 말고 아이를 잘 돌보라고 하셨어요.”라고 말했다. “정말이야? 믿어지지 않아. 하지만 나도 아이를 위해 기도할게.” 나는 출근을 준비하며 아이의 수술이 잘 되기를 다시 한번 기도하고 병원을 나섰다. 전철을 타러 가는 길에 하늘에서 하얀 첫눈이 내리고 있었다. 저 순백의 눈처럼 고열에 시달리는 우리 아이에게 깨끗한 치료가 일어나기를 기도했다. 정말 기적은 일어났다. 퇴근하며 노란 귤이 맛있어 보여서 한 봉지를 사 들고 병실에 들어서는데 환자복을 입고 있는 아이가 나를 보고 반갑게 “아빠!”하고 인사를 하는 것이었다. 너무 놀라운 장면이었다. “오늘 아이가 수술하러 갔는데 그냥 올라온 거예요. 갑자기 열이 떨어지고 수술할 필요가 없어졌다는 거예요.” 아내도 상기된 얼굴로 웃고 있었다. 나는 아내와 아이를 꼭 껴안아 주었다. 내 눈에 흐르는 눈물을 보이고 싶지 않아서였다. 끝까지 참아준 아이가 고마웠고, 3개월 이상을 병간호하며 기도해 준 아내가 고마웠다. 후성유전학을 강의하는 강사의 강의도 후반부에 접어들었다. “어린 시절의 경험이 나중에 어른이 되어 살아가는 방법에 영향을 미치게 됩니다. 사랑·공감·배려·인정 등의 정서적 인성과 하지 말아야 할 말과 행동·기초적인 도덕성과 윤리 등 사회적 인성은 아주 어렸을 때 뇌에 기록되는 것이고, 정성을 들여 영향을 주어야 합니다.” 사람을 행복하게 해주는 것은 무엇일까? 보통 사람들은 돈·명예·인기인이 되면 행복할 것이라고 생각한다. 그러나 건강하게 오래 산 사람들은 이런 목표를 달성한 사람들이 아니라 가족·친구·공동체 구성원들과 사회적으로 친밀한 관계를 갖고 있다는 하버드대학교의 연구 결과이다. 이런 사람들일수록 노인이 되어서도 뇌기능이 선명했고, 기억력도 좋았으며 삶의 질도 높았다. 연구자들의 결론은 “좋은 인간관계가 행복한 삶을 유지하게 한다.”라는 것이다. 어린 시절 낮에는 부모와 떨어져서 생활해야 했고, 뇌수막염으로 병원에 입원해서 고통을 받았던 아이. 벌써 스물여덟 살이 되었다. 아직도 부모의 그늘 아래에서 살아가고 있지만 더 나은 미래를 준비하며 나가기를 기도해 본다. 부모로서 미안한 마음이 늘 남아있기에 더욱 애착이 가는 큰 아이이다. 어제는 사촌형이 결혼한다고 함께 운동화와 콤비를 샀다. 이제 아빠 옆에 듬직하게 서 있는 아들. 사랑하고 축복한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