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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김성웅 Jul 22. 2024

한국전은 미‧중  전쟁 (제8화)-중공군의 참전 전야

중공 오랑캐의 참전 준비      


6‧25전쟁 발발이후 불과 10일 만에 미군이 참전하여 7월 5일에 미군과 북한군이 ‘오산 전투’에서 맞붙은 이후 7월 중순 경, 미국이 제7함대 마저 대만해협으로 급파하자, 이에 위협을 느낀 ‘마오쩌둥’은 대륙 남방에서 대만공략을 준비 중이던 제13병단(사령관 ‘덩화’)을 ‘단둥(丹東)’과 압록강 주변으로 이동시켜 한반도 전황을 파악하고 미군 전략연구에 몰두하게 하였다. 


그리고, 1950년 10월 8일, ‘스탈린’으로부터 유엔군의 공세로 패주하는 북한을 도와줄 것을 요청받자 ‘마오쩌둥’은, 이미 ‘동북변방군’으로 자리잡은 제13병단 약 25만여 병력을 ‘중국 인민지원군’으로 개칭하고 출동 준비를 지시하는 동시에 ‘스탈린’에게 소련 공군의 지원을 요청하였다. 하지만, 공중 작전 시 미국과 충돌을 우려한 ‘스탈린’은 매우 신중하였다. 소련의 망설임을 간파한 마오는, 중공군에 대한 공중엄호와 무기지원에 확실한 보장이 없이는 중공군 개입은 무리라며, 한반도 출병을 유보하였다.


여기에는, 유엔군(미군)이 설정한 38도선 이북 지역 작전에 대한 내부지침도 영향을 미쳤던 것 같다. 이 지침은 유엔군이 대략 ‘안주흥남선’을 ‘전진한계선’을 설정하였다는 것인데...,  사실, 한만국경에 너무 접근하여 중국을 자극하지 않겠다는 것은, 중국의 체제 보장을 의미하는 무언의 약속으로서 유엔군의 오래된 지침이며, 지금껏 한미 연합훈련 연습 시마다 단골로 등장하는 시나리오이기도 하다. 그런데, 이 첩보로 중공군 지휘부가, 청천강 이북의 완충지대 조성 기대로 한국전 개입을 망설였다는 것이다.


하지만, 출병을 잠시 유보하였던 ‘마오’는 다시, ‘저우언라이’ 부주석을 보내어 소련의 적극지원 가능성을 다시 타진하였다. ‘스탈린’은, 중국에 대한 공군지원은 약속하지만 중공군에 대한 직접적인 공중 엄호는 곤란하다는 입장을 취했다. 그러나, 한국전쟁에서 보듯미국은 전쟁 준비가 부실하고일본이 도울 상황은 못 되며이런 이유로 미국은 중국에 굴복할 것이고그리되면미국의 대만 포기와 일본 재무장 불가로 이어질 것이라며 중공의 개입을 적극적으로 촉구하였다. 이에, 잠시 출병을 중지하였던 ‘마오쩌둥’은 10월 13일, ‘스탈린’의 강한 참전 요구를 재확인한 뒤, 소련의 지원이 명확한 이상 중국이 공산당 동지인 북한을 지원하는 것은 옳고당연하다는 의견으로 참전을 결정하였고, ‘스탈린’에게 아래와 같은 전문을 보냈다.


우리는 지원군(志願軍명의로 인민해방군 일부 파견을 결정했다조선 경내에서 미군과 그 주구의 군대를 상대로 작전을 펴며조선 동지를 지원하겠다만일 미군이 전 조선을 점거하면조선 혁명은 실패로 돌아가고미 침략자의 창궐이 극에 달해 동방에 불리하기 때문이다목전의 상황을 좌시할 수 없다. 10월 15남만주에 주둔 중인 12개 사단을 출동시키겠다작전 범위는 38선에 국한하지 않겠다적당한 지역에서 38선 이북에 진출한 적과 싸우겠다초기에는 방어에 주력하고소련의 무기(공군)지원을 기다리겠다모든 장비가 구비되면 조선과 연합해 미 침략군을 섬멸시키겠다”.


한 국가의 전쟁 개입 결정치고는 매우 신속한 반응이었다. 1950년 7월 당시, 김일성은 물론, ‘스탈린’도, 미군이 그렇게 빨리 참전할 것으로 판단하지 못하였다. 하지만, 노회한 ‘스탈린’이 중국을 그 대안으로 설득하였던 게 주효하였다.


그렇지만, 10월 17일, 중공군 부사령관 겸 제13병단 사령관 ‘덩화’ 등 주요 지휘관이 ‘마오’에게, 항공지원도 없고대공화기도 부족한 상태에서 방어진지를 구축하기 어려운 겨울에 진출하기보다는 1951년 봄에 출병하자는 건의를 내었다. 이에 대해, 10월 18일 ‘마오’는 다시 공산당 주요 간부회의를 주관하며, 소련에서 막 돌아온 ‘저우언라이’로부터는 스탈린의 입장을 전해듣고, ‘펑더화이’로부터는 일선 지휘관들의 입장을 청취하였다. 그리고나서, 중공군의 개입과 압록강 도하 시간을 10월 19일 저녁으로 확정하여 지시하였다.


그리고, 이미 도하를 시작한지 5일 후인, 10월 24일, ‘마오쩌둥’은 중국 정부와 당대표가 참석한 특별회의에서, 한반도가 중국에 이르는 관문이며과거일본이 한반도를 점령하고 중국을 침공한 사실을 지적하며, 중국 정부는 미국의 한반도 점령을 받아들일 수 없다는 점을 분명히 밝혔다. 마오쩌뚱의 담화 다음 날, 이미 도하를 완료하고 정중동의 침묵을 이어가던 중공군은 드디어 미국에게 기습적으로 덤벼들었다. 1950년 10월 25일,  중공이 기습적이지만 공식적으로 한국전쟁에 참전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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