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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김성웅 Oct 04. 2024

십자가와 초승달 (제12화)-이라크 vs 이란 전쟁

이란-이라크 전쟁


이란-이라크 전쟁은 종교 전쟁이지만, 종교를 넘어선 정치 전쟁이었다. 

'정교일치'적인 관점에 있는 이슬람 국가들 중에서, 정치문제가 종파 대립으로 진행되는 사례는 지난 1,400여 년간 이슬람 역사에서 자주 있었다. 그중에서도, 1980~1988년간, 약 100여만 명의 희생자가 발생하고 두 나라가 기진맥진할 정도로 국력을 소진한, 이란-이라크 전쟁은, 수니파인 이라크의 ‘후세인’과 시아파인 이란의 ‘호메이니’ 간의 대리전 양상이었다. 하지만, 이 전쟁은 종교적 영향력보다 정치적 영향력 확대가 목표여서 종파 자체의 격멸을 겨냥하지 않았다. 예컨대, 무슬림은 하루에 5번 기도하는데, 양쪽이 전투가 계속이어지는 경우에는 어쩔 수 없었지만, 일부러, 이 시간대에 기습하는 행위는 별로 없었다. 이집트가 제4차 중동전 발발시 이스라엘의 '속죄일(욤 키프르)'에 스에즈 운하를 도하하여 기습을 가했던 것과는 다른 모습이었다. 


이란은 16세기 초 ‘사파비’ 왕조가 '시아파'를 국교로 인정한 후, 아랍 '수니파'와 결별하고, 국민 대다수가 '시아파 무슬림'으로 분파함으로써 강한 종교적, 민족주의적 색채를 띠게 되었다. 이에 비해, 이라크는 시아파가 60%, 수니파가 30%, 기타 쿠르드 등 10%이지만, 사담 후세인 등 지배계층은 거의가 소수의 수니파였다.

이란의 시아파는 이라크 내 시아파를 암암리에 지원하다가, 1979년 친미 팔레비 정권을 무너뜨린 이슬람 혁명이 성공하자, 이라크 내의 시아파에게 반란을 촉구하며 아랍 전체에 이슬람 혁명을 수출하려 하였다. '호메이니'의 혁명은 오디오 테입에서 촉발되었다. TV 등 대중 매체가 관영으로 정부의 손아귀에 놓이자, 혁명 세력은 수백만장의 오디오 테이프에 정권에 저항을 선동하는 '호메이니'의 육성을 담아 전국에 뿌렸다.


이런 '호메이니'의 강력한 영향력에, '강한 이라크'를 강조하던 후세인은 이런 시아파의 준동을 커더란 정권 위협세력으로 간주하고, 자국내 시아파의 반정부 항쟁을 무자비하게 제압하는 한편, 혁명 선동의 본거지인 이란에 대한 군사적 승리로 정치, 외교적 우위를 명확히 하려 하였다. 특히, 이란이 혁명의 와중에 유능한 친미 이란 군부인사를 숙청하는 등 혼란을 겪자, 이를 호기로 이란을 제압하고 페르시아만의 패권을 찾고자 했다.


이란-이라크 전쟁은 무능한 군인들에 의한 무모한 전쟁이었고, 무의미한 소모전이었다.


양국 간 전쟁의 가장 큰 문제는 전략적인 면에서는 전쟁 수행을 위한 전략이 불명확, 부적절하였고, 군사적인 관점에서는 양측 모두, 전쟁을 지휘, 통제하는 지도부가 문제였다. 지휘 통제 측면에서, 한쪽은 전쟁을 몰라서 통제조차 못하였고, 다른 한쪽은 독재자의 원격 지시를 받았다. 


이란은 한국과 함께 전 세계에서 미국식 군사교육을 받은 장교가 가장 많은 군대였으나, ‘호메이니’가 ‘팔레비’ 왕조의 잔재와 조종사 등 친미파 주요 군 간부들을 모조리 제거하자 하급 장교나 하사관이 졸지에 벼락 승진을 하였다. 한편, 전쟁 직전 창설된 (시민 지원병으로, 종교적 신념으로 무장된 준 군사단체였던) ‘혁명수비대’는 지리멸렬된 정규군에 비해 전투의지는 강했으나, 전쟁 지휘 경험이 전무하였다. 그런데도, 이들이 정규군과의 주도권 다툼으로 지휘계통상 극심한 진통을 겪으며서, 전쟁을 통제할 기구조차 구성하지 못했다. 지휘 통제가 안된 전투부대들은 뒤죽박죽이 된 채로 전투에 임했다. 또한, 미국과의 단교로, 팬텀 전폭기 등 이란의 미국제 무기는 부품제한으로그 기능을 발휘할 수 없어 무용지물이 되었다. 아무리 우수한 장비를 갖고 있더라도 우수한 전쟁 지휘관에 의한 적절한 전략개념, 작전계획, 전투기술 등이 뒷받침되지 않으면 무용지물이다.


이라크군이라고 별반 다르지 않았다. 야전 지휘관들은 모두가 사담 후세인의 충복들인 정치군인으로 채워져, 독자적인 작전을 수행하기보다 지도자인 후세인 개인의 결정이나 전쟁지도에 너무 의존하였다. 그 바람에 작전 지휘조차 일일이 그의 결재를 구하여 긴급한 상황에서도 시간을 낭비하거나 호기를 놓치곤 했다. 전쟁수행 시, 지휘 및 통제는 일원화하되, 현장 지휘관에게 과감한 권한 위임이 중요하다. 


한마디로, 현대전 수행능력이 없는 무능력자들이 국가와 국민을 파국으로 몰고 간 전쟁이었다. 이 전쟁에서 보인 양국 군 간부들의 작전적 수준은, 거의 ‘초보’ 수준으로, 양측 모두 제대로 된 전략이나 군사 작전을 수립하거나 작전을 지휘할 만한 수준이 아니었다. 


무능한 지휘부에 의해 강요된 공, 방의 결과는 참혹하다. 먼저, 선제공격을 가한 후세인은 초기에 '제한 전쟁'의 개념으로, 분쟁 원인 중의 하나였던 ‘샤트 알 아랍’ 수로와 국경지역 일부 요충지 등 몇 개의 지역적 특정 군사목표를 점령한 후, 전쟁 종결을 위해 속전속결로 전쟁을 끝내고자 했기 때문에 장기전에 대한 대비가 없었다. 이라크는 이란이 혁명의 후유증으로 전쟁의지가 없을 것으로 판단하였던 것이다. 그런데, 속전속결이라면 초기의 기습공격효과로 적의 군사적 역량을 말살시켜 저항의지를 꺾어야 하는데, 공자와 방자 서로가 이런 원칙에 무관심하였다. 덕분에, 어느 쪽도 치명적인 타격을 입지 않고, 대등한 전력과 유사한 전략으로써 그저 일진일퇴를 거듭하며, 8년 동안 엄청난 국력을 소진시켰다.


또한, 양측 지도부가 대국민 홍보용으로 지역 확보에 집착한 것이 양측 모두의 패착이었다. 도시나 지역확보는 군사 전략, 전술에서 큰 부담인데도, 양측은 도시를 공격하고 땅을 뺏는 표면적인 ‘승리’에 만족하기 위한 공방전에만 집중하였던 것이다. 뿐만 아니라, 전술 지식이 없는 이라크 기갑부대가 보병의 지원도 없이 시가전을 전개하다가 이란군의 대전차 화기에게 걸려 전차 수백 대가 희생되었다. 근대적인 기갑전투의 경험 부족으로 졸렬하게 전차를 운용한 결과였다. 이라크 공군도 후세인의 지시로 이스라엘 공군이 '6일 전쟁' 시 보였던 기습작전을 모델 삼아 이란 공군을 지상에서 격파하려 했으나, 조종사들의 기량 부족으로 실패하였다.


이란 혁명수비대 소년군 '바시지'의 일원(출처: 위키피디아)

한편, 이란도 ‘바시지’라는 어린 소년 자원병들은 비록, 순교자 정신으로 무장하였다고 하지만 포병지원도 없이 인해전술을 감행하여 수천 명이 희생되는가 하면, 지뢰지대를 무작정 돌파하다가 엄청난 희생을 치렀다. 물론, 이러한 이란 소년 민병대의 무모한 ‘인해전술’은 후속 제대에게 공격로를 열어 주기도 하였고, 이라크 군에게 큰 공포감을 안겨 주어 처음 얼마 간은 이라크 방어선을 쉽게 뚫는 데 유용하기도 하였으나, 이들은 잘 준비된 이라크군의 ‘살상격멸지대’에 걸려들어 포위, 섬멸당하기도 하였다. (살아남은 이들은 전쟁 이후, 이란의 체제 수호세력으로서 영행력을 행사하며, 일부 반체제 세력에 대해서 테러 등을 자행하기도 하였다). 


이란-이라크 전쟁은 미국이 벌인 첩보전의 희생물(?)이다.  


현대전에서는 무기장비 및 물자의 소모가 엄청나기 때문에 전시 동원능력이 중요하다. 전체적인 국가의 동원 역량면에서 이란이 이라크보다 몇 배 우세하였다. 그리고, 1, 2차 오일 쇼크를 겪으며 서방이 고전하는 동안 이란과 이라크는 석유 판매로 막대한 부를 축적하였다. 하지만, 석유확보를 위해, 부심하던 미국은 정권 기반이 취약한 팔레비 정권에게 막대한 무기를 수출하며 미국의 영향력을 확대하였다. 이란은 미국의 '꿀단지'에 불과했다. 그리고, 이라크 역시 제4차 중동전을 목도한 이후에 미국제 장비로 군사력 강화에 부심하였다. 


그렇지만, 이란-이라크 양국의 군수산업 수준은 매우 취약하여, 대부분의 탄약과 무기체계를 미국 등 서구의 수입에 의존하였고, 이들 무기의 정비나 수리 능력은 물론, 부품이나, 예비품의 확보도 거의 없었다. 전쟁 내내 이란은, 시리아와 리비아의 후원을 받았지만, 이들에게 정작 이란이 필요로 하는 미국제 장비나 부품은 전혀 없었다. 전쟁 도중에, 얼마나 다급했으면, ‘호메이니’는 종교적으로 극도로 혐오하는 적국 이스라엘로부터 1억 달러 상당의 F4E 팬텀 전투기와 그 부품을 구매하기도 하였을까? 또한, 사병들의 교육, 훈련 수준이 너무 낮아 선진 무기를 다루는 데도 상당한 어려움을 겪었다. 전쟁은 돈이나 의지만 가지고 될 일이 아니다. 


전쟁 발발 시, 미, 소 등 강대국들은 표면적으로는 중립적이었다. 하지만, 미국이 중동의 대국 친미 '팔레비' 왕정을 잃은 것은 미 CIA의 커다란 실책으로 간주되었는데, 설상가상으로 '팔레비'를 타도한 '호메이니'가 미대사관 직원들을 억류하며 극단적인 반미 감정을 표출하자, 미국은 '이이제이'랄까? '적의 적'인 이라크를 은밀하게 적극 지원하였다. 미국은 이란 공격에 첩보위성으로 각종 부대이동이나 전략적 공격목표에 대한 정보를 수집하여 이라크에 제공하였고, 이런 첩보 작전은 중동의 양대 거국의 군사적 힘을 쑥 빼어 놓았다.


전쟁 중반 이후, 미국은 이라크의 화학무기 사용, 이란의 여성 징집, 쌍방 간 도시에 대한 미사일 공격 등에 대해서는 양비론을 쏟아내었지만, 실제로는, 1984년 ‘호르무즈’ 해협을 통과하는 각국의 유조선을 이란이 공격하자, 자국의 유조선을 보호한다며, 소련의 무력 충돌 위협 경고에도 해군력을 파견하여 이란을 견제하였고, 1987년 미 함대가 쿠웨이트 등 GCC 국가의 유조선을 호위하는 작전을 수행하는 과정에서 공개적으로 이란 해군과 충돌하였으며, 1988년 초에는 이라크 공군에게 탄도미사일가지 제공하였다. 


1988년 말, 양국은 8년 간의 전투에서 승자도 패자도 없이 기진맥진한 채 유엔의 휴전제의에 응하였다. 둘 다 원유수출 중단으로 돈줄이 떨어졌고, 서로에게 결정타를 가하지 못한 것이 전쟁을 멈춘 주요 요인이었다. 

이라크는, 전, 사상자 15만 등 인원피해와, 경제 및 기간산업의 파괴 및 엄청난 전비 등 직, 간접적인 손실(군수물자, 파괴복구 손실 등)은 약 4,000억 달러로 추계되는데, 그렇게 막대한 돈을 쓰고도 ‘후세인’은 걸프 지역의 영향력 있는 지도자가 되기는커녕, 시아파 이슬람 혁명조차 분쇄하지도 못하였다. 다만, 전체 인구의 60%에 달하는 시아파를 공포나 무자비한 학살로 통제하여 전쟁 기간내내 이들의 동요를 막았다. 뿐만아니라, 수니파인 이라크는 사우디 등 인접 수니파의 지원을 받는 가운데서도, 이라크 최전선에는 시아파 병사들이 대다수 였으며, 이들은 수니파 장교의 지휘아래 같은 시아파 교도인 이란과 전투를 벌였다. 


또한, '끝까지 싸우겠다'라고 고집 피우던 ‘호메이니’ 역시 이슬람 혁명을 '이라크'에 전파하거나 후세인 정권을 타도하지 못했다. 이란 역시 전, 사상자 75만여 명에 직, 간접적 손실 6,000억 달러이며, 전쟁미망인이 수십 만을 넘어섰다. 전쟁 결과 남은 것은 경제의 파탄, 호전적 이미지, 그리고 국제적인 고립이었고, 보통 국가로 성장할 수 있는 시기를 20~30년 정도 늦추고 말았다. 지도자의 편견과 고집이 국가를 궤멸상태로 몰고 갔다. 그런데, 전후, 난국을 타개하기 위한 양국의 입장은 극명하게 다르다. 이란은 우선 비군사화와 경제재건을 택했고, 이라크는 채무탕감을 위해 군사력을 회복하여 이웃의 부국인 쿠웨이트를 정복하려 하였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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