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메이지 유신과 군국일본-⑬급진 강경파 유신의 개혁자

조슈번의 '기도 다카요시'

by 김성웅 Jan 18. 2025

새로운 시대의 정치 리더십     


흔히, 메이지 유신 3 걸(三傑)이라 하면 ‘삿초(薩長) 동맹’의 주역인 사쓰마(薩摩) 출신의 '사이고 다카모리'(西鄕隆盛)·'오쿠보 도시미치'(大久保利通)와 함께 조슈 출신의 ‘기도 다카요시’(木戶孝允)를 가리킨다. 이전 장에서, ‘막부의 조슈정벌’ 과정에서는, 이들 세 사람이 등장하여, ‘삿-쵸 동맹’을 맺고, ‘대정봉환’을 이루며, 다시 '왕정복고 쿠데타'로 '메이지 유신'을 주도하였다. 이들은 유신정부에서 각각 '총재실(천황실) 징사'(국무조정실장격), '군 총사령관'(국방), 행정 각료(내무) 등으로 각 단계마다 커다란 역할을 수행하였다. 


그런데, ‘최후의 사무라이’로 불리며 후대까지 큰 인기를 누린 ‘사이고’와 오늘날까지 일본정치의 중요한 한 줄기를 형성하고 있는 ‘오쿠보’에 비하면 ‘기도 다카요시’는 일반인의 관심이 적은 인물이었다. 어떤 인물에 대해 무슨 아버지, 무슨 무슨 3걸, 5걸 10걸하면서 의미를 부여하는 일본인들이, '기도 다카요시'에게는 '유신 3걸'이라고 하면서도 그의 치적보다는, 게이샤 '마쓰코'와의 사랑과 결혼, 그리고 요절 등 개인사에 더 많은 관심을 보인듯 하다. 어쨌든, 그는 유신이후 최고위 인사로 10여 년의 정치활동을 하는 동안, 누구못지않게 중세 봉권주의적 무인정권으로부터, 근대적인 국민국가 일본으로 탄생하는데 큰 역할을 한 정치 지도자였다.


일본 국회도서관에 소장 중인 '기도 다카요시' 사진일본 국회도서관에 소장 중인 '기도 다카요시' 사진

‘기도 다카요시’는 지금의 야마구치현인 조슈번의 하기시에서 하급 무사 집안인 '와다 마사카게'의 막내아들로 태어나 '가쓰라' 집안에 양자로 들어갔다. 하기에서 성장하는 동안 나이가 3살 정도 위인 ‘요시다 쇼인’의 문하생으로, ‘쇼카 손주쿠’ 기숙학교에서 병학은 물론, 존왕양이 사상을 배우고, 다양한 신문물에 관심을 갖고 공부하는 동안 '막부' 타도를 이끈 미래 조슈 번의 지도자들과 가깝게 지냈다.     


'기도 다카요시'는 1862년 조슈 번정의 지도자 가운데 한 사람으로, '나가사키'와 '시모다'에서 서양식 함선의 건조를 참관한 후 조슈에 돌아와 조슈번의 첫 번째 전함 건조를 감독하고 있었다. 그런데, 앞서 살펴본 대로 중앙 정치에서 조슈번의 급진파 세력이 강해지고 8.18 정변 등으로 막부와의 갈등이 이어지자, ‘도쿠가와 막부’는 대규모 병력으로 조슈번에 원정하여 항복을 받았다.(제1차 조슈-막부 전쟁)


이후, 조슈번에 들어선 보수 정부가 '기도' 등 급진파 지도자들을 가혹하게 탄압하자 ‘기도’는 번외로 숨어들었지만, 막부 군대가 철수하자 ‘쇼카 손주쿠’ 출신의 ‘다카스기 신사쿠’가 다시 '시모노세키'로 돌아와 1865년 12월 15일, 시모노세키 근교 ‘고잔지’(공산사)에서 거병을 하고, 점차 세력을 키워가다, 조슈번 보수파를 격파하였다. 승리한 '다카스기'는 '쇼카 손주쿠'의 선배로서, 검술에도 조예가 깊고, 서양 문물에도 밝은 ‘가쓰라 고고로’(‘기도 다카요시’로 개명)가 조슈번 정계를 이끌도록 모셔오고, ’다카스기‘ 자신은 그 밑에서 군사부를 담당하였다.

      

조슈번의 지도자가 된 '기도'와 군사부문을 담당한 '다카스기'의 첫 임무는 막부의 제2차 출병에 대비하는 일이었다. '기도'는 우선 조슈 번내의 군사전략가로 알려진 '오무라 마스지로'를 상급무사로 영입하여 군사제도 개편과 방어 전략을 준비하였으나, 막부가 외부와의 접촉을 차단하여 필요한 신식무기를 얻지 못하는 고립무원의 상태였다. 그때, '사카모도 료마'가 찾아와 사쓰마 번과의 화해를 주선하였을 때, '기도'는 죽은 동료들을 생각하면 앙숙인 사쓰마와 '화해는 불가능하다'라고 생각하였지만, '존왕'과 막부타도의 대의에 순응했다. 


하지만, '기도'가 사쓰마에 당한 분노로 울분을 토하면서 협상이 난관에 봉착하였을 때, 사이고는 머리 숙여 지난날을 빌며, 서로 간에 묵은 감정의 응어리가 풀리자, 조슈 번의 우두머리로서 '기도'와 사쓰마 번의 리더인 ‘오쿠보 도시미치’, ‘사이고 다카모리’ 등의 급진파 사무라이들은 1866년 1월 이른바, ‘삿-쵸맹약’을 맺었다. 이 맹약으로 조슈는 사쓰마의 지원으로 막부와 싸울 다량의 신식무기와 함선까지 손에 넣을 수 있었다.    


1866년 6월, 막부가 조슈번 내 사정을 해명하라는 지시에도 불복함으로서  제2차 조슈전쟁이 발발하였다. 막부가 15만의 병력을 동원하여 공격을 개시하자, 비록 조슈가 ‘삿-쵸동맹’으로 대비한다고 하지만, 많은 이들은 ’이번에야말로 조슈가 끝났다‘고 생각하였다. 하지만, 전쟁 내내 막부군이 조슈 군에게 연전연패하고, 전쟁으로 전국적인 쌀값이 상승하여 농민 반란인 ’잇키‘가 곳곳에서 발생하고, 설상가상 쇼군 ’도쿠가와 이에모치‘가 병사하자, 막부는 더 이상 전쟁을 계속할 힘이 없었다. 전쟁이 끝났을 때 정작 막부가 끝난 상황이 되었다. 전쟁 내내 효율적으로 지원한 '기도'와, '다카스기'의 군사 리더십 그리고, '오무라' 전술의 합작품이었다. 


조슈-막부 전쟁에서 막부가 대패함으로써, 막부가 아무런 힘이 없다는 사실이 만천하에 드러나고, 조슈번의 리더였던 '기도 다카요시'는 일약 중앙정계의 강자로 등장했다. 조슈의 부상에 따라 새롭게 즉위한 쇼군 ‘요시노부’는 1868년 막부 해체와, 쇼군직 퇴위로 통치권을 천황에게 반납하겠다는 '대정봉환'을 제의했다. 이로써, 260여 년간의 에도 막부는 종언을 고했고, 천황이 정치무대로 나왔다.

     

하지만, ‘대정봉환’ 이후에도 막부 측이 행정을 대행하고 쇼군이 의회의 수장으로서 실질적인 지배력을 행사하는 등 정국 혼란이 계속되자, 1868년 1월 3일, 교토 황궁에서 ‘왕정복고 쿠데타’가 일어났다. 유신 세력이 ‘왕정복고’ 쿠데타 당일, 쇼군 ‘도쿠가와 요시노부’의 ‘내대신’ 직위와 영지 반납을 결의하자, ‘요시노부’는 천황과의 충돌을 우려하여 일단 ‘오사카’ 성으로 퇴거하였다. 이게 이른바, 메이지 유신(維新)이었다. 



보신전쟁과 '총재국 징사(徵士)'의 역할

1868년 1월 27일, 막부가 교토 신정부를 압박하고 정치권력을 되찾으려, ‘사쓰마 정벌’을 선포하자, 근대 일본의 국가 운명을 좌우할 절체절명의 최대 내전이었던 보신전쟁(戊辰戰爭, 1868.1~1869.5)이 발발하였다. 


막부군이 우세한 병력으로 교토로 진군하려던 초기 '후시미-도바' 전투는 불과 3일 만에 신식무기를 지닌 유신 군의 승리로 끝이 났고, 교토를 위협하던 막부군은 '조정의 적'으로 포고되었다. 그 사이, 신정부 지지세력의 구축에 전념하던 '기도'는 '징사(徵士, 국무조정실장 격)'라는 총재국(천황실) 고문(수석)으로 임명되어, 전쟁 중 지원업무 감독과 '전후처리'의 책임을 지게 되었다. 그는 먼저, '막부 토벌'을 신정부가 해야 할 급선무라고 강조하며, '에도'로 도망친, 쇼군 ‘요시노부’를 토벌하기 위해 유신 군을 '에도'로 향하도록 진언하였다. 


그런데, 에도성 공략을 앞두고, 마지막 쇼군은 '사이고-가쓰' 회담에서 '사이고'가 제시한 유신 정부의 '관대한 처분' 약속에 따라 근신처로 떠났다. 그러나, '기도'의 입장은 막부에 유화적 태도를 취하는 사쓰마 인사와 달리, "메이지 정권을 확고히 하는 데는, 전쟁보다 더 좋은 방법이 없다"라며 전쟁으로 강경진압을 주장하였다. 


소군 '요시노부'가 지난 ‘대정봉환’에 이어 '왕정복고'때에도 유신 군에게 전혀 저항하지 않고 이번에도 '유신 군의'에도성' '무혈입성'을 허락하며, 무력 충돌을 피한 뒤 근신처로 떠나자, 지금까지 기득권을 누려온 '도쿠가와' 가신들은 크게 분노하여, 항복을 인정할 수 없다는 여론몰이로 일부 군사들과 무장해제를 거부하고 난동을 피우기도 하였다. 결국, 대부분 가신들은 휘하 병력을 이끌고 에도를 떠나, 막부를 따르거나 지원해 왔던 ‘후다이’ 다이묘가 지배하던 일본 혼슈 '도후쿠'의 여러 번들과 동맹을 맺어 정부군에게 항전을 벌이게 된다.


그런데, 전쟁 지원 임무를 띤 '기도'는 에도에서 멀리 떨어진 '도후쿠' 전투에서 유신 군은 함선 등 수송 능력 부족으로 병력과 양식, 탄약 등을 충분히 지원하지 못해 전선지역이 고전하고 있는 것을 알고, 후방 지원 임무를 담당하던 '오무라'를 만나, "3~4개월 이내에 승리하지 못하면 신정부가 와해"될까 봐 노심초사하며 병력 증파와 수송함의 긴급 수배 등으로 적극 지원에 나섰다. 그의 노력이 통해서일까? 마침내, 9월 22일 막부 핵심 '아이즈' 번이 항복했다.

      

'도후쿠' 전쟁이 관군의 승리로 끝나자, '전후처리'를 담당하게된 '기도'는 항복한 각 번(藩)에는 '부현제도'를 도입하여 번 정부의 권력을 제한하고 중앙정부의 통제를 강화하는 한편, 번주와 가신들의 권위를 박탈하였다. 그런데, 전투에서 승리한 신정부 측 관군의 과도한 진압 행위가 '도호쿠' 지역민의 원성을 자아내고 있다는 사실을 인지한 '기도'는 백성들에 대해서는, '안정과 통합'을 위해 천황의 이름으로 ‘교화(敎化-교육과 교훈으로 사람을 올바른 길로 인도하는 것)와 덕화(德化-도덕적 가치를 통하여 사람의 마음을 변화시키는 것)’를 내세우며 민정국을 세우고 민정단속법령을 제정하여 지역의 민심 안정을 급선무로 수습하였다.


‘기도’는 또한, 전쟁으로 피폐해진 경제상황을 감안하여 항복한 막부 측 병사들의 '명예와 안정된 복귀'를 강조하였는데, 이는 전후 사회의 재건을 위한 중요한 요소로 작용하였다. 특히, 번이 아예 사라져 여러 곳에 나누어 수용 중이던 항복한 ‘아이즈’ 번 사들을 ‘홋카이도’로 이주시켜, 개척과 지역개발을 통해 그들의 궁핍한 생활을 구제하는 한편, 새로운 사회에 통합될 수 있는 기회를 제공하고,. 이들로 홋카이도를 러시아 남하로부터 방어해 보자는 생각을 가졌다. 이 같은 '기도'의 상황 인식과 정치적 노력은 당시로서는 놀라운 일이었다.  


보신 전쟁을 돌아보면 ‘기도 다카요시’의 탁월한 정치력을 볼 수 있다. ‘기도’는 '보신 전쟁'이 터지자, ‘전쟁’을 통한 막부 조기 평정을 줄곧 주장하였고, 이를 위해, 서일본 지역의 각 번들에게 유신정부 지지를 설득으로 받아내었고, '도쿠가와 막부'에 충성하는 반정부 세력의 사기를 꺾고자, 일찌감치 항복하고 떠나버린 ‘도쿠가와가의 출병’을 주장하여 이를 실현시켰으며, 전쟁 동안 유신파와 막부에게 중립을 지키던 서구 6개국의 '국외중립' 입장을 철회시켜 신정부를 유일한 정부로 인정받고 '에노모토'세력을 반란군으로 규정하였다.      

   

보신전쟁에서 활약한 신정부의 철갑함 '코데츠'보신전쟁에서 활약한 신정부의 철갑함 '코데츠'

또한, '기도'는 보신전쟁 간 막부 함대 해군사령관으로서 막부함대를 몰고 탈주하여 '에조' 공화국을 세워 저항하다가 항복한 ‘에노모토 다케아키’(榎本武揚) 등의 탈함 정권 수뇌부에 대한 ‘전후처분’에서, 막부 잔재 청산과 새 정부 권위를 내세우며 엄벌을 요구하였지만, '에노모토'의 처분은 신정부 내의 조슈파와 사쓰마파 간의 정치적 합의에 따라 이루어졌다. '에노모토'를 살린 것은 그가 항복하기 전 자신이 애독하던 '만국해율전서'라는 책을 "장차 일본에 도움이 될 책이라 태우기 아까우니 막부군에게 기증하고 싶다"고 보낸 사연도 참작된 것으로 보인다. 훗날, ‘에노모토’는 유신 정부의 각료가 되었다.


후몬지(보문사)- '기도 다카요시'의 추천으로 번의 상급무사로 발탁된 '오무라 마사지로'가 번의 군사제도 개혁과 군전술 교육을 위하여 개설한 사숙후몬지(보문사)- '기도 다카요시'의 추천으로 번의 상급무사로 발탁된 '오무라 마사지로'가 번의 군사제도 개혁과 군전술 교육을 위하여 개설한 사숙

전쟁 이후, ‘기도’는 전쟁 중 신정부가 자체 해군력을 갖추지 못하여 막부 함대에게 고전을 면치 못했던 경험을 통해 신정부에게 너무도 절실하였던 함선의 수배와 매입을 위해 곧바로 신정부 자체의 해군력 강화에 전념하였다. 그리고, 조슈번 출신 정치적 동반자로서 ‘일본 근대 군대의 아버지’로 불리는 ‘오무라 마스지로’(大村益次郞)와 긴밀히 협력하며 해군 우선의 ‘병제(군제)’기초를 확립하고, 너무나도 저실하였던 함선의 수배와 매입을 위한 재원 마련, 해군사관 양성학교 설치, 해군함대 창설 등 해군력 강화를 위한 준비 중, '오무라'가 1869년 암살되었다. 이러한 곤란 속에도 '기도'가 해군력 강화제언을 선도적으로 제창하자, 유신 정부는 1872년 2월 내각에 최초로 해군성을 설치하였다.     


그런데, 메이지 유신의 가장 권력 있는 지도자 중의 하나인 ‘기도’에게 이런 '전후처리' 이외에 무엇보다도 중요한 것은, ‘에도’를 도쿄(東京)로 개명하며 제국의 수도로 만들어, ‘에도’가 더 이상 막부 쇼군의 도시가 아니라 이제부터는 '천황의 도시'가 되었음을 알리는 일이었다. 


이는 왕정복고를 통해 세속 권력을 장악한 메이지 천황을 사람들에게 알리고, 또 보신전쟁에서 패배한 ‘에도’ 시민을 위로하기 위한 목적으로, 수도를 교토에서 에도(지금의 도쿄)로 옮기는 과정이었다. 이를 위해, 보신전쟁 중, 유신 정부군이 '에도' 성을 함락시킨 지 4개월 후인 8월 4일에, ‘메이지’ 천황의 '에도 행차'를 공포하였다. 수도 이전을 책임을 졌던 ‘기도’는, 폐번치현 이후에는 국가를 여러 현들로 재분배하여, 중앙 정부에 의하여 임명된 지사들에게 다스리도록 하였다.     


보신전쟁에서 승리한 ‘메이지 정부’가 본격적으로 ‘서양화’와 ‘근대화’를 지향하자, 신정부에 참여한 ‘기도' 는 '오쿠보' 등과 함께 급격한 ‘서양화’와, ‘부국강병’을 내세웠다. 하지만, 세금수입 부족을 만회하기 위해, ‘판적봉환’(版籍奉還, 1869.7월)으로 재정을 확보하였고, 재정이 확보되자 이번에는 그때까지도 여전히 권력을 지닌 번주와 사무라이들의 세력 약화를 위한 중앙집권적인 통제를 위한 ‘폐번치현’(廢藩置懸, 1871.8월)으로 근대화 작업을 주도하며 근대 일본의 기초를 다졌다.     


1871년, ‘기도’는 ‘오쿠보’, ‘이토’와 함께 ‘이와쿠라’(岩倉) 사절단에 참가하여 거의 2년간 세계를 순방하는 동안 엄청나게 견문을 넓혔다. 1874년 7월, 귀국한 이후에는 이전의 급진 강경론자에서 보다 완화된 점진 온건주의적인 태도로, ‘내치우선’의 입장을 취하고 국민교육의 충실과 입헌군주제 구축을 당면목표로 삼았고, 이는 ‘사이고’의 정한론(征韓論)에 반대하여 조선출병을 막았던 논리가 되었다. 보신전쟁의 힘든 경험과 개혁의 어려움, 그리고 신기롭고 압도적인 서양 문물에 대한 깨우침이 그를 키웠다.     


'기도'는 차분한 성격의 소유로, 서구화, 근대화 개혁을 진행하는 내내 죽마고우였지만, 강력한 개성을 내세우는 ‘사이고’와 ‘오쿠보’ 사이에서 내전 중에 직면한 수많은 국가적 과제들을 능숙하게 조율해 내었는데, 앞서 본 바와 같이 '보신 전쟁' 전후 처리와 정한론 반대에 뛰어난 수완을 발휘하였다. 그러나, 1874년 ‘오쿠보’의 대만 정벌 정책에 반대하다 사직하였다. '오쿠보'는 대만 공략을 성공하자, 1875년 ‘오사카’ 회의에서 '기도'에게 다시 정계 복귀를 요청하였고, 이후부터 서양식 헌법(입헌군주제) 수립을 위한 일을 도맡아 하였다.    

 

야마구치현 소재 '기도 다카요시' 신사야마구치현 소재 '기도 다카요시' 신사

그러던 중, 사쓰마에서 ‘사이고’가 일으킨 ‘세이난’ 반란이 일어난 직후인 1877년 5월 26일, 43살의 나이로 예전부터 갖고 있던 지병(결핵)으로 사망하였다. 1867년 조쇼-막부 전쟁에서 승리한 ‘다카스기 신사쿠’도 결핵으로 사망하였는데, 그와 밀접하게 접촉하였던 ‘기도’도 같은 병으로 사망하였다. 그 당시, 결핵은 과로하는 자에겐 불치의 병이었다.      


조슈번의 리더로, 메이지 유신의 3걸 중 1인으로, 근대국가의 출발점에서 맞닥뜨린 대위기에 대처하는 정치적 리더십을 보인 '기도 다카요시'는 천황으로의 정권교체가 '국가(일본)의 안전과 독립'이라는, ‘유신’ 즉 정권교체의 본래 목적을 달성하기 위한 삶을 살았다. 


비록, 지병으로 쓰러져 중앙집권화와 입헌군주제의 완성을 보지는 못했지만 ‘유신’ 이후 30대 중반나이로 10여 년의 짧은 정치활동 속에서, 국민에 의한 국가와 '의회주의'라는 신생 일본의 국가방향을 설정하고 새로운 패러다임(틀)을 구축한 굵직한 족적을 남겼다. 만약에, 급진적 개혁론자인 ‘기도 다카요시’라는 정치인이 없었다면, 메이지 개혁은 훨씬 더 보수적이었을 것이다. 그는 근대 국민국가 일본의 탄생에 큰 역할을 하였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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