AD 392 년 기독교가 로마의 국교가 된 이래, 약 천 년 이상을 ‘신성’에 의지하던 서구가 ‘암흑기’를 벗어나, '문예혁명'으로 ‘인성’을 앞세우며 문화, 예술 및 과학기술의 발전을 거듭하며 산업혁명과 제국주의를 이루었다. 하지만, 이슬람 공동체 '움마'는 알라(신)와의 수직적인 관계를 강조하지만, 대인 관계는 수평적이고 느슨하였다. 이슬람은 창시 이후 비록 대제국을 건설하였으나, 정교일치의 정체된 ‘원리주의’로 오로지 ‘신성’에만 의지하여 평화와 안정을 누려왔다. 그 결과, 이슬람은 근대 문명에서 뒤처져, 18세기 이후, 이슬람은 산업화를 앞세운 서구의 끊임없는 도전에도 무기력하게 대응하다가 급기야는 그들의 식민지로 전락하였다.
이후, 이슬람은 한동안 자신들보다 앞선 서구의 과학기술과 발전을 부러워하고 서구를 모방하려 하였다. 하지만, 참혹했던 제1차 세계대전과 제2차 세계대전을 목도하고 종전 이후, 그토록 강성하던 대영제국이 약화되고, 미-소가 냉전체제하의 극단적인 이데올로기 대립을 벌이는 등, 서구의 약해진 모습과, 물질만능주의로 피폐해진 서구의 속 모습을 보았던, 이슬람은 이제까지, 알라(신)만 믿고 경건하게 살아온 자신들의 모습이 물질을 갖기 위해 전쟁으로 '이전투구'를 벌이는 서구보다 '더 낫다'는 자부심을 회복하기 시작했다. 언제부터인가 그들은 마치 약속이나 한 듯이, ‘이슬람으로 돌아가자’라고 외치기 시작하였다. 이런 구호는, 서구의 과학 기술 문명은 받아들이지만, 모든 생활 방식은 이슬람적으로 살아가자는 것이다.
무슬림의 이 같은 자각과 이슬람의 부활은, 아이러니하게도 서구가 무슬림이 결사코 반대하던 ‘이스라엘의 독립’을 지원한 것으로, 이는 이슬람의 각성을 촉발하였던 결정적인 사건이었다. 제1, 2차 세계 대전 중, 영국 등 서구가 유대국가를 ‘팔레스타인’ 지역에 세우려 하자, 그동안 지루한 세습과 전통에 갇혀 뿔뿔이 흩어져 서로 대립하던 중동 아랍권은 그때서야 대동단결하여 이스라엘의 독립을 저지하기 위해 허둥대기 시작했다. 이는 마치 물고기를 키울 때, 같은 종류의 물고기만을 키우기보다, 메기나 상어 등 천적을 한, 두 마리 넣어 두면 다른 물고기들의 생존력이 훨씬 더 커지는 것과 비슷한 상황이랄까?
그런데, 아랍 각국은 서로 단결하였지만, 외견상 절대적인 우세에도 불구하고 1948년 제1차, 1956년 제2차, 1967년 제3차 그리고 1973년 제4차 전쟁까지, 4번 모두 공동의 적인 이스라엘에게 패배하였다. 그 과정에서 미국, 영국 등 서구 국가들이 자신들을 제쳐놓고 노골적으로 이스라엘을 지원하는 것을 강하게 인식하였고, 종교적인 원인에서 그 답을 찾았다. 그리고, 그제서야 무슬림 대중은 '기독교와 이슬람'이라는 해묵은 대결구도를 받아들이고, 자기 각성의 시대를 가지게 되었다.
이런 각성의 계기는, 1970년대 초에 불어닥친 ‘오일 쇼크’와도 관련이 있다. 1973년 이집트가 승기를 잡은 제4차 중동전에서, 미국이 이스라엘을 지원하여 오히려 역전패를 당하자, 이에 분노한 사우디 등 아랍권 석유 산유국들이 일제히 '석유 무기화' 정책을 추진하며 서구계 석유 메이저들의 지분 인수를 통하여 석유시설을 국유화하고, 팔레스타인의 권리회복을 주장하며, 석유 감산과 동시에 원유 가격을 배럴 당 2.9달러에서 12달러로 인상했다. 아랍이 '석유의 무기화'를 선언하면서 노린 목표는, 미국, 영국 그리고 자신들을 지지하지 않는 서구 국가들에게 경제적 타격을 가하는 것이었다. 기존의 저유가가 상식이었던 미국과 영국 등 서구는 경제적 위기에 직면하였다. 반면에, 이들은 자신들을 지지한 한국, 일본 등에게는 5% 감산 유예를 해 주었다.
이처럼, 그들이 석유를 ‘무기화(제1차 오일 쇼크)’하자, 서구가 즉각적으로 저자세로 변화한 것을 직감하면서 과거 문화에 대한 자부심의 회복은 물론, 완전한 종교에 대한 확신을 더욱 굳건히 하게 되었다. 특히, 사우디의 경우 석유 '시장 질서 주도국(스웡 프로듀스)'의 지위를 얻으며, 서구에 대해 오만에 가까울 정도로 맞서 대하게 되었다. 이처럼, 유가상승은 아랍 산유국들에게 막대한 부를 안겨 주었지만, 서구는 2차 대전 승전국으로서 누렸던 '영광의 30'년에 종지부를 찍고 극심한 불황에 접어들었다.
이제, 아랍은 석유를 무기로 피지배와 종속의 아픈 역사로부터 서구에 대한 우월감을 한껏 과시하는 자만의 시간을 가지게 되었다. 뿐만 아니라, 이러한 엄청난 부를 인접 아랍 형제국들과도 나누면서 아랍과 이슬람권 국가들의 유대를 과시하였다. 이러는 동안에도, 한번 오른 유가급등의 기세는 이후에도 계속되었다.
1979년 3월, '팔레비' 왕조를 무너뜨린 이란혁명 당시에는 배럴당 30달러에 이르러 서구는 ‘제2차 오일 쇼크’를 경험하였고, 이어진 '이란-이라크' 전쟁 (1980-1988)으로 한때는 100달러 이상으로 치솟으며 중남미와 동구권 국가들이 외채 위기를 당할 정도로 전 세계 석유 수입국가들을 괴롭혔다. 그러나, 1983년, 서구 국가들과 OPEC의 감산해제 합의로 30달러 이하로 안정화되었고, 1986년에는 다시 7달러까지 폭락하였다. 이로서, '2차 오일 쇼크'는 역쇼크로 막을 내렸다. 하지만, 두 차례 석유 파동을 계기로 똘똘 뭉친 중동권 산유국들은 엄청난 부를 축적하였고, 세계경제에서 무시 못할 위상을 차지하였다. 이제, 이들은 더 이상 서구 제국주의에 휘둘리지 않는다는 자신감을 갖게되었다.
그리고, 이런 단결된 모습은, 소련의 대 ‘아프간 전쟁(1979-1989)’에서 과시되었다. 지난 200여 년간 서구의 힘에 눌렸던 이슬람교도들은 세계의 초강대국인 소련을 맞아 10여 년간 ‘아프간 전쟁’ 전쟁을 치르며, 자신들의 능력을 확인하였다. 누구도 예상치 못한 일이었다. 특이한 것은, 전쟁에 자진 참여한 중동 각국의 전사들은 세계 최강대국을 상대로 ‘지하드’를 수행하면서, 자신들이 성취한 것에 대한 자부심과 자신감을 가졌고, 이는 새로운 승리를 위한 강한 열망을 남겼다. (이들은 향후, 서방을 상대로 한 '테러' 전쟁의 주역이 되었다.)
이로써, 이슬람은 중동전에서의 패배감, 서구의 지배와 경제적인 수탈에 대한 무력감을 극복하고, 세계 최강 소련에 대한 군사적인 승리 등으로, 자신들의 때 묻지 않은 순수함과, 종교적인 교리의 우월성, 완전한 종교에 대한 확신, 과거문화에 대한 긍지 등으로 강한 자부심을 가지게 되었다. 그리고, 이들은 이스라엘을 지원하는 서구에 대한 반감으로 결국은, '서구는 서구일 뿐, 이슬람은 이슬람에서 해답을 찾아야 한다'라고 자신을 더욱 강하게 다잡았다. 이후부터, 무슬림들은 국제사회의 관점에서의 잘잘못을 떠나, 서구가 이슬람권의 분쟁에 개입하면(이라크의 쿠웨이트 침공 등), 이슬람 국가는 친서방, 반서방을 떠나 개입 자체를 자신들의 문명에 대한 도발로 인식하고, 모두가 합심하여 서구의 개입에 저항하고 맞서는 모양새로 대립각을 세우게 되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