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016 - 오히려 나이 때문에

늦었다는 말이 준 용기

by Hiraeth

8월, 50%

10월, 70%

12월, 85%


내 마음속 '한국 복귀 로딩 바(Loading Bar)'가 차오른다아아, 가자!

장기하의 노래 달이 차오른다처럼,

내 마음속에 한국으로 돌아가고 싶은 마음이 차오른 속도다



원래 계획은 단순했다. 실업급여를 받으며 한두 달 쉬다가,

11월 즈음부턴 죽이 되든 밥이 되든 이력서를 낼 생각이었다.

물론, 이곳 토론토에서, 원래 하던 개발자 일로.


그러다 실업급여를 받는 기간 동안 취업을 못하면, 한국으로 돌아가야겠다는,

어쩌면 운명의 흐름에 나를 맡기려는, ‘되면 좋고, 안 되면 돌아가면 되지’ 정도의 흐름에 맡긴 아주 수동적인 계획이었다.


토론토에서 개발자로 일한다는 건 꽤 매력적인 선택지다.

한국보다 널널한 환경, 더 빨리 모이는 돈. 그게 내가 이곳에 있던 유일한 이유였다. 토론토가 미치게 살기 좋다거나, 캐나다 문화가 내가 그리던 꿈같은 문화라던가 하는 이유는 없었다.


쉬는 날이 길어질수록, 다시 직장을 구하는 게 더 막막해진다는 걸 잘 알고 있다.

하지만, 모든 나의 귀한 시간과 에너지를 취업준비에만 쓰기엔 나는 이미 너무 지쳐있었다.


심지어 온종일 뉴스에서 나오는 취업시장이 어렵다는 말과 쏟아지는 레이오프 소식.

내가 혼자 아등바등한다고, 더 빨리 좋은 직장을 만나고 그러는 건 아니라는 것도 안다.


8월 초부터 12월 초인 현재까지 약 4개월. 나는 철저히 '비생산적'으로 살았다.

돈, 수입, 미래와 연결 짓지 않고 그냥 그때그때 내가 하고 싶은 것들을 했다.


아무것도 안 하고 숨만 쉬기,

하루 종일 TV와 책에 파묻히기,

AI에게 온갖 갑질을 하며 캐릭터 만들기,

여행 영상 조각들을 모아 새로운 포맷들로 릴스 만들어 보기...


그 '쓸모없어 보이는' 시간들이 너무나 행복했다. 누가 시킨 것도, 누구에게 보여주는 것도 아닌데, 몇 시간이 흐른 줄도 모르고 엉덩이를 붙이고 앉아 영상을 편집했다. 완성 후에 의자에서 일어섰을 땐 다리가 저릴 지경이었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헤매는 시간조차 즐겁고 신기했다.


벌써 시간이 흐른 게 아쉽고, 내일은 뭘 할지 기다려졌다.


하지만 한편으론 이대로 계속 놀 수는 없다는 죄책감도 내 마음을 짓눌렀다. 강의 콜렉터답게 결제했던 강의들을 훑어보았다. 그중 가장 최신 기술인 AI agent를 재생했다. 다시 본업이었던 IT에 슬쩍 발을 담근 것이다.


한 시간쯤 강의를 들었을까? 귀신같이 몸이 반응했다. 마치 우울증에 걸린 사람처럼 하루 종일 잠이 쏟아졌다. 다른 일을 할 땐, 아쉽게만 흘러가던 시간이, 코드를 보고 있으니 단 1분도 흐르지 않았다. 이토록 시간이 느리게 간다면, 이게 바로 요즘 유행하는 '저속노화'가 아닐까.


시작을 했으니 마무리는 해야겠단 생각에 억지로 진도를 빼기 위해 공부를 했다. 하지만, 이건 그저 내가 시간을 견디는 것뿐이었다. 머리에 내용이 들어오는 것 같지도 않았다. 눈을 뜨면 공부해야 한다는 압박감에 다시 눈을 감고 10시간이고 20시간이고 잠만 잤다. 그렇게 하루 종일 잠만 자고 나면, 엄청난 죄책감이 나를 사로잡았다.


시간이 지날수록 다시 개발일을 하고 싶지 않다는 게 명확해졌다.

개발일을 안 할 거라면, 그렇다면, 굳이 토론토에서 있을 이유가 없다.


운 좋게 지금 직장을 구해서 넉넉잡아 2,3년 더 다닌다고 생각해 보았다.

이미 시든 마음으로 몇 년 더 버텨봐야 뭐 하나 생각이 들었다. 그렇게 몇 년을 더 보내는 게 과연 의미가 있을까?

그래.. 돈은 조금 더 모을 수 있겠지...


친구들이 말했다.

한국에 오면 뭘 새로 시작하고 싶어도 이제 젊은 나이가 아니라 힘들 거라고.

그냥 토론토에서 버텨 보라고.


그런데 이상하게도, 그 말이 오히려 내 등을 떠밀었다.


어차피 언젠간 돌아갈 생각이고,

수명이 길어진 만큼 평생 밥벌이를 해 먹고살아야 한다면.

지금이 무언가를 다시 시작하기 가장 어린 나이일 것이다.


몇 년 더 버티면 결국 나는 40대 중후반, 50대 뭐 그렇게 되겠지.

그때 시작하는 것보다 갓 마흔이 훨씬 젊은 거 아닌가?


나이 때문에 힘들다는 말은,

오히려 나이 때문에 지체할 수 없다는 생각이 들었다.


이렇게 또 쉬운 길만 택하다 보면 나는 계속 흔들릴 것이다.

새로운 시작은 시간이 흐르는 만큼 점점 더 어려워질 것이다.


아직 돌아갈지 100% 마음이 선 것이 아니다.

여러 가지 시뮬레이션을 머릿속에 돌려가며 아직도 생각 중이다.


그러나 확실한 건.

나는 지금, 내 남은 생에서 가장 젊은 날의 결단을 내리고 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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