부산 범일동 일대가 아파트 재개발로 인해 빠르게 변해가고 있습니다. 그로인해 오랫동안 이 거리를 지켜온 수많은 게이바들도 폐업을 앞두고 하나둘 문을 닫고 있습니다.
사라지는 공간들을 그저 바라만 볼 수는 없었습니다. 이 거리에서 웃고, 울고, 사랑하고, 버텨냈던 기억들을 그냥 보내기엔 너무 아쉬웠습니다.
그래서 몇몇이 모였습니다. 단골 사장님들을 인터뷰하고, 가게와 거리를 사진으로 기록하며, 우리가 머물렀던 시간의 흔적을 남기기 시작했습니다. 그렇게 시작된 프로젝트가 바로〈일동졸업〉입니다.
이 기록은 책으로, 그리고 전시로 이어집니다. 단지 과거를 추억하는 것이 아니라, 우리가 함께했던 밤들을 기념하고, 다음을 준비하는 졸업식이 되기를 바라는 마음으로...
<일동졸업> 프로젝트의 시작과 첫 전시에 대하여
“범일동 이쪽 라인 이제 재개발 된대요.”
오래전부터 들었던 이야기라 처음엔 대수롭지 않게 넘겼습니다. 하지만 어느 날, “이번이 진짜 최종이래요. 벌써 이사 갈 자리 알아보는 사장님도 있대요.”라는 말을 듣고는 정신이 번쩍 들었습니다.
하필이면 부산 사는 애인을 사귀게 되어 서울을 떠난 지 어언 20년. 애인이 범일동의 유명한 게이바 사장님과도 친분이 깊어 자연스럽게 나 역시 그 거리에 드나들게 되었습니다. 건강 걱정으로 한동안 거리를 멀리했던 시기도 있었지만, 범일동은 언제나 새로운 친구를 만나고 단골 사장님들과 농담을 주고받을 수 있는, 때때로 지루했던 커플 생활의 활력소 같은 곳이었습니다.
그런 곳이 사라진다고 하니, 마음을 쉽게 추스를 수가 없었습니다.
물론 모든 가게가 문을 닫는 건 아닙니다. 몇몇은 조방앞 쪽으로 이전해 영업을 이어가지만, 제가 자주 찾던 익숙한 가게들은 대부분 재개발 대상에 포함되어 있었습니다.
“이렇게 그냥 사라지는 건 너무 아쉬워요.”
단골 사장님께 그렇게 말하자, 그분은 한숨을 쉬며 말했습니다.
“그러게요. 뭐라도 우리가 있었다는 걸 남기고 싶긴 해요. 요즘 다른 사장님들도 똑같은 얘기 하세요. 이대로 사라지는 건 너무 허무하다고요.”
그때는 그저 서로 안타까워했을 뿐, 뭘 해야겠다는 생각까지는 미치지 못했습니다.
이 프로젝트가 본격적으로 시작된 계기는, 부산 퀴어 커뮤니티 공간 홍예당에서였습니다. 책읽기, 글쓰기, 영화보기, 스탠딩코미디 등 다양한 문화활동을 꾸려가는 이 공간에서 범일동 재개발 이야기가 다시 등장했습니다.
“그럼 우리가 게이바 거리의 기록을 남겨보면 어떨까요?”
예전에 읽은 다른 재개발 지역에 관한 책이 떠올랐습니다. 그 책은 사라진 동네의 일상을 지리적 역사와 주민 인터뷰로 엮어낸 평범한 기록이었지만, 진심이 담겨 있었고, 결국 그것이 주민들에게 의미있는 기념물이 되었습니다.
“오래 영업하신 게이바 사장님들을 인터뷰하고, 손님들한테 '나의 범일동' 같은 글도 받아서 책을 만들어 봐요.”
“인터뷰 해주실까요?”
“친한 사장님들께 졸라보죠 뭐.”
이렇게 다소 우기듯 시작한 프로젝트였고, 다들 비슷한 아쉬움을 품고 있었기에 금세 팀이 꾸려졌습니다. 인터뷰를 제외한 실무는 홍예당의 운영자 모리, 상근 활동가 푸른이 팔을 걷고 나서며 체계가 잡히기 시작했습니다.
제일 먼저는 범일동 게이바 거리의 흐름을 정리하는 일이었습니다. 이 역할은 제 애인 오스씨와 호형호제하던 루팡 사장님께서 맡아주셨습니다. 오랜 세월 이 거리를 지켜오신 분답게 교통부 시절부터 최근 변화까지 생생한 이야기를 들려주셨습니다.
폴로 사장님과는 가게를 막 정리한 다음 날 만났습니다. ‘트렁크쇼’라는 이름으로 시작해 지금의 ‘폴로’가 되기까지의 여정을, 마지막 접객의 흔적이 남은 공간에서 들을 수 있었습니다.
그 외에도 지맨, 쿠마, 악당 사장님들과의 깊은 대화를 통해, 내가 알고 있던 범일동이 지극히 일부분이었음을 깨달았습니다. 더 많은 분들을 만나고 싶었지만, 자주 가지 않았던 가게들은 쑥스러워서 차마 녹음기를 꺼내지 못했습니다.
이런 빈틈을 채워준 이가 바로 팟캐스트 <이웃집 오소리>의 진행자 휴고였습니다. 그의 번뜩이는 기획력 덕분에 젊은 사장님들이 운영하는 가게들도 인터뷰할 수 있었고, 프로젝트에 새로운 활력이 불어넣어졌습니다.
사진작업도 병행했습니다. 평소 인스타그램에서 눈여겨보던 사진작가에게 다짜고짜 DM을 보냈는데, 다행히 그 역시 범일동을 사랑하던 게이였습니다. 그렇게 마르스와 태오가 합류하게 되었습니다.
그들은 직장생활 틈틈이 시간을 내어, 가게의 내부와 외부, 낮과 밤의 범일동 풍경을 정성껏 담았습니다. 사진에 문외한인 제 눈에도 그 사진들은 단순한 기록을 넘어선 정서를 담고 있었습니다. 때로는 긴 이야기보다 한 장의 사진이 더 많은 말을 한다는 걸 실감했습니다.
“기왕 이렇게 멋진 사진을 찍었는데, 책에만 담기엔 너무 아깝지 않나요? 전시도 해요!”
아이디어가 나오자, 서로의 인맥이 총동원되었습니다. 전시 공간을 빌려줄 분, 방법을 알려줄 분들이 하나둘 마법처럼 등장했습니다. 게이 커뮤니티 안에 정말 많은 재능이 있음을 다시 느꼈습니다.
게이바 전시를 흔쾌히 허락해주신 사장님들, 실무를 꼼꼼히 챙긴 홍예당 활동가들, 전시 방법을 아낌없이 조언해주신 현직 작가님까지… 이 모든 분들이 “꼭 필요한 일”이라며 힘을 보태주셨습니다.
그래서 이 프로젝트에 <일동졸업>이라는 이름을 붙였습니다.
단순히 쫓겨나는 것이 아니라, 또 다른 미래를 향해 떠나는 졸업. 이 거리에서 우리가 얼마나 웃고 울었는지, 그리고 여전히 사랑하고 있다는 마음을 남기기 위한 작은 졸업식입니다.
부디 이 졸업식에 함께해 주세요.
전시 일정 및 참여 방법
1. 게이바 전시회
2025년 9월 25일(목) ~ 28일(일)
1988라운지 & 클로즈 (범일동)
오후 3시부터 가게 영업 종료 시까지
2. 기록집 출간 & 북토크
2025년 11월 중 출간 예정
(인터뷰, 에세이, 전시 사진 수록)
곧 텀블벅 펀딩도 진행 예정입니다.
3. 일반 갤러리 전시
2025년 11월 중
(퀴어를 잘 모르는 관람객도 환영입니다)
전시 정보 및 오시는 길
비온뒤무지개재단도 '졸업식'을 지원해주셨습니다. 이반시티, 언제나 고맙습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