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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김성웅 Oct 20. 2023

화해와 공존을 찾아서, 미래의 희망 K 문화 콘텐츠

열린 마음

이슬람의 변화를 이끌 미래의 '과학기술' 

세계인이 좋아할 '문화 콘텐츠' - 국제감각에 기여

변화에 고민하는 '여성 밀레니엄' 세대


열린 마음

E 여대를 찾은 중국인 관광객 (출처: 한국경제신문)

최근, 한국 대학에 유학 중인 중국인 학생들이 7만여 명을 넘어선다고 한다. 그렇지만, 몇 년 전 우리 언론은, 많은 중국인 여성 관광객들이 서울 E 여대를 찾는다고 보도하였던 적이 있다. 그들은 도서관에서 책도 보고, 캠퍼스 산책 등 대학생활을 패러디하여 유튜브 등 동영상에 올린다는데 그 사례가 너무 많아 골머리를 앓고 있다는 기사였다. 


당시, 해당 학교로서는 여러모로 힘들겠지만, 필자는 오히려 그들의 열정과 그 학교에 대한 사랑을 이해한다. 우리가 자부심을 느낄 만큼, 그들이 우리에게 자연스럽게 접근해 온 것에 감사하는 마음이다. 중국만 하더라도 다인종 다문화에 대한 경험이 우리보다 많아서일까? 성큼성큼 다가오는 그들의 개방적인 ‘열린 마음 (Open Mind)’에 새삼 놀라는 마음이다. 우리도 그들처럼 ‘국제화’나 ‘국제감각’의 시각을 좀 더 확대하면 어떨는지? 필자도 미국에서 근무할 때, 아이들과 함께 미국 동부의 '아이비' 대학들을 관광 삼아 찾아다녔다. 아무리 관광이라 해도 '관심'이 없으면 갈 수가 없는 일이다.


파키스탄령 '카슈미르' 북부의 산악지대는 세계 2위의 고봉인 K2 등 높은 봉우리가 즐비한 깊은 오지여서 식사도 제한되고, 빈대나 이 같은 독충이 많아서 현지에서는 숙박이 매우 조심스럽다. 그래서, 웬만큼 여행을 좋아하는 필자로서도 이 지역에 대한 도전을 생각해 본 적이 없었다. 그런데, 우연히 "중앙아시아로 간다"라며, 히말라야 산악을 여행하는 한국인 관광객을 만났다. 유엔 임무로 순찰 중이던 필자는, '카라코아람' 가도에서 깊은 계곡을 가로지르는 좁은 현수교 (일방통행)를 지나기 위해 잠시 대기하고 있었다. 깊은 계곡에 걸친 현수교는 그 폭이 좁아서 사진처럼, 마이크로버스 한 대가 건너오면 반대편에서 우리가 그들을 기다려야 한다. 


(좌) 아찔한 '낭가파르밧' 산악지의 현수교, (우) '카슈미르'의 현수교는 모두 차량 1대 폭이다.


그런데, 현수교를 건너온 조그마한 마이크로버스 안에서 누가 손을 흔들면서, 자신이 '한국인'이라고 고함을 치면서 인사를 한다. 아마도 필자의 군복 어깨에 있는 태극기를 알아보고 반가왔던 모양이다. 그러자, 버스 운전자가 버스를 필자 앞에 정지해 주어, 그 분과 반갑게 악수하고 몇 분 간이나마 인사한 후 떠날 수 있었다. 


일면식도 없는 분이고, 짧은 순간이지만 단지 같은 한국인이라는 이유로 반가워하고..., 필자의 나이 정도였는데 중앙아시아를 여행한다는 그분이 "참, 대단하다!"라고 생각하며, 엄두가 안 나는 길을 택한 그에게 박수를 보냈다. 그분은 그분대로 "외진 산골에서 우리 국기를 보니 가슴이 울컥하였다"라고 하였고... '고난'에 도전하는 열린 마음이랄까? 더구나, 깊은 산에서는 더 순수해지는 걸까? 그리고, 국가란 무엇인지...!? 새삼스레, 자신의 존재와 역할에 대해서도 되돌아보는 계기가 되었다.


이슬람의 변화를 이끌 미래의 '과학기술' 

서구의 교회나 성당은 지금도 여전히 많은 사람이 신앙생활을 하고 있지만, 젊은 신자는 현저하게 줄어들었다. 많은 서구 국가에는 한때, 종교가 '삶의 전부'였던 시간이 있었다. 하지만, 이제는 이전과 달리 사회를 이끄는 젊은 층에게서 종교적 열정이 사라져 가는 것은 분명한 사실이다. 아마도, 진화론 등 과학기술의 발달에 따라 일반 대중도 자연 현상에 대한 이해가 증가하여, '신앙의 신비가' 점차 사라지는 경험을 반복한 탓일까?


세상은 변하고 요구하는 관점도 바꿔었다. 하지만, 이슬람의 '꾸란'은 과거 지향적이다. 무슬림이라고 ‘종교 지상주의’에 변화의 조짐이 없겠는가? 예컨대, '이자의 개념'을 부정하는 과거의 패러다임에 얽매인 ‘샤리아의 율법’을 바꿀 수는 없지만, 금융경제에 자본주의 기법이 도입되면, 일정 부분 변화가 불가피할 것이다. 이처럼, 서구보다 뒤처졌지만, 무슬림 국가도 점차 사회가 고도화되고 산업화로 경제생활이 윤택해지고 있다. 21세기형 기술과 경제성장은 자율성을 바탕으로 지성, 창의, 협동, 소통능력을 갖춘 인재를 요구될 것이고, 자연스레, 똑똑한 젊은이 사이에서는 가치관의 변화가 일어날 것이다. 특히, 과학기술의 발달은 다수의 무슬림 젊은이에게 새로운 삶의 방식을 제시하고 있으니, 점진적이나마 이슬람의 '변화'를 이끌 수 있을 것이다. 이에 따라, ‘경건한 삶’을 고집해 온 부모세대와 달리, 어떤 형태로든 그들의 신앙에도 분명히 변화가 있을 것이다.


아랍의 봄, '무바라크' 군부에 저항하는 카이로 민중 데모

한 예로, 비록 실패하긴 했지만 '카이로'의 ‘아랍의 봄’ 사건도 이런 정치, 사회적 변화의 조짐이었다. 예전에는 상상조차 힘든 일이었지만, 인터넷과 모바일 기술 발달로 서로 간 정보를 공유하게 된 수십만 군중이 '독재타도'를 외치며, '카이로' 시내의 ‘타흐르’ 광장으로 몰려들었다. 그리고, 앞으로는 얼마든지 이런 일을 재현시킬 수 있는 매체를 국민 개개인이 확보하고 있게 되고, 군중들의 '가치' 기준도 높아졌다.

문제는, '아랍의 봄'에서도 이슬람 종교는 여전히 이들 군중의 중심이었기에 '무바라크'정부가 무너진 뒤, 국민투표로 '이슬람 형제단' 정권이 탄생했지만, 불과, 1여 년 후에 군부 쿠데타로 혁명은 물거품이 되었다. 


군중 혁명이 종교적 문제로 실패하는 이런 사례에서 보듯이, 무슬림은 스스로가 이슬람이 '완벽한 종교'라며 그 종교를 믿는 자신에게 만족하고 불신자와 이교도를 오히려 가엾게 여기도록 세뇌(?)당한, 이슬람 완벽주의자들이다. 하지만, 이들의 '철저한 신념'은 더 나은 변화로 가는데 걸림돌이다. 변화하는 세상은 새로운 각성을 요구하고 새로운 트렌드를 강조한다. 과거, '코페르니쿠스'의 '지동설이나, '다원'의 '진화론'은 종교학자의 뭇매를 맞았지만, 옳다는 것이 입증되었고, 변화에 뒤처진 종교는, '무시와 소홀'의 대가를 혹독하게 치렀다.  


19세기, '서세동점'(西勢東漸, 서양 세력이 동양으로 밀려옴)에도, 쇄국으로 일관하다, 쫄딱 망한 조선, 청나라처럼 변화를 거부하다가 폭망 한 사례는 부지기수다. 미국 원주민 '아메리카 인디언'은 자신을 공격한 서구 이주민으로부터 ‘총' 외의 신문물을 거부하였고, 수기 '꾸란'에 집착한 '오스만 터키'는 '인쇄술'을 거부하여, 뒤늦게 아랍어 '꾸란'이 각국 말로 번역, 인쇄되었다. 아프간 '탈레반'은 외부 세계 단절을 위해 TV 시청도 제한하였다. 이처럼, 시대적 조류를 떠나, 현실에 집착하는 것은 '무지의 발로'나 '기득권 귄리유지'일 뿐이다. 


물론, 과학이 아무리 발달해도 '믿는 자'의 신념에 따른 종교를 지울 수 없다. '상대성 이론'으로 유명한 '아인슈타인' 박사는 과학분야의 태두임에도 '하나님'의 존재를 굳게 믿었다. 뿐만 아니라, 이라크나 IS(이슬람 국가)와의 전쟁에서 보듯, 종교에 세뇌당한 많은 젊은 무슬림은 과학기술의 '지하드' 활용에 주저하지 않았다. 이처럼, 종교에 대한 확신을 가진 자에게는, 과학 기술력만으로 변화를 이끌 동력이 부족하다는 뜻이다.  


이 때문에, 이슬람이 ‘현대 세계에 편입되기를 원하는지?’ 여부는 그들의 선택이다. 만약, 그들이 현대 세계의 일부가 되려 한다면, 변화와 진보를 막는 극단적인 생각을 버려야 한다. 무슬림 자신이 선택한 의식변화와 사고의 전환이 필수적이나, 급격한 정치, 사회적 변혁이 없는 한 그런 전환에는 오랜 시간이 걸릴지도 모른다. 

 

이슬람 개혁은, 그래서, 이슬람권 내부의 ‘대화’와 '행동'이 가장 중요하다. 이는 이슬람 스스로의 자존심 회복과 보수적인 ‘이맘’의 개방성과 포용성, 외골수 윈리주의자 격리와 배제 없이는 일견 불가능해 보인다. 현재로서는, 다수의 무슬림이 진보와 혁신을 거부하는 형국이다. 결국, 이슬람권 스스로가 어떤 결론을 내리기 전까지는 비이슬람권이 할 수 있는 일이라고는 이해와 배려 속에, 자생적 변화를 기다리는 것뿐이다.     


세계인이 좋아할 '문화 콘텐츠' - 국제감각에 기여

필자가 만난 여러 문화권 사람들을 보면, 미국이나 오스트리아 등 서구에 비해, 이집트나 요르단, 파키스탄 사람들의 행사는 세련미가 떨어졌다. 무슬림들은 어차피, 서구식 문화의 일종인 각종 행사 자체를 좀 무미건조하게 생각하는 듯 부인들의 참여가 저조하였는데.., 어찌 된 셈인지 필자의 숙소 만찬초청에는, 모두 부인을 데리고 함께 왔었다. 물론, 부부가 함께 오더라도 부인들은 철저히 부인들끼리 어울렸지만… 어쨌든 모두 재미있게 놀았다. 필자가 느낀 것은 그들이 노는 방법이 다른 것이지놀지 않으려는 게 아니라는 거였다. 


또한, 앞서 ‘인샤알라...’에서 잠시 언급하였지만, 이집트의 ‘군사 정보국장’은 우리나라의 ‘국정원장’과 ‘국방 정보본부장’을 겸할 정도의 대단한 실력자이다. 그런데, 그런 고위급 인사의 부인이 '한류 팬'이었다. 당시, 이집트 방송은 “겨울 연가”라는 드라마를 중복해서 방영하고 있었다. 정보국장 부인은 TV에서 연재하였던 “겨울연가” 드라마를 여러 차례 돌려 볼 정도로 한국에 푹 빠져서, 유관 상품들도 많이 구입하였고, 기회가 있을 때마다 남편에게 한국 방문을 요청하였던 것이다. 특별히, 드라마 촬영지에 대한 소개도 부탁하면서... 


우리 드라마는, 이렇다 할 스토리나 사막지역 외의 자연환경이 별로 없는 저들의 드라마와는 달리, 잘 구성된 스토리 전개와, 아름답고 낭만적인 드라마 환경 - 노란 은행나무 단풍 길이나 순백의 흰 눈에 뒤덮인 4계절 등의 아름다움에 저들의 마음이 매료된 것이다. 이걸 보면, 여러 측면에서 사람의 감성을 자극하는 외부 문화가 폐쇄적인 세상을 바꿀 수도 있겠다 싶다. 서구인이든 무슬림이든 본질적으로 여느 사람이 가지는 희로애락의 감정과 함께 호기심도 있고, 좋은 걸 찾는 것도 그렇고, 감성적인 면에서도 서로 크게 다를 바 없으니까... 


다행스럽게도, 이미 전 세계 많은 사람은 대부분, 폭력적이고, 퇴폐적이며, 지나치게 자본주의적인 미국의 '할리우드' 영화 작품에는 진부함을 느낀다. 이들 영화 속의 퇴폐와 마약은 염세적, 말세적이었다. 그런 영화라면, 경건한 삶을 추구하는 무슬림이 경멸할 수밖에 없는 구조였다. 이에 비해, 한국의 미디어와 플랫폼이 결합된 K 문화 콘텐츠는 지금까지의 서구식 작품과는 그 관점이 전혀 다른 콘텐츠로 세계인의 관심을 끌었다. 


특히, 세계의 젊은이는 어느 나라 작품이든, 문화적 배경이 어떻든, ‘낯설지만, 신선한 문화’에 관심을 가진다. 예컨대, 2000년대 초까지, 서구와 사사건건 대립하다 '아랍의 봄'으로 실각한 ‘가다피’라는 리비아의 독재자조차도, 그가 애독하였던 책이 미국 소설 ‘엉클 톰스 캐빈’이었다고 소개한 적이 있으니, 굳은 신앙의 젊은 무슬림의 마음 한구석에도 미국이나 외부 문화에 대한 관심이 많았던 거다.  


이를 보면, 굳이 'K-팝'이라는 BTS의 선풍적인 인기나, ‘미나리’, ‘기생충’ 등 '오스카'를 휩쓴 영화를 언급하지 않더라도, 2021년도 한 해에만, ‘D.P’나 '오징어 게임' 같은 드라마가, ‘넷플릭스’가 오리지널로 방영하는 82개국에서 선풍적 관심을 모았다고 해서 CNN 등 외신에서 주요 기사로 언급할 정도였다. 특히, '오징어 게임'의 경우, '생명보다 돈을 찾는' 몰인정한 이 드라마가 비난받기보다, 드라마에서 등장하는 각종 게임들 - '무궁화 꽃이 피었습니다', '달고나', '구슬치기', '딱지치기' 등 유치한(?) 콘텐츠가 유독 많은 나라 젊은이의 동심을 자극한 듯하다. 사소한 관심이지만 자칫하면, 세계사의 대반전을 기할 계기가 될 수도 있다. 


그렇기 때문에, 무슬림 젊은이가 우리 문화 콘텐츠에 공감하며 지금껏 '갇힌 틀' 속에서, 일방적인 종교만 강요당한, '고루하고 낡은' 사고의 벽을 깨고, 동심의 무한한 상상의 나래를 펴주길 기대한다. 그리고, 아름다운 미래와 꿈을 생각하며, 중세 유럽의 ‘문예부흥 운동’처럼 '신'이라는 뻔한 주제에서 서서히 탈피하여 '인간 존중'으로 깨어나기를 기원해 본다. 서구도 '신 중심'에서 '인간성' 회복까지 1,000여 년 동안 갇혀 있었다. 이들이 우리 문화에 열광하며 우리를 찾을 때, 우리의 국제감각의 지수도 덩달아 상승하는 효과도 있을 것이다. 

      

변화에 고민하는 '여성 밀레니엄' 세대

여성에 관한 한 변화를 거부하던 이슬람권에도 여성에 의한 변화의 조짐이 보인다. '카이로'의 여대생들은 서구 여느 국가의 학생들처럼 자유분방하다. 스카프를 둘러 머리칼을 안 보이는 게 종교적 규율과 전통이지만, 이제는 아예 히잡을 쓰지 않은 여성도 볼 수 있다. 금주(禁酒) 국가라도 카페와 클럽이 속속 들어서고, 라마단 기간에 금식하지 않는 젊은이도 생기고 있다’ (히잡, 이슬람 변화의 상징이 될까? (KBS 1 TV, 2017.6.29)


히잡을 착용한 이집트 카이로대학 여대생

복장이 자유로워지니 행동도 대담해진다. 길거리에서 남녀 간에 시비라도 벌어지면 남자에게 꿇리지 않는다. 얼마 전 한 사우디 여성이 배꼽 티와 미니스커트를 입고 유적지의 공공장소를 활보하는 동영상이 SNS에 올라 논란이 되었다. 이슬람 원리주의 이란에서는 여성은 외출할 때는 반드시 히잡을 해야 하기에, 운전자가 차 안에서 히잡을 벗어도 되나?”가 한 때 큰 논란이었다. 차 안이 사적 공간이냐아니냐?”에, 보수적인 이란의 성직자들은 차 안은 유리창으로 들여다보여 안 된다”라고 하였다. 하지만, 이슬람권에서 점증하는 여성 권리나 인권 향상 요구로 여성 복장규제도 해제될 날이 멀지 않았다. 


1970년대이란 여성들의 복장. 당시, 히잡은 착용금지였다. (출처: SBS 월드리포트)

이집트는 이미 1970년대에 스커트를 입었고, 같은 시기 이란도 ‘팔레비’ 국왕시절 여성의 복장이 서구의 유행을 따랐다. '팔레비' 국왕의 지시로 오히려, 히잡은 착용 금지였다. 하지만, 1979년, 이란 혁명이 여성들의 삶을 과거의 모습으로 되돌려 놓았다. 

그런데, 지금의 사회적 분위기는 더 고전적인 방식을 추구한다고 한다. 하지만, 문맹률이 높은 부모세대에 비해 여성의 사회활동도 점차 증가하고, 분야별 전문가도 많아, 결혼해도 자신만의 경제권을 가진 여성도 많다. 게다가 인터넷을 통한 각종 정보 공유도 급속도로 커지고 있다. 젊은 여성이 변화하고 있다. 


최근에는, 통신과 각종 기술의 발달로 많은 무슬림 여성이 인터넷, 스마트폰, SNS 등에 점점 노출되고 있다. 또한, 국제화로 정보교류가 활발하고, '아랍의 봄'도 경험하였으니, 1,400여 년이 지난 완고한 종교주의도 그 관점이 점점 변화될 것이다. 더불어, 많은 이슬람 국가에서 여성 지도자가 등장하는 것도 긍정적이다. 


특히, 어머니로서 여성의 역할은 사회변화에 매우 중요하다. 무슬림은 태어날 때부터 어머니가 ‘샤하다'(증언사, "알라(신) 이외에 다른 신은 없고, 모함마드는 그분의 사도이다")를 들려주고 죽을 때까지 이를 되뇐다. 하지만, 남과 더불어 살아가는 열린 '가치관'과 새로운 '세계관'으로 무장된 엄마에 의한 자녀 양육이 이루어지고, 또 이들이 '알라(신)'을 숭배하며 경건한 삶을 이어가는 자체를 부정하지 않더라도, 고립적이고 폐쇄적이며 맹목적인 신성에서 벗어나기만 한다면, 그 자녀들도 이교도에 대한 적대적 시각이 달라지지 않을까..?!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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